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5편
한겨레출판에서 집필한 이 책 <조지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영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한 1931년부터 작가 생활의 말년이었던 1948년까지 집필한 여러 편의 에세이 중 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표작 29개를 엮은 에세이집입니다. 연도순으로 나열된 여러 에세이를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조지 오웰의 삶과 철학, 문학관과 작가관, 그가 시대에 가졌던 문제의식 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작가 소개 글에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조지 오웰의 글과 철학은 ‘압제적인 정치 권력과 억압받는 피지배자’, ‘격정적인 시대 속에서의 작가와 문학의 역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지신의 글에 분명한 정치적 의식을 담고자 했으며, 사회에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번 에세이 작품에서 살펴볼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지배층이 권력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전략 (2) 사회 하층민, 피지배 계층의 우울한 생활상에 대한 이해
(3)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과 노동자 혁명의 한계 (4)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역할
(5)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과 책임
이번 연재글에서는 책에 담긴 29편의 에세이를 전부 다루고자 합니다. 각 작품의 핵심 문장과 메시지를 전달하며, 독자분들이 조지 오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자 합니다. 각 10편의 에세이씩 총 3편의 글을 연재할 생각이며, 독후감 1편에서 다룰 작품은 1931년 작 ‘스파이크’부터 1941년 작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까지입니다.
■ 1. 스파이크(1931) : 영국 사회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 묘사
“그들 사이엔 대화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우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영혼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거창한 주제다.”
책의 제목인 ‘스파이크(spike)’는 노숙자 구빈원에 딸린 임시 부랑자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입니다. 작가 조지 오웰은 버마에서 5년 간의 경찰 생활(1922-1927)을 하며 사회 하층계급의 비참한 생활에 주목하게 되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실제 부랑자의 삶을 경험하며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가 실제로 런던의 부랑자 숙소인 스파이크에 들어가 보고 들었던 바를 진솔하게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그가 보았던 스파이크의 실상은 희망이라곤 전혀 없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오웰의 말마따나, 노숙자들은 당장 하루의 끼니를 때우는 것이 매일 주어지는 숙제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당장의 끼니와 따뜻한 공간이 그들이 고민하는 전부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진전된 대화는 오직 현실에 대한 불행에 불과할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당시 영국 사회의 하층민은 오직 하루를 어찌어찌 넘기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웰의 시선에서는 스파이크 속 부랑자들은 바라보는 사회와 그들 자신의 시선이 큰 문제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랑자들은 어려서부터 돈벌이에 뛰어들어 어떠한 교육도 받은 적 없는 무학이며,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 스스로는 물론 사회적인 시선에서 볼 때, 그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계급 사람들은 그들이 전부 게으르고 멍청한 쓰레기이기 때문에 동정심조차 줄 필요 없다고 소리칩니다. 그들 스스로의 패배주의와 무능력함에 더해 같은 인간으로조차 보지 않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로서 오웰은 본인이 겪었던 비참한 삶을 풀어내며, 당대 영국 사회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사회적 문제를 밝혀내고자 하였습니다.
■ 2. 교수형(1931) : 피지배자 역시 다를 것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한 버마인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던 강렬한 순간의 깨달음을 간결한 묘사와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미 영국이 세계적인 지배자가 된 이후에 영국인으로 태어난 조지 오웰은 국가 간의 식민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한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피지배국의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과 같은 ‘정상인’과 다른 존재로 막연하게 인식해 온 듯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곧 죽음을 앞둔 한 버마인이 보여준 초연한 모습은 그들 역시 똑같은 생명의 역동성과 신에 대한 숭고한 신앙심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버마인은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초연한 모습으로 자신의 신을 끝없이 외쳤습니다. 그것은 사형이라는 행위 앞에서 감정의 동요를 느꼈던 영국인들보다 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신에 충실하는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글 속의 경찰들은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하고, 엄청난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웃음을 보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은 의미 없이 박장대소하고 술을 마시며 사형장에서의 충격을 잊어보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엄청난 충격과 회의감에 빠진 듯 보입니다.
