<조지 오웰> 4편
이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습니다. 1부 '탄광 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에서는 오웰이 직접 광부들의 작업을 체험했던 경험과 생각을 진솔하게 풀어내었고, 2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을 경고하고, 파시즘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민주적 사회주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 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이유를 진단하고, 향후 민주적 사회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오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로 근무합니다. 이때 경험한 억압자로서의 역할은 그동안 그가 알지 못했던 피지배자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동시에 영국 사회의 피지배였던 '노동 계급'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영국으로 귀국한 오웰은 자발적으로 부랑자의 삶에 뛰어들어,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이어갑니다. 그의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등에서는 당시 사회 하층민의 삶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오웰의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합니다.
직접 탄광에 들어가 광부들의 험난한 작업 환경을 경험한 오웰은, 찬란한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노동 계층의 피와 땀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 계급을 더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본질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사회의 시선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어, 다른 계층을 이해하고 그들과 가까워지는 사회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2부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사회주의가 지닌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올바른 사상의 확산을 위해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먼저, 당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이념과 위배되는 깊은 계층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합니다.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을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속물근성과 계층의식에 사로잡혀 낮은 계층을 무시하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즉,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이들은 사회주의가 타파해야 하는 계급 차별을 도리어 옹호하고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사회주의를 사회의 올바른 지향점으로 여기기보다는, 기성세대에 반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영국 사회에서는 젊은이를 전쟁에 내몬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격화됩니다. 그들에 대한 반발이 사회적 물결이 되어가는 분위기 속에 사회주의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사상을 보여주는 증표가 됩니다. 젊은 층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동 계층을 사람으로 인식하지도 않았으면서 본인을 기꺼이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탓에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계층 의식을 버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개인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방향으로만 사회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세 번째,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가 별난 것으로 인식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대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기보다는 과격한 사회 운동에 집중했습니다. 기계적 진보를 이루면 지상 낙원이 만들어질 것이라 지나치게 낙관하였고, 인간을 경제적 동기에만 움직이는 일차적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과격함과 지나친 물질주의의 추구는 도리어 파시즘에게 기독교와 애국주의적 가치를 부여하는 계기로 작동하였습니다. 때문에 파시즘이 전통과 국가, 민족을 수호하는 정의로 여겨지게 되면서 오히려 파시즘을 강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웰은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회주의가 과격한 혁명, 지나친 물질주의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평등, 정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상식적인 이념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피착취 계층에 대한 이해와 평등의 자세를 드러내고, 혁명이 아닌 사회 시스템과의 조화를 추구할 때 대부분의 구성원을 사회주의의 편으로 만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오웰이 제시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올바른 방향성입니다.
1.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는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속물근성)
오웰이 지적한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결국 그것은 이념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이들에 의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길에서 계급 격차와 제국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고, 개인을 파괴하는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을 행하는 사회주의자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찬반을 논하기 이전에, 사회 이념과 그 이념의 추종자 간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문제 상황의 핵심 원인은 개별 인간이 지니는 이기심과 속물근성입니다. 사상 자체가 아무리 훌륭한 가치와 목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고, 결국 그것이 인간에 의해 사회 속에 실현되어야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상을 추구하는 인간이 사상 이전에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보다는 자신의 계층이 더 많은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자신의 지위가 강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존재합니다. 또한, 사회사상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특성 속에서 사회사상은 개별 추종자의 이기심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기 쉽습니다.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적 허영심과 반항심, 물질적 이기심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던 것이지,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구성원 차원에서 사상의 목적이 변질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민주적 가치 역시 온전히 실행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특정 이익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으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높은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사실 각자의 이익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국민의 뜻을 대변하고자 추진된 대의 민주주의 체제 역시 결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사회 시스템과 목적이 특정 이익 집단을 위해서 작동하게 된다는 비극적 결말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사상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와 동시에 행위자 측면에서 나타나는 이익 추구 행위를 반드시 제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속물근성은 인간 본연의 성질이라는 점에서, 사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회의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2. 하층 계급에게 느끼는 '자연스러운 혐오감'은 정말 해결 불가능한가?
오웰은 삶 속에서 피지배자의 역할과 지배자의 역할을 모두 경험했고, 권력-지배 관계의 비이성을 깨달으며 피지배 계급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특한 성장 환경과 개인적 관심사, 직접 하층민의 삶에 뛰어드는 결단력이 합쳐지며, 오웰은 당대 사회인이 갖기 어려운 계층 평등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웰 스스로도 지적하듯, 계층 평등적인 시선은 오웰과 같은 특정 환경에 놓인 이들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의 대부분은 다른 계층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나아가 같은 사람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심각한 계층 차별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 프롤레타리아를 지지하고,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려는 사회주의 정신의 추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목표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웰조차도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노동자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직접 광산으로 자처해 들어가 그들의 고생을 경험한 뒤에야 노동 계층에 대한 거부감을 떨쳐내었다는 점은 꽤 의미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노력과 고생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다른 계층을 이해하고 자연스러운 혐오감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웰의 자신의 작품에서 꾸준히 하층 계급의 삶을 조명하고, 이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사회적 의의를 강조하며,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는 이유는 영국 사회에 팽배했던 타 계층에 대한 몰이해를 타파하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가 글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의 작품관('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면서, 우리가 오웰의 작품에 더 주목해야 하는 중요성을 밝혀줍니다. 비록 그가 목적으로 했던 계층 간 혐오감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에 뛰어들어 타인을 계몽하고자 했던 작가 오웰의 모습만은 남았습니다.
3. 사회주의는 당대 유럽 사회의 정답이 될 수 있었을까?
오웰의 사상을 살펴보고 나면, 정말 그의 바람대로 민주적 사회주의가 올바른 사회정의의 정답이 될 수 있었을지, 이후 나타날 파시즘의 광풍을 막아낼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본래 사회주의란, "인간 개개인의 의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시 여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사회 속에서의 인간을 강조하고, 사회의 안정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나, 권력관계의 비합리성을 밝히고, 국가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하층 계급에 관심을 가진 오웰은 사회주의를 있는 그대로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추구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정통 사회주의가 지닌 지나친 중앙 집권화에 반대하고, 민주적 절차(의회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자유 경영을 인정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흐름입니다. 쉽게, 경제 체제는 사회주의를 추구하지만,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상이며, 본래 사회주의가 지닌 과격함을 배격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파시즘의 유일한 대항마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웰이 추구한 사회정의란 '모든 계층에게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치도 역사도 전문가가 아닌 제가 사회적 민주주의가 정답인지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려는 바가 맞는지, 당시 영국과 유럽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1, 2차 세계 대전과 이념의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구성원에 대한 박탈'을 지적한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광풍 속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목소리와 권리를 대변하고,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웰이 '정답'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새로운 선택지'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