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2편
주인공 요제프 K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됩니다. 그를 잡으러 온 사내들은 소송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은 채, 그저 규정에만 따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법치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K는 사건에 대해 계속 질문하지만, 그들은 그런 행동이 사건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며 경고합니다. 물리적 제약은 없지만, 정해진 소송 절차에 따라야 하는 의무가 생겼습니다.
곧이어 첫 번째 심리가 예정되고, K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하지만 재판장의 위치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 때문에 재판의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리가 시작되자, K는 이 소송이 정당한 이유 없이 소송된 터무니없는 소송이며, 모든 결과가 짜여진 것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예심판사와 배심원 일부가 당황하는 듯 보이자, 그는 더욱 강하게 법원과 그 소송에 대해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뀌지 않을 것을 깨닫자, K는 자신에 대한 변호를 포기한 채 재판장을 박차고 나옵니다.
새로운 통지가 오지 않자, K는 직접 법원에 출두합니다. 그는 법원에서 소송에 간절히 매달리는 다른 피고인을 만나고, 자신은 끝까지 당당하겠노라 다짐합니다. 하지만, 외부와는 다른 답답한 공기로 인해 K는 극심한 현기증과 초조함을 느낍니다.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를 조롱하기에 바쁩니다. 결국 그들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빠져나오게 되지만, 이전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초조함과 두려움만이 가득합니다.
어느 날, 그의 삼촌 카를이 그를 찾아와 소송에 대해 묻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K와 달리, 삼촌은 소송이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수 있다며, 자신의 친구 훌트 변호사를 찾아갈 것을 명령합니다. 삼촌과 함께 변호사를 방문한 K는 우연히 소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무국장을 만나지만, 가정부 레니와 시간을 보내느라 그와의 만남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삼촌은 소송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K의 태도를 크게 나무라며, 그가 앞으로의 소송을 망칠 수도 있는 매우 큰 실수를 했다고 비난합니다.
이곳의 재판은 매우 특이해서, 피고에게도 기소장이 공개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작성하는 첫 번째 청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운에 맡겨야 합니다. 또한, 법적인 과정은 베일에 쌓여 있어 피고는 자신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수 없습니다. 피고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처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곳의 시스템은 되도록이면 피고가 모든 고통과 책임을 떠맡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피고가 스스로 변호를 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인맥이 많은 변호사에게 매달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K는 변호사를 해임하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고자 합니다. 티토텔리라는 화가를 알게 된 K는 그에게서 무죄를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다른 대안적 방법을 선택해야 함을 듣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소송에 적당히 얽매인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K는 변호사 해임을 위해 변호사의 사무실에 찾아가고, 블로크라는 상인을 만납니다. 그는 소송 과정에서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작동하고, 소송에 말려든 사람은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수 없는 상태가 됨을 강조합니다. 특히 법원을 상대로 개인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변호사에게 완전히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K는 자신의 뜻을 굽이지 않고, 변호사를 해임하고자 합니다. 변호사는 자신의 도움이 절대적이며, 본인이 없다면 재판을 온전히 끝낼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며칠 뒤 K는 중요한 거래처 사람을 에스코트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그의 요구에 따라 대성당을 구경하기로 합니다. 거세게 치는 비바람과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거래처 사람에 지친 K는 대성당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사제를 만납니다. 사제는 사실 자신이 K를 부른 것이며, 그에게 법원이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합니다.
그는 법률서 서문에 적힌 <법원과 문지기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카프카 단편 '법 앞에서'의 내용)
[ 그 이야기는 법원에 들어가려는 한 남자와 그를 막아서는 문지기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자신을 들여보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지만, 문지기는 절대로 비켜주지 않습니다. 남자는 평생 그곳에서 문을 통과하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죽기 직전에 또 다른 사람은 없었는지 질문하고, 문지기는 오직 그 남자만을 위해 지어진 문이었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문을 닫겠다는 말을 하며 이야기가 끝납니다. ]
사제는 이야기 속 문지기에 주목합니다. 문지기는 자신의 의무에 가장 충실한 인물이자, 법에 대해 누구보다 겁을 먹고 있는 존재라고 해석합니다. 자유로운 존재는 어딘가에 묶인 존재보다 명백히 우위라고 강조하면서도, 문지기는 법에 속하고 법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움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다소 어려운 해석 뒤에 "법원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소. 당신이 오면 받아주는 거고, 당신이 가면 가게 놔두는 거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헤어집니다.
