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면 한동안 진절머리가 났었다. 작은 아이가 초등생일 때 캐나다에 거주하며 둘이서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랜드캐년과 라스베이거스, 엘에이,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미국서부 일주와 록키산맥 여행 등을 구굴 지도 하나만 믿고 렌터카를 운전해서 다녔다. 막 쉰이 된 여자와 11살 여자가 둘이서 그런 무모한 짓을 벌렸으니 그 여행 동안에 벌어진 일만 엮어도 책 몇 권은 족히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의 목표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기!’였다.
밴프에서 재스퍼까지 연결되는 Icefields parkway를 통과하며 록키산맥을 운전해갈 때는 정면 유리를 통해 어마어마한 기세로 깎아내려진 기암괴석들이 차례대로 씬을 바꾸어가며 등장하는데, 나는 압도당하다 못해 다음 장면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현실이 공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행이 끝난 후 집에서 보이는 동그스름한 동네 뒷산이 어찌나 정답고 포근하던지 높은 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엘에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주위는 온통 사막이었다. 로드킬 당한 짐승들의 사체를 뜯어먹는 독수리들, 꽃을 피운 선인장들 등 나름 사막의 정취를 감상하며 달리고 있었는데 엘에이로 가는 출구를 향해 속도를 줄이는 순간 차의 시동이 꺼져버리고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어스름해질 무렵에 인적 드문 사막 끝에 남겨진 딸과 나는 천신만고 끝에 다음 날 아침쯤에야 예약해 두었던 엘에이의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겪었던 그 이야기는 한 편의 공포영화가 되어서 지금도 가끔씩 꿈에 상영된다.
그런 일들을 겪고 귀국한 나는 한참 동안 한국의 안전한 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토록 무모하고 패기 넘치고 위험천만한 여행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내야 했다. 예순이 되니 한국의 바다와 산이 눈에 들어온다. 순례자가 되어서 대한민국의 모든 길 위를 걷고 뛰어보고 싶다.
12위 [진정하세요!]
젊을 때는 ‘진정하다’를 ‘비겁하다’와 동의어로 인식했던 것 같다. 불의를 보면 바로 응징을 하고, 아이들의 잘못은 그때 그때 호통을 쳐서라도 잡아주고, 화가 나면 누르기보다는 그때 그때 폭발시켜 주위사람들에게 ‘나 이렇게 화가 나있어’라고 알려주는 게 옳은 거라고 믿고 살았다. 내 눈에만 불의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사정이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있었던 거고,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나의 호통이 아닌 위로였었고, 나의 화를 받은 사람이 입은 상처는 오래간다는 걸 내가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이라고 일상이 평화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난 먼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침묵 속에 잠시 내 마음을 맡긴다. 격정의 분노의 순간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그 높은 파고만 내려오면 ‘진정’의 상태가 되고 내게 닥친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남들의 사정이 이해된다. 좀 더 젊었을 때 ‘진정하자’ 주문을 외웠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나이 들면서 얻는 특권일지도 모르니.
15위 [티브이를 적게 봐!]
아이들에게 게임중독이 문제라면 어른들에게는 티브이 중독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이 게임에 집중할 때 어른들이 걱정스러워하는 모든 이유가 티브이를 볼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시간 빠져들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고 외부와 단절되며 운동부족으로 인해 비만이나 체력 저하 등의 문제가 생기고, 본인의 판단이나 사고는 배제된 체 일방적이고 왜곡된 정보가 끊임없이 주입되고...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고단한 일과를 끝낸 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보는 한 편의 드라마가 없다면 매일매일 느끼는 소소한 낙과 위로를 다른 곳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똑똑한 WHO 가 티브이를 보지 마! 가 아닌 티브이를 적게 봐!라고 권유한 이유도 티브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런 심정을 헤아려서인가보다.
16위 [차 마셔요!]
차 대신 커피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침에 눈떠서 첫 잔을 내려 마신 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찾게 되는 커피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매스컴에서 커피의 긍정적인 효능을 자주 말한다. 치매 예방, 당뇨, 혈관 건강 개선, 다이어트, 심부전 예방, 암 예방에 효과가 있고 심지어는 더 오래 살게도 해준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커피를 마시진 않는다.
‘우리 커피 한잔 할까?’ 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너와 잠깐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 너와 추억을 공유하고 싶어, 너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어 또는 너에게 위로받고 싶어... 힘든 일이 닥치면 아이들은 엄마 품을 찾지만 어른들은 커피를 찾는다. 커피의 쌉쌀한 향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드럽게 또는 독하게 퍼지는 맛은 마음을 절제시킨다. 아무리 차를 권해도 차는 이런 커피의 역할을 대신할 수가 없다.
19위 [뜨거운 물을 마셔라!]
아침 공복에 냉수 한잔이 좋다는 설에 따라 몇 년 간을 찬물을 마셨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아침 냉수가 몸에 독이 된다는 말이 진리처럼 퍼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냉수에서 온수로 바꾸었지만 다년간 냉수를 마셔온 내 몸은 안녕한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딴 소리 안 하겠지.
20위 [웃음!]
대부분의 노인들은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있다. 나이 먹고 있는 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얼굴살 전체가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입은 꼭 다물고 있으니 심술꾸러기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일단은 입을 벌려야 한다. 입꼬리가 올라가도록 활짝 벌리는 게 처진 얼굴 살 올리기에 좋다. 그러면서 반달눈을 만들어 주면 웃는 얼굴이 된다. 거기에 깔깔 거리는 소리만 보태면 진짜 웃음이 된다. 웃을 일이 있어야만 웃는다면 하루 종일 웃지 않게 된다. 가짜 웃음이라도 만들어서 웃고 있으면 진짜 웃을 일이 생긴다.
2023년인 올해에 나는 예순이 되었다. 스무 가지의 장수비결을 공부하고 달리기를 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노인이 될 준비를 나름대로 착실하게 하고 있다. 노인 준비만 할 뿐 노인 행세는 아주 늦게까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