조지 오웰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억압받는 것이 당연했던 그들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멍청하고 계몽시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인간 어쩌면 더 나은 인간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인지를 전달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그가 식민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지배당하는 하층민 사람들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즉,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은 하층민 역시 자신과 별 다를 것 없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강렬한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3. 코끼리를 쏘다(1936) : '지배하는 행위'의 무의미함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앞서 소개한 작품 <교수형>이 피지배인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이 작품 <코끼리를 쏘다>는 사람 간의 지배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형식적인 것인지에 대한 오웰의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버마의 경찰로 근무하던 당시, 코끼리가 마을을 해 집어 놓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합니다. 비록 버마 사람 한 명이 죽기는 했지만, 사람에 의해 충분히 길들여진 코끼리이고 이미 진정이 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코끼리를 동물원으로 인도하기만 하면 마무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온 2,000여 명의 버마인들이 보내는 시선과 기대에 압도된 오웰은 본래의 판단을 선택하지 못하고, ‘지배자의 행동’을 행할 것이 강제됩니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하고 단호하며 인정사정없이 행동하는 ‘백인 지배자‘처럼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오웰은 지배행위가 가지는 우스움에 대해 깨닫습니다. 피지배층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내하고 정해진 역할을 해내야만 하는 것처럼, 지배층 역시 권위있는 주인의 모습으로만 행동해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이미 영국 제국주의의 행태와 자신의 일에 대해 큰 싫증을 느끼고 있던 오웰은 이 모든 것이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연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그가 맡아온 백인의 동양 지배라는 관계는 부질없고 공허한 행위에 불과해집니다. 심지어 다른 동료들 역시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을 숨긴 채 백인 관리의 모습을 흉내내야 한다는 사실에 큰 회의감을 느끼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제국주의의 논리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그렇기에 정당화될 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오직 강력한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 속에서는 강자의 구성원들 역시 주어진 역할에만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어 버립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위적인 지배 구조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오직 절대 권력의 주장뿐입니다.
■ 4. 서점의 추억(1936) : 책이 인기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소설은 대부분 철저히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것이, 대부분의 장편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하다.”
이 작품은 오웰이 1934년 11월부터 1936년 1월까지 런던의 한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했던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오웰의 지적에 따르면, 당시 영국 사회에서 ’책‘은 이미 대중의 인기에서 한창 멀어졌고, 적당한 선물 용도 외에는 선택을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서점 역시 지식인들의 공간이 아니라, 갈 곳 없는 부랑자들과 정신 이상자들이 오랫동안 서성일 수 있는 피난처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즉, 오웰이 일하던 당시 책과 서점은 분명히 본래 주어진 사회적 계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웰의 문학관과 작가관(“글과 문학은 정치적 메시지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영국 사회와 영국 작가들에 대한 큰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웰은 책과 문학의 인기가 사라진 이유를 독자나 사회가 아니라, 작가층의 잘못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는 당시의 글은 철저히 무기력하고 무가치하며, 사회적 깨달음이나 충격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오웰은 다양한 에세이와 작품을 통해 ’이러한 세상 속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피해 글을 쓸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해왔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글이 더 이상 무기력한 내용만을 반복한 채 갈 곳을 잃어버리는 것에 작가로서 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를 지적하기 위해 본 에세이가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학이 다시 살아남기 위해선 본래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 5.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1937) : 스페인 내전에서 바라본 노동자 혁명의 한계
“지금은 혁명에 대한 미사여구나 늘여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게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입 다물기를 거부하면 나중에는 어조를 바꾸어 그를 배신자라 부르기 시작한다.”
영국인 조지 오웰은 기삿거리라도 얻어보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 방문하고, 오웰의 사상과 정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계급 사회를 무너뜨리고, 만인의 평등을 이뤄낸 듯 보이는 카탈루냐의 노동자 도시에 방문하였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혁명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버마에서의 경험을 통해 권력 구조의 불합리함과 무서움을 체감하였던 그였기에, 스페인 노동자들이 진행하던 ’노동자 혁명‘은 새로운 가능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조지 오웰을 민병대로서 직접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웰은 이제 본격적으로 전선에 뛰어들며 전쟁의 양상과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 마주한 내전의 참상은 오웰이 생각하던 것과 확연히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반란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인민 전선(주정부, 공산주의자, 노동자 등)의 대립처럼 그려졌던 내전은 사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과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의 대립이었습니다.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의 독재를 막는 것보다 노동자의 반란을 막는 것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소련 공산주의의 이익 추구 행위를 위해 아이러니하게 노동자 혁명을 막아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기존의 권력을 무너뜨리려는 집단이었기에 어느 집단의 환영도 받지 못한 채 핍박받고 끝내 좌절하고 맙니다.
