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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 클라라 Jun 26. 2023

비둘기도 엄마가 있다

엄마가 있으면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하느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보살필 수가 없어서 엄마를 보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인간을 신과 동격으로 만들어서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이들 키우면서 내가 사로잡혔던 주된 감정은 ‘불안, 죄책감’이었다. 내가 제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걸까? 왜 나는 모성애가 이렇게 부족할까? 나 때문에 아이들이 불행하구나, 내가 아이들에게 평생 안고 갈 트라우마를 주었구나...라는 감정이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엄마로서 나는 많이 부족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선한 존재이고 절대적인 안식처이고 완벽한 해결사라는데 나는 택도 없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딸들이 나를 원망하거나 사회가 형편없는 엄마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나는 억울했다.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인 내게 왜 그런 엄청난 엄마의 프레임을 씌우는 건지, 딸들의 모든 처음을 같이 했고 엄마자리에서 한 순간도 도망친 기억은 없는데 왜 나는 늘 아이들에게 죄인인지를 누구에게든 따져 묻고 싶었다.

    

집 마당에 때죽나무가 한그루 있다. 둥그렇게 넓게 펼쳐지는 수형으로 4월이 되면 종모양의 귀여운 꽃들이 나무 잎 사이에서 땅을 보며 옹기종기 핀다. 꽃을 감상하려고 등을 굽혀 머리를 나무 밑으로 집어놓고 올려보다가 새집 하나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개의 작은 알이 살포시 놓여있었고, 어미로 짐작되는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알들을 품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암수 두 마리가 번갈아가며 알을 품는다고 하는데 그 둥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녀뿐이었다. 매일 아침 나무 사이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삐집어넣고 올려다보면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었다.

       

3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녀의 볼록한 배 밑으로 연노란색 작은 머리하나가 삐죽이 보인다. 옅은 회색피부에 벌거숭이인 새끼는 볼품이 없고 숨쉬기도 힘겨워 보인다.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 한 개와 함께 어미는 새끼를 여전히 품에 두고 있다. 수컷이 아내와 새끼를 위해서 먹이를 날라다 주는 낌새는 전혀 없다. 도대체 어미와 새끼는 어떻게 연명하고 있는 걸까? 꼼짝도 않고 한 자세로 저렇게 오래 앉아있을 게 가능한 건가? 돌연 어미 비둘기의 모성애에 대한 경애감과 질투심이 함께 느껴진다. 

    

다시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어미는 어디 가고 없고 새끼 비둘기 혼자 둥지 속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아직 체 자라지 못한 새끼와 부화되지 않은 알을 남겨두고 어미가 가버렸다고? 다음 날 아침에 가보니 어미가 옆에 있다. 오후에 보니 또 새끼가 혼자 있다. 1주일 정도를 어미는 왔다 갔다 한다. 혼자 있는 새끼를 몰래 바라보는데 작은 인적에 놀라 후다닥 날갯짓을 하며 둥지를 떠나버린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어느새 윤기 나는 짙은 회색털을 갖춘 늠름한 어른의 모습이 되어 날고 있다. 그렇게 날아간 새끼도 어미도 다시는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 자란 새끼 비둘기는 여전히 우리 집 마당 주위를 날아다닌다. 흔하디 흔한 보잘것없는 비둘기가 아니다. 어미 곁에서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완벽하게 마친 새끼 비둘기는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한낱 미물이 아닌 우주의 당당한 주인공이다.

      

친정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던 당시에 들려주었던 이야기도 기억난다. 한 아이가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는지 용모가 불량한 데다 말썽꾸러기였다. 반 친구들에게 무시당했고 친정엄마도 은연중에 그 아이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퇴근길에 횡단보도 앞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를 보았다. 초라한 행색의 그들이었지만 그 잡은 손이 단단했고,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귀한 보석을 보는 것 같이 경건했고 아이의 얼굴은 반짝였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니 모자는 잡은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저 아이에게도 엄마가 있었지.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엄마에게는 보석이었구나, 너무나도 귀한 존재였구나,’라고 친정엄마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친정엄마의 시선이 바뀐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후로 선생님을 그만둘 때까지 친정엄마는  기억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고, 또는 있었고, 그래서 누구나  귀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이 뭐냐가 묻는다면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식 키우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거기엔 어떤 거짓의 흔적은 없다. 하느님은 내게 엄마가 될 자질은 충분히 주셨다. 아이를 낳자마자 젖이 흐르게 하시고, 아기의 작은 기척과 표정 하나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행복호르몬도 주셨고, 자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어미본능도 주셨다. 그러나 아이에게 매일 친절하게 대하는 것, 고단한 하루를 잘 견디어 내는 것, 욕심과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 등 성숙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나는 엄마가 되었다. 미성숙한 인격을 가진 나는 자식들에게 미성숙한 사랑을 줄 수밖에 없었고, 딸들은 그런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상처는 이미 받고 말았다. 미성숙하나마 사랑했던 기억만을 간직하면 좋겠는데 그들에겐 아픈 기억이 더 크게 남아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건 내게도 너무 아픈 일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랫말이 있지만 자식은 사랑이 아프다고 외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음 생에는 부모 자식으로 만나지 말자. 사랑이 아프면 지나쳐버릴 수 있는 연인으로 태어나자.’라고 나는 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딸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목격하는 순간이 있다. 스무 살이, 서른 살이 넘은 딸들이 내 품을 파고들며 편안한 숨을 쉬는 날들이 있다. 그때 나는 잠시 죄의식을 내려놓는다. ‘엄마가 있어서 딸들이 힘이 나는구나, 엄마를 기억하는 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귀한 존재라는 걸 잊지 않겠구나’라고 안심을 한다. 비둘기도 엄마가 있어서 저토록 당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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