소설은 갑작스레 결론에 도달합니다. K의 생일 전날 밤, 두 신사가 K의 하숙집으로 찾아와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갑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K는 차분히 이성을 지키며 죽음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은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지, 판사는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품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습니다. 그 순간 신사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찔러 죽음을 맞이하고, "개 같다"는 말을 남긴 채 치욕적인 죽 음을 맞이합니다.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K의 소송으로 시작합니다.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영문도 모른 채 시작된 이 소송은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에게 발생한 비극과 유사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불합리한 삶을 의미합니다.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전개는 카프카 문학의 특징이며, 독자들의 시선과 감정을 주인공과 같은 수준에 놓이도록 유도합니다.
갑작스러운 통보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소송의 모든 과정이 감추어져 있어, 심지어 피고조차도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즉, 피고는 그저 주어지는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재판 장소도 설명해주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으로 진행됩니다. K는 모든 것이 안개에 싸여있고, 자신의 죄명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습니다. <변신>의 독후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갑작스럽게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실존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우연적이며 불합리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순간까지 K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법과 법원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처형 판결로 인해 죽게 됩니다. 카프카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때, '소송'이 의미하는 것은 잘못을 벌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삶이 어떠한 중요한 문제 얽히고, 죽는 순간까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법과 법원은 정의로운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이러한 특징이 인간 실존이 가진 문제의식을 더욱 강화합니다. 법원은 비정상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그곳의 사람들은 비합리적이며 성적인 욕구에 휩싸여있는 존재입니다. 공정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고, 이기심과 추악함에 가까운 이들이 K를 심판하고자 하며, K가 주장하는 이성적 판단은 그들에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인 K는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법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무질서와 비합리성으로 작동할 뿐입니다.
소설의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부분은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K와 사제가 논쟁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법 앞에서>라는 작품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골 남자와 그를 저지하는 문지기를 다루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K와 사제는 남자와 문지기 중 속은 쪽은 어디인지 논쟁하고, 사제는 논쟁의 끝에서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어려운 단편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데, 저는 소설의 주제의식에 맞게 세상의 비합리성과 실존을 찾기 위한 인간의 고통의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곳의 법원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희망대로 행동하는 것을 용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특정한 목적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작동하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투쟁하는 시골 남자는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으로 해석됩니다. 남자는 법이라는 것이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세상과 삶이 중요한 목적을 지니고 있고, 우리의 이성과 숙고를 통해 진정한 뜻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골 남자가 죽는 순간까지 문 앞에서 미련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분투합니다. 그러나 남자의 실패와 같이, 인간은 어떠한 뜻도 찾지 못한 채 미련 가득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합니다.
문지기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세상과 인생의 불합리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지기는 스스로도 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맹목적으로 남자를 법 앞에서 막아섭니다. 가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가 죽을 때까지 보내주지 않았고, 그가 죽으면서 문지기의 임무도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따금 삶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듯한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찰나의 희망에도 궁극적으로는 뜻을 깨닫지 못한 채 패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남자를 막아서는 문지기는,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비극적 암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K에게 법원에 대해 알려주려는 사제가 '문지기'의 존재가 큰 의미를 지닌다고 긍정하는 모습은 이러한 주제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는 스스로의 임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의무에 충실하여, 법에 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골 남자와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를 막아서는 삶의 불합리성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왜 끝내 우리가 실패하는 운명이어야 하는지는 문지기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사제의 말은 결국 우리가 한계를 인식하고, 목적의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비극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강렬한 문장입니다. 두 남자가 K를 처형하기 위해 끌고 간 뒤, 갑자기 죽이는 것을 망설입니다. 이때 K는 자신의 손으로 칼을 쥐고 목숨을 끊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 K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고, 세상에 대한 반항 행위를 끝내지 못했다는 억울함에 강렬한 생존 욕구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실존의 불합리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법원과 판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의 생존 욕구는 "논리가 아무리 요지부동이라 해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당하지는 못한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되지만, 오히려 그 순간에 K는 남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극적이게도 그의 생존 욕구가 가장 커진 순간에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K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개 같다"라는 한탄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삶이란 것은 잔인하게도 우리의 희망과 반하여 작동합니다. 더 정확히는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의 법칙을 추구하며 생기는 모순입니다. 그가 표현하는 '치욕적'이라는 말은 결국 세상의 무의미함에 굴복해야 하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운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K는 보통의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자신의 뜻과 논리를 찾고자 했고,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비이성적이고 우연적이며, 개연성 없는 결론을 강요할 뿐입니다. 카프카의 관점에서 우리는 결코 이러한 굴레에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개 같고', 치욕적인 우리의 숙명입니다. 또한,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K를 넘어 모든 인간들이 같은 수모와 굴욕을 겪어야만 한다는 비극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