이때 대외적인 명목으로 중요하게 사용된 논리가 대표 문장으로 쓰인 것과 같은 ’지금은 우선 거대한 적인 파시즘에 맞서 싸워야 할 때‘라는 주장입니다. 이미 권력을 가지고 통제하고 있는 자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가 마치 정답인 것처럼 꾸며냅니다. 그들은 프랑코의 횡포를 무섭게 과장하면서 지금 프랑코를 막지 않는 자들은 모두 배신자이며 파시스트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이러한 이유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게 억압받고 그들의 혁명은 끝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미 권력의 중심에 한창 멀어져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어떠한 주장 행위도 하지 못했고, 권력 유지를 위한 의도적인 선전 행위에 당하고 맙니다. 결국 이러한 실패 경험은 조지 오웰에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내는지, 약자의 반란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큰 계기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대표작인 <1984> 속 빅브라더 사회와 반란에 실패하는 나약한 주인공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 6.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1938) : 오웰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유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특권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주까리기름이나 고무 곤봉이나 강제수용소에 맞서 싸우는 것과 매한가지 일이다.”
오웰이 작가로서 집필 활동을 진행하던 1930~40년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파시즘이 전 유럽에 기세를 떨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갈등과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권력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였고, 이것은 자연스레 개인의 표현과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오웰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이러한 파시즘 사회가 도래하여, 그가 작가로서 추구하는 가치, 즉 사회의 문제를 밝히고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학의 가치가 파괴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독립노동당에 가입하였고 사회주의를 분명히 지지하고 있다는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더 이상 정치에 거리를 두는 ’순수한 문학‘은 불가능함을 지적합니다.
결국 파시즘이 국가를 지배한다면, 국가의 모든 시스템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이용될 것이며 작가와 문학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특정 정당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써만 사용될 것이기에 파시즘의 지배는 곧 문학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오웰은 더 이상 작가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며, 단순히 책을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제는 ’순수한 문학‘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어 사회를 지킬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자신의 글에 정치적 의미를 담으려고 했던 이유와 삶에서 적극적인 정당 활동을 이어간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이 선전 메시지가 아닌 본래의 가치와 의미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 7. 마라케시(1939) : 아무도 보지 못했던 노예의 몸뚱아리
“내가 우연히 행렬을 뒤따라가다가 묘하게 들썩거리는 장작더미에 시선이 끌려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가련한 흙빛의 육신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반으로 접혀버린, 뼈와 가죽만 남다시피 오그라든 육신들 말이다.”
폐결핵에 걸린 조지 오웰은 따뜻한 기후에서 건강을 되찾고자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휴양을 떠났습니다. 휴양의 목적에 맞게 마라케시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레 그곳의 볼품없는 노동자의 모습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의 말마따나, ’이상하게 사람만 빼고 모든 게 눈에 잘 들어오는‘ 열대의 풍경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노동자의 모습과 삶에 주목하며, 오웰 스스로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인식의 충격을 표현하는 에세이입니다. 그 역시도 이 노동자를 의도적으로 주목했다기보다는 단지 움직이는 장작의 행렬을 바라보다 무심코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보았다고 서술합니다. 버마에서의 생활 경험과 권력 관계에 관심이 있던 그마저도 백인 지배층의 시선에서 피지배인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당나귀의 고통에는 안타까워 하지만, 오히려 장작더미 밑에 있는 가련한 노파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합니다. 섬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향유하면서도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무시라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지배자의 관점에서 가난한 피지배자들은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없고, 어떠한 의미도 없는 그들에게 주목하는 일 역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노파 역시 자신이 관찰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마라케시에서의 충격은 오웰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였던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그것을 벗겨 내었을 때의 부자연스러움을 일깨워주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에세이의 말미에서 오웰은 이러한 비극적 상황이 ’백인은 주인이며, 흑인은 노예‘라는 강한 믿음이 모두에게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이고 잘못된 믿음이기에 언제든 깨어질 수 있으며, 언제쯤 저들이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것인지를 질문하며 이러한 관계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 8. 좌든 우든 나의 조국(1940) : 좌파주의 신념 이전에 애국주의를 강조한 오웰의 철학
“내가 전쟁을 지지하는 이유를 스스로 옹호해야만 한다면,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히틀러에게 저항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의 선택에선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오웰이 영국에 대한 애국심과 좌파로서 추구하는 이념 사이의 화해를 의도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본인을 분명한 좌파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에 대한 강력한 애국심을 강조합니다. 이 글은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애국주의가 얼마나 중요하고 강력한 힘인지 설명하며,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강한 규율이 지배하는 엘리트 기숙학교에서 성장하며, 전쟁 행위에 대한 회의감과 허무함을 느껴왔습니다. 우리의 인식과 달리 전쟁은 그토록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었고, 무의미한 학살을 자행하는 기성 세대의 이기적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성장기의 오웰은 전쟁과 기성 세대에 대한 반발심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정부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화마가 전유럽을 뒤덮은 1930~40년대의 오웰은 애국주의를 지지하고 인정하는 입장으로 변화합니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광적인 파시즘에 굴복한다면 그 어떤 것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그들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애국심은 국민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거대한 적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힘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웰은 ’너무 계몽되어서 가장 일상적인 정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좌파 지식인‘보다는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더 바람직하다고 서술하며, 그의 이념·정치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파시즘에 대항하는 국가의 생존에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9. 영국, 당신의 영국(1940) : 영국 지배계급이 선택한 '의도적 무지함'에 대한 비판
“그들의 탈출구는 딱 하나뿐이었으니 바로 어리석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사회를 기존의 양상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눈을 과거에 고정시키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심을 갖지 않은 덕분이었다.”
