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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 클라라 Mar 01. 2023

동백 유감

동백꽃 필 무렵 나는...

서향 동백꽃의 향기가 홀 안에 가득하다. 몇년 전 이른 봄에 동백섬에서 만났던 재래종 빨강 동백꽃은 아무 향기가 없었는데 분홍의 이 꽃은 자태도 아름답지만 향기가 대단하다. 겨울 내내 한강 대신 나의 달리기 장소가 되어준 트레드밀 옆에 화분에 심긴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두껍고 반짝거리는 잎 모양으로 동백나무라고 짐작했지만 열심히 꽃눈을 키워내고 있던 이 아이들을 무심히 지나쳤었다.

     

2월 초가 되니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는 게 눈에 띄었다. ‘봄의 전령사답게 재빠르게 꽃준비를 하는구나’ 잠시 쳐다보고 지나갔다. 며칠 뒤 문을 열고 홀로 들어서는 순간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향기가 그 공간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내 코가 감지했다. 두 송이의 동백꽃이 '분홍 분홍~' 하며 활짝 피어있는 것을 내 눈이 목격한 건 그다음이었다. 올해 개화된 첫 꽃과 맞닥 뜨리며 새 봄과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동백의 위상이 달라졌다. 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동백꽃 향기가 달려든다. 큰 호흡을 하며 그 향기를 온몸으로 느껴본다. 운동화의 끈을 묶고는 화분 가까이로 다가선다. 선명한 노란 꽃술을 아기의 연분홍 입술 같은 꽃잎들이 안고 있다. 그 화려한 자태를 한참 감상한 후 코를 가까이 대고 최대한 벌름거리며 향내를 맡아본다. 코로 들어와서 머리로 퍼졌던 그 독한 향기는 몸 전체로 번져가며 ‘어서 행복을 느껴봐~’하며 내 마음을 채근한다.   

   

이젠 모든 꽃봉오리들이 먼저 꽃을 터트리겠다고 다투고 있다. 길지 않을 개화의 시간이 안타까워서 ‘제발 한 두 송이씩 차례로 열어주면 안 되겠니?’ 라며 부탁해 보지만 동백의 사정은 다른가보다.

       

어느 날 사달이 났다. 탐스러운 꽃송이 하나가 뚝~ 잘려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 같이 흠도 티도 금도 없이 완벽히 아름다운 꽃송이 자체였다. 내가 아는 모든 꽃들은 전성기를 지나 꽃잎을 떨궈야 할 때는 쇠퇴해지는 단계를 거치고 한 잎 한 잎 떨어져 나간다. 그런 과정이 없었기에 이 동백 꽃송이에게 몹쓸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거친 입놀림으로 많은 사고를 저질렀던 내 강아지 ‘밍키’가 강력한 용의자다. 영문을 몰라하는 녀석을 야단치고 접시에 물을 따라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옮겼다.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거치는 게 꽃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매일 1~2개씩의 꽃송이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바닥에 떨구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매일 현관문을 열면 바닥부터 살피게 되었다. 그 어여쁜 송이들이 떨어져서 처연하게 분홍으로 빛나고 있는 걸 목격하면 내 가슴이 철렁했다. 사고도 밍키의 망동도 아니었다. 꽃송이가 봉오리 채 수술과 함께 나무의 본체로부터 일순간에 분리되는 건 동백의 숙명이었다. 시인들이 동백을 노래한 것을 보고 동백의 숙명을 알았다.      

  

  그렇게 뚝 뚝

  붉은 울음으로 한숨으로

  함부로 고개 꺾는 통곡인 줄 알았으나..

  골똘했던 스스로를 기꺼이 참수하여

  한 생애 온전히 투신하는 것이다

   - 김은숙 [동백 낙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 박남준 [동백]

    

김훈 작가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산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아무리 길게 자세히 설명해도 부족했던 내 심정을 김훈 작가는 단 세 줄로 표현해 낸다.


나는 동백처럼 살다가 동백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은밀히 조용하게 겨울 내내 꽃눈을 키우는 동백처럼 나도 드러나진 않지만 치밀한 나날로 나를 성장시키고 내 생애 대부분을 채우고 싶다. 내 인생의 절정기에는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어우러지지 않고 피어나고 싶다.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할 때는 ‘주접스러운 꼴’ 보이지 않고 ‘문득 추락해버리고 싶다, 눈물처럼 후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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