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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전북스 Apr 23. 2023

『변신』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프란츠 카프카> 1편

<변신>은 무시무시한 꿈이자 공포스러운 상징이다. 꿈은 현실의 가면을 벗긴 것이고, 현실의 이면에 남은 것이 상징이다.
 -프란츠 카프카-


[ 전체 줄거리 ]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뒤, 자신의 몸이 끔찍한 벌레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어떠한 이유도 없이 닥친 이 비극을 차분히 이해해 보고자 하지만, 현실은 잠자를 놔두지 않습니다. 그는 외판원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그가 출근하지 않자 가족 모두가 방문을 두드리며 어서 방에서 나오라고 재촉합니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고, 지배인까지 집에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자, 잠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지배인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잘리지 않기 위해, 그래서 가족의 생계를 꾸준히 책임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나갑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나오는 거대한 벌레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부인들은 그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고, 가족들은 기겁하며 그를 방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설득해 보려 소리치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잠자와 그의 가족에게는 두 가지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첫째는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잠자와 살아가야 한다는 것, 둘째는 잠자 없이 남은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사이가 좋았던 여동생 그레테는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그를 이해하고자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벌레와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생계와 삶의 여러 문제를 겪으며, 점점 더 그와 멀어질 뿐입니다. 


어느 날, 그레고르를 본 어머니가 기절하는 일이 일어나고, 상황을 오해한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상황이 조금 진전되자, 남은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아무리 징그러운 모습이라도 여전히 그를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많은 일에 지친 이들 가운데 그레고르를 돌봐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삶에 지쳐가던 이들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이 그레고르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를 더욱 냉담하게 대할 뿐입니다. 이제 그레테마저 방청소나 음식 제공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집에 하숙인을 들이게 되고, 그레고르의 방은 안 쓰는 물건을 처박아 놓는 창고로 쓰이게 됩니다. 어느 날 그레테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게 된 잠자는 연주를 더 잘 듣고 싶은 마음에 하숙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에 놀란 하숙인들은 자신들은 당장 집을 떠날 것이고, 방세를 지불할 이유가 없다고 엄포를 늘어놓습니다. 그레고르가 상황을 악화시키자 그에 대한 가족의 감정은 전부 증오로 바뀝니다. 여동생은 흉측한 벌레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하며, 그를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이제 그에게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그를 쫓아내려고 하는 순간, 그를 가족 구성원으로 규정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잠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라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떠한 음식도 먹지 않은 채 자신이 사라지길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날이 밝고, 그는 드디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남은 가족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분을 풀고자 교외 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음을 깨달으며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습니다. 부모는 몇 달간 생기를 잃어버린 딸이 다시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얻습니다.




[ 고전북스의 생각정리 ]


1. 그레고르를 가족으로 규정한 것은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가족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외면받는 모습을 보며, 많은 독자들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무엇인지, 무엇이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하고, 핏줄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가족, 사랑, 효도 등의 키워드는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그러나, 강압스러운 아버지와 다소 딱딱한 가족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카프카에게 가족 관계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가족이라는 것이 정말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인지, 다른 가치를 위해 규정된 관계는 아닌지를 질문합니다.


그레고르가 처음 변했던 순간을 돌아봅시다. 물론, 흉측한 외형은 큰 문제였지만, 여동생 그레테는 물론 남은 가족들 역시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를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그는 가족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가 경제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고, 가족의 생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그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그가 가족의 생계수단마저 망치는 순간이 되자, 남은 가족은 모든 문제를 그레고르에게 돌리고, 그를 쫓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카프카가 지적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는 오직 적절한 이해관계예 따라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결국 상호 간의 이익이 보장될 때 형성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은 핏줄을 나눈 가족 관계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철학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며, 예전에 보았던 '모성애와 효심'에 대한 논쟁이 떠올랐습니다. 가족 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여겨지는 모성애와 효심이 실제 하는 것인지, 만약 그것이 본성이 아니라면 우리가 느끼는 무궁한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저의 답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무언가의 감정이 인간관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된 유전자 때문이지, 이 아이가 나에게 보답해 줄 무언가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사랑과 존경을 느끼고,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어떤 이해관계는 없는 듯 보입니다.


가족의 생계가 위태롭다는 극한의 상황을 통해 그 본질을 파헤치려는 시도는 적어도 저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이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는 그에 맞는 특징적인 생존 방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모든 것의 본질이며 다른 것은 가면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잠자네 가족이 돈이 부유한 집안이었다면, 그레고르가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더라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오직 이해관계만으로 구성되었을 타인과의 관계와 달리, 무언가가 그들을 여전히 가족으로 규정하고 이어주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맺고 있는 가족 관계는 보다 복잡한 듯 보입니다.



2.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


카프카의 작품이 쓰이던 19세기말 ~ 20세기 초는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점차 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인류를 올바른 길로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은 도리어 인간성을 헤치고, 인류사의 여러 비극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지적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인간마저 하나의 부품으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구성원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카프카를 비롯한 여러 실존주의 작가들은 존재의 가치를 훼손하는 당대의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실존의 가치와 이유, 나아가 인간 존재의 시련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자의 삶은 어디까진 경제 활동을 위해서만 작동했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목적만을 가지고,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해왔고, 노동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규정했습니다. 본래도 노동 행위나 직업은 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가치임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오로지 경제적 행위만을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가치를 찾지 못한 채, 단순히 생계유지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경제행위에 쏟는 것. 그것은 카프카가 지적하고자 했던 시대의 문제입니다. 


카프카가 지적하고자 하는 가장 큰 문제의식은 불안정한 정체성으로 인한 실존의 불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을 규정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혼란스럽고, 버거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변신>은 현대인의 불안정하고 빈약한 실존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규정해 온 노동 행위를 빼앗긴 잠자는 이제 스스로를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죽길 바랐던 이유는 가족과의 관계도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독자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과연 당신을 인간으로, 당신으로 규정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노동 행위를 빼면 당신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그 질문에 답하다 보면, 우리의 정체성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불안정한 지 깨닫게 됩니다.



3.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다가온다.


그레고르가 어느 날 벌레로 변해버린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의 이유나 왜 그레고르였는지가 아니라, 단지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비극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사건의 원인이나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독자들이 주인공과 같은 당혹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 느닷없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 그 불안한 감정을 같이 갖도록 만듭니다. 


비극적인 상황은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가치와 정체성을 파괴하고, 정말 스스로의 가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그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상황과 스스로의 상태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단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며, 주어진 비극에 무너지고 맙니다. 극단적 상황은 우리를 잔인한 정도로 파헤치고, 우리의 방패막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상황을 관찰하면서, 본인이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결국 우리 역시 불안정한 실존을 가지고 있고, 나를 온전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는 세상에 던져진 우리를 묘사하는 듯 보입니다. 대표적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우리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떠한 이유나 목적을 갖기 전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 모든 이유와 가치는 우리가 스스로 찾아내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혼란과 어려움으로 이어집니다. 매 순간 이유와 가치를 찾아내야만 하는 우리들은 끝없이 상황 속에 던져지며 정체성의 불안을 겪어야만 합니다.


또 다른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항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과 달리, 세상은 무질서하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카프카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안정한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세상과 삶은 부조리하고, 인간의 이성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안한 자세로 살아야만 합니다. 카프카가 설정하는 비극은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언제나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 끝없이 고통받고 위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숙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소설 속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비극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엄마, 아빠. 내가 자고 일어났는데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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