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풀생각 Sep 23. 2023

낙엽은 쓸쓸함이 아닌 설렘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엔 술을 좀 마셨다. 이틀 모두 같은 회사를 다니며 친해진 선배와 친구 그리고 후배와의 만남이다. ​1964년에서 1974년 사이에 태어난 남자 셋과 여자 한 명을 만났다.


나는 한자리에 딱 세 명이 모이면 절친 그룹이라 일컫는다. 각박한 경쟁 사회의 직장 조직에서 나에게 이런 모임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내 성격이 까칠하거나 못나서 책만 읽고 사는 외톨이가 아님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모임이 더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학구파들로 이루어진 시사와 인문학 토론 장이다.


​다시 한번 나는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개인적 자유를 만끽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두 모임에서 나온 대화의 공통적인 결론은,

벽에 붙은 담쟁이나 길바닥에 딱 붙은 비에 젖은 낙엽처럼 정년까지 오래 버티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인간 생활의 불편을 초래하지 않고 또 하수구 같은 곳을 막지 말고 배수가 잘 되도록 처신을 잘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저 알량한 세상 편한 겉치레 이론인 공리주의(Uutilitarianism)를 맹신하는 힘 있는 젊은 세력들이 작당해서 담쟁이넝쿨을 제거하고 낙엽을 쓸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눈치껏 요령껏 잘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지금처럼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며 뒤따라오는 젊은 사람들이 혹여라도 길을 물어 올라치면 내가 겪은 일을 잘 알려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내가 늘 걷고 달리는 길 옆벽엔 담쟁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 길바닥엔 낙엽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밤에 내린 비로 낙엽이 물기에 젖고 사람과 동물들에게 이리저리 밟혀 너절너절 볼품이 없다. 그런데 둘 다 오래 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떨어진 나뭇잎을 보며 쓸쓸한 가을을 노래하나 보다.


그러나, 감정이 메마르고 반골 기질이 뼛속까지 깃든 내 생각은 아주 다르다.


​그토록 무덥던 여름도 우리 곁을 떠나고 가을이 소리 없이 나뭇잎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잘은 모르지만 잎은 이산화탄소와 물, 햇빛을 이용해 영양분과 산소를 만드는 광합성 작용을 해서 식물이 호흡을 하여 잘 자라게 만들었고 또 이 식물은 생물이 잘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큰 노릇을 마치고 이제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흩어져,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 가을의 쓸쓸함, 외로움, 초라함, 쇠락과 죽음 또는 끝남으로 봐서는 안된다. 이와는 다르게,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사랑 그리고 인간다움(仁)이 어우러져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Mutually Disinterested Rationality)이 바탕이 된 이타심(Altruism)으로 승화시켜 또 다른 설렘이 되는 그런 날로 봐야 한다.




조금 더 달려가니 젊고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가 힘차게 달려 나온다. 보는 것만 해도 힘이 솟구친다.


​곧이어 따라오시는 80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며 겨우겨우 걸음을 해 오신다. 몸이 아주 불편하신 듯하다. 내가 세 바퀴 도는 동안 반 바퀴도 못 움직이신다. 그 뒤를 이어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도 계시고 또 몇 걸음 뒤에는 곱사등 할아버지 그리고 몸 어딘가를 수술한 듯 엉거주춤 걸어오는 내 또래 아주머니…


​모두 모두 아침 운동을 하는가 보다. 하나같이 몸은 힘들고 괴로워 보이지만 얼굴이 밝고 눈이 빛난다. 희망의 불꽃같다. 그래서 더욱더 설렌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뉘우친 사람들 거의 다가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부르짖었을 텐데…​ 자식을 가족을 사회를 국가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한 여름의 나뭇잎처럼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열매를 위해 자기 힘을 다 바쳤을 텐데.


​비에 젖은 가을 낙엽을 막 마주하고 사색에 잠긴 터라 노익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한층 더 존경스러워 보인다. 좀 전에 젊은이 옆에서 없어 보이지 않으려고 허리를 쫙 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지만 나이 드신 인생의 대 선배님들께는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추고 싶어 진다.




느닷없이 책 어디선가 본 Understand의 어원이 떠오른다. Under(아래,~아래의) + Stand(서다, 서있다)가 만나서 Understand라고 하더만.


​그 뜻은 아래에 서있다는 것으로 아래에 서면 겸손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해라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자만이나 내가 다 맞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고, 아래에 서서 겸손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따뜻한 이해를 넘어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보일 듯하다.


오늘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 (上善若水)를 되뇌고 싶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의 성질을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로 삼는 도가의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어오는 것에라도 답 잘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