<좌든 우든 나의 조국>과 같은 해에 쓰인 이 에세이 역시 파시즘으로부터 영국을 지키기 위한 오웰의 고민을 담고 있으며, 적이 누구인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의도적인 무지함을 통해 권력 유지에만 집중하는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납니다. 글의 초반부에는 다시 한번 애국주의의 힘을 긍정하며,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를 떠나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즉, 아무리 민족이나 국가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며 획득한 국민성과 삶의 방식은 분명하며, 한 개인은 그것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이러한 오웰의 인식은 지구의 인류는 결코 같지 않으며, 각 국가별로 독특한 행동 방식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오웰은 영국의 문화와 지배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전개합니다. 저는 그가 지적하는 영국 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무지와 시대착오적 인식’으로 대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인들은 입헌정치와 적법성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으로 법을 그 자체로 무결하며 불변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법이 사회적 계층을 나누고, 분명한 사회적 차별로 작동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법에 대한 존중 의식을 무엇보다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영국이 처해있는 국제적 위기와 다양한 사회적 문제, 변화의 필요성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정의’나 ‘객관적 진실’ 등의 허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의와 위배되는 위선이 넘쳐나, 강력한 애국주의와 섬나라 근성, 외국인 혐오증이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 나타납니다. 또한, 강력한 계급 착취로 인해 특정 권력층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오웰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은 영국의 지배계급이 선택한 ‘의도적인 무지함’입니다. 격동하는 세상 속에서 기존의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유용성이 이미 다했으며, 자신들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등 자신들의 가장 큰 위협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이들이 지적하는 영국 사회의 문제점을 의도적으로 덮어 버림으로써 영국 사회 특유의 시대착오적 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 영국 사회는 1930년 경부터 이미 무너져있었고,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의 우매함에 대해 불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섬나라 특유의 폐쇄성과 의도된 무지함, 왜곡된 애국주의로 인해 기존 체제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하였습니다. 오웰은 2차 대전과 같은 거대한 사건이 기존 계급 특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일깨우는 큰 계기이며, 이로써 기존의 사회가 없어질 것을 희망하며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 10.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1941) :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영국 지식인에 대한 비판
“그는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민족주의와 편협한 신앙과 봉건적 충성이 그가 온건하다고 말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웰스는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온건하다.”
이 에세이는 구시대적 인식에 갇힌 영국 지식인층의 무지함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글입니다. 이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전 유럽에 손을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대륙 유럽 국가들은 국가 수호를 위해 분투하고 있었으나, 유독 영국에서만큼은 파시즘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떨어졌습니다. 지적의 대상이 되는 웰스는 히틀러와 광적인 전쟁 분위기를 막는 방법으로 인권 선언과 세계국가에 대한 이상론만을 펼치며, 그들이 가진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비롯한 영국의 ‘지식인’들은 민족적 자존심이나 숭배와 신앙심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무시해버렸고, 이성과 합리성으로 세상이 돌아갈 것이라 믿은 듯 보입니다. 이들에게 히틀러는 정신이상자이며, 광적인 감정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였기에 곧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웰이 지적하듯 영국 지식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강렬함을 이해하기에 너무 온건한 것이었고, 그들의 믿음과 달리 과학은 광적인 숭배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상식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세계국가가 보잘것없는 미치광이에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감정과 격렬함은 말뿐인 이상론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입니다. 여전히 영국의 지식인들은 전쟁터와 먼 곳에 서서 전쟁의 참상을 무시하고, 실제 세상을 그저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구체적인 변화를 무시할 뿐입니다. 오웰은 웰스와 같이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영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이제는 정말로 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