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1편
한 권의 책에는 황금 같은 문장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독후감을 정리하다 보면, 몇몇 문장들은 언급되지 못한 채 사라지곤 합니다. <독후감>을 통해 줄거리와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다뤄보았다면, <책 속 문장> 시리즈에서는 빛나는 문장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문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의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작품의 줄거리나 주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문장들을 기록하고,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와 저의 생각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뒤, 자신이 끔찍한 벌레 한 마리로 변해 있는 것을 침대 속에서 발견했다. (3p)
소설 <변신>의 유명한 첫 문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소설에서는 변신이 일어나는 배경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현재 상황과 그레고르의 외형을 묘사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소설 전개는 그레고르가 눈을 뜨고 느꼈을 당혹감을 독자가 같은 입장에서 느끼도록 해줍니다. 또한, 독자에게도 변신이라는 사건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아서, 당혹감과 궁금증을 지닌 채 소설을 읽도록 강요합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상황이 그레고르에게 부여한 비극을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급작스러운 비극의 전개는 카프카 소설이 가지는 한 가지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우리 인간의 삶 자체와 맞닿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 이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나오면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삶이 있는 이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목적 등 어느 것 하나 설명되지 않은 채로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부여됩니다. 실존주의자 샤르트르의 표현처럼,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채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실존을 세워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레고르가 갑자기 벌레가 되어, 상황에 적응하는 장면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스스로의 자아와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 "아무 할 일 없이 침대 속에 누워 있지는 말자. 침대 속에서 우물쭈물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지 않은가" (9p) + 설사 침대에서 빠져나갈 희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희생을 무릅쓰며 어쨌든 일어나 보자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적인 결심보다는 냉정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10p)
카프카의 유명작 <변신>이나 <소송> 등의 작품에서는 갑작스러운 비극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인물 유형이 부각됩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몸이 벌레가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분별 있게 행동하고자 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헤쳐나가려는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소설에서 주인공은 세상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아지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지는 실존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또 다른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적극적인 반항을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인간은 그러한 적극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씁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카프카는 세상 속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인간은 언제나 패배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 그러나 그레고르는 바로 앞에 닥칠 일을 염려했다. 그는 지배인을 붙들어 놓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르와 가족의 장래가 바로 이것의 성패에 달려 있지 않은가!(24p)
+ 그러니 생활비를 제대로 벌어들일 만한 사람은 아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0p)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유지라는 임무를 이루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매일매일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작동합니다. 먼저, 그레고르가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동기이자 목표로 작동합니다. 비록 스스로의 주체적 목표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문제 해결의 궁극적 동기로 작용하며 인간의 적극적 행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정체성을 직업과 경제적 요소에 지나치게 결부시키는 현대인의 문제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직업과 돈으로 대표되며, '그레고르'라는 사람을 의미할 다른 정체성 요소는 갖추지 못한 듯 보입니다. 경제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족에게 버림받는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꽤나 진지한 문제제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은 후에 다가올 그의 최후를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내는 문학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가족이 올바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레고르가 벌어오는 수입, 그에 수반되는 희생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요소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아버리는 가족의 태도는 나쁘게 보입니다. 그의 비극을 한층 더 극대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문제 역시 비극적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그는 자기가 부모님과 누이동생을 위해서 이렇게 훌륭한 집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평화와 행복과 만족이 한꺼번에 어떤 놀라움으로 변하여 사라져 버린다면? 왜 이렇게 무서운 상황이 닥쳐오는 걸까? (31p)
실존주의 작가 카뮈에 따르면,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과 세상의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비이성적이고 비목적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에, 평생 고민하는 인간에게 허무한 답을 내려줄 뿐입니다. 그 순간 몰아치는 우울과 혼란 속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한 대답이 카뮈와 카프카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있어, 몰아치는 혼란과 당혹감은 한 인간을 비극적인 최후로 이끕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에게 이러한 비극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왜 자신이 그 대상이 되어야만 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이건 분명히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 아래에서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고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도, 변신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도 타당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민한다고 한들, 결국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발생했다는 것이 이 세상의 응답입니다. 즉, 그레고르의 고민과 성찰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허무한 세상의 법칙을 전달해 줄 뿐입니다.
■ "그레고르에게 가 보겠어요. 누가 뭐라 해도 그 애는 불쌍한 내 아들이에요. 가 봐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말리는 거예요?" (44p)
네 사람이 '가족'이라는 관계로 엮이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을 결합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머니가 외치는 이 문장은 이익관계 이전에 핏줄, 사랑 등의 가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독자나 비평가는 이 소설을 통해 '현대인의 인간관계는 상호 이익으로 구성되며, 그레고르와 같이 이익을 줄 수 없는 경우에는 관계를 잃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흉측한 외형, 무능력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가족 간의 애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고민해 보게 됩니다.
■ 그러나 그레고르가 아무리 징그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가족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식구들은 그를 원수처럼 대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불쾌한 감정이 있더라고 꾹 삼키고 참아야 했다. 아버지 역시 그것이 가족으로서 당연한 의무라 여기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56p)
이 문장 역시 앞서 설명한 문장과 같은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선정하였습니다. 단, 온전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어머니의 외침과 달리, 이번 문장에서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하나의 의무 행위로 보는 시선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가족은 특정한 가치를 지닌 결합 체제로 보입니다. 만약, 우리의 가족이 서로에 대한 의무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가족에게 버림받는 최후도 타당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의무를 지키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그레고르의 의무 역시 존재해야 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면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버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관계, 사랑과 애정의 존재 등에 대해 더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명이 틀린 것인지, 구성원에 따라 부여하는 가치가 다른 것인지를 알면, 현대인의 존재 가치를 더욱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처럼 음악 소리에 감동을 느끼는데도, 내가 벌레란 말인가? (67p)
문장이 가진 의미에 앞서 저의 마음을 가장 울린 문장이라 뽑아 보았습니다. 그레고르는 외형이 벌레로 바뀌었을지언정, 사고는 여전히 사람의 것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그레테의 음악소리에 여전히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끼고, 가족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그의 모습은 독자로서 큰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임을, 이전의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표현인 것 같아 선정하였습니다.
■ "어머니, 아버지! 이젠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저런 괴물을 계속해서 오빠라고 부르지 못하겠다고요. 저런 괴물은 빨리 없애 버려야 해요. 저런 것과 함께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잖아요. 이젠 저걸 없앤다 해도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70p)
결국 그레고르가 모든 가족에게 버림받는 순간을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웠던 여동생 그레테가 외치는 절규 속에서 이제 정말 가족으로서의 어떠한 존재 이유도 남아있지 않음을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저런 것'이라는 표현에서 아들이자 오빠로서 맡았던 그의 인간적 가족 관계가 모두 부정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 매우 큰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가족 형편이 조금 풍족했다면 여전히 살아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부정적 요소가 겹쳐진 상황 속에서 일어난 우연한 일로 인해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맞이하는 말도 안 되는 비극,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만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느끼도록 만듭니다.
■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레테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젊고 싱싱한 육체를 활짝 폈다. 잠자 부부의 눈에는 딸의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다짐해 주는 증거처럼 비쳐졌다. (83p)
소설은 그레고르가 빠진 가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는 문장으로 막을 내립니다. 과연 그에게 주어진 변신은 어떤 의미였을지, 그의 잘못은 무엇이었을지, 남은 가족들에게 그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여러 질문과 찝찝함을 남긴 채 소설은 끝이 납니다. 남은 가족의 희망찬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레고르가 맞이해야 했던 비극을 비추고 있어, 독자들에게 씁쓸한 기분을 전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