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플레이리스트 15p
1 Am. 새벽 한 시.
하루의 시작은 밝고 화창한 색이 아닌 곧 어둠에 빠질 듯한 피곤함을 그리는 칙칙한 색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일도 역시 해는 뜰거라는 생각에 사무쳐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날이 무수히 많았다. 내일의 삶이 불안했던 나는 이 순간과 친하지 않았다. 그래도 삶은 공평하다. 제일 친하지 않았던 새벽 한 시의 순간은 내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중력을 높여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새벽 한 시는 나 인간 '김수호'가 이 순간을 기다리게끔 하나의 약속을 가져다 주었다.
새벽 한 시. 그렇다. 새벽 한 시다.
'내일 뭐하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내게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목표가 생긴다는 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인 걸 이때 깨달았다. 목표가 생기니 부지런한 삶과 열정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런 하루들은 내게 건강과 부지런한 습관, 건강한 관계들을 가져다 주었지. 그리고 사랑마저도 가져다 주었다.
사실 사랑까지는 아니고 내게 좋아하는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삶의 목표가 생기고 부지런떠니까 또 누군갈 좋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거지. 새로 배정받은 수업 OT시간 그때가 시작이었다. 나와 거의 비슷한 키에 높은 콧대, 왕눈이 눈인데 눈웃음까지 장착한 그녀는 성인 보통 남자가 첫 눈에 반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또 그녀는 활발한 성격에 그녀 주변은 언제나 시장통이었다. 한참 동안 말은 걸지 못하고 고독한 가을 남자마냥 멀리서 지켜보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날 알아챘을까.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내 쪽으로 걸어와 한 마디 던졌다.
"오빠 오늘부터 저랑 다녀요."
상금한 미소와 함께 순간적으로 눈높이가 맞춰져버린 상황에 한껏 당황한 나는 '1초 당황 1초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래요. 좋아요"
그게 인간 비타민 '정선영'과의 첫 대화였다. 적극적인 선영과의 첫 대화는 몽글거리고 설레였다. 그렇게 수업이란 울타리에서 함께 하며 서로를 알아 갔다.
"대신 오빠는 여자 없었으면 좋겠다. 나랑만 놀 수 있게"
수업이 끝난 후 한껏 들뜬 마음으로 선영과 함께 버스를 탔다. 선영이 내리기 한 정거장 전이었을까. 선영은 오늘 한 번 더 나를 당황시켰다.
"오빠는 여자 많아요?"
여자가 한 명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고 곧장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선영이는 남자 많아요?"
질문을 던지고서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쯤
"나요? 나 남자 많죠. 완전 인싸잖아. 근데 오늘 한 명 더 늘었네.. 대신 오빠는 여자 없었으면 좋겠다."
이 말의 의미를 0.3초 만에 파악안 나는 바로 이 친구와 결혼식을 어디서 할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나랑만 놀 수 있게."
아이는 2명이면 좋을 것 같다.
그 순간부터 내 신경은 오로지 '정선영'으로 향했다. 설레임이 한껏 부풀어 올라 얼굴이 발그레 해질 때쯤 선영은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며 재빠르게 버스에서 내렸다. '정선영'의 간질거리는 설레임이 산들바람을 타고 와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인간 김수호'에게도 사랑이 찾아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결혼과 아이까지 생각한 내 망상을 철회하기까지는 하루면 충분헀다. 그녀에게는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었고 연애 기간은 1년. 이름은 김민중.
그 남자의 존재를 알아버린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좌절감과 외로움에 휩싸였다. 한 눈에 반했지만 그 좋아함의 크기는 아무래도 상당했겠지.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선영은 자신의 남자친구의 존재를 나에게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상당한 질투와 연락을 했다.
나 집 들어가서 전화해도 돼?
선영이 남자친구의 존재를 밝히고 나서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 했던 말이다. 남자친구도 있는데 '굳이?'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화려하고 예쁜 그녀를 무덤덤하게 쳐낼 수가 없었다.
"언제할건데?"
"집가서 씻구 과제하고 하면... 새벽 1시?"
그 날부터 선영과 나 사이에는 새벽 1시의 약속이 만들어졌다. '김민중'이란 존재를 알기에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서 선영은 상당한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어쩔 수가 있겠는가. 선영은 매일 1시만 되면 전화를 통해 내 마음에 방문했고 서로의 하루를 공유했다.
하루는 선영이 수업에 결석하는 날이었다. 나 홀로 혼밥을 생각 중인 와중에 선영과 단짝인 '민지'가 내게 와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선영과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 나는 혼자보단 둘이 낫겠다 싶어 '민지'와 함께 엄마의 손길이 가득한 햄버거를 사먹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 여전히 1시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와중에 민지의 스토리에 태그된 나를 보곤 선영은 마치 썸남이 다른 여자와 놀고 온 모습을 본 것 마냥 내게 화를 냈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걸렸어? 거의 커플이던데?"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영의 질투심에 나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토라진 선영의 기분을 풀어주려 열심을 다했다. 한바탕 달래주다 엄마의 손길이 가득한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는 말에 겨우 풀린 선영의 모습은 아이처럼 귀여웠다. 그러나 이 관계를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었던 나는 선영이 조금 진정됐을 때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길 꺼냈다.
"남자친구도 있는데 나랑 이렇게 전화하는 의도가 뭐야? 질투도 하고 나랑 무슨 관계야?
조금은 강하게 들릴 순 있었던 나의 질문은 그녀를 진지하게 만들었고 이내 그녀는 확실해 보이지만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오빠 좋아하니까 그렇지. 남자친구는 곧 정리해야지. 나 이제 공부해야 하고.."
첫 마디는 다시 결혼을 넘어 아이까지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마지막 마디는 그저 혼란만 주었다. 정리를 하고 내게 온다는 뜻일까. 공부를 해야 하니 남자친구는 사치라는 말일까. 아니면 내가 어항 속의 물고기였을까.
아무렴 어때. 그저 새벽 1시에 내게 설레임을 가져다 주는 '정선영'과 하루를 공유하는 것이 좋았던 나는 내 자신이 어항 속의 물고기여도 이대로라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 밤이 가기 전 꼭 관계를 확실하게 알고 싶었던 난 나의 고민을 상대방에게 던졌다.
"나도 너 좋아.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좋아해"
내 고민을 던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선영은 이런 내 말을 받아낸 건지 흘리는 건지 애매모호하게 반응했다. "나도.. 좋지.." 알 수 없는 반응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이내 곧 서운함을 몰고 왔다. 서운한 마음에 서둘러 대화를 정리했고 그렇게 새벽 한 시의 대화는 저물어갔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아침 8시 24분. 3번의 알람 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바로 선영의 대화창부터 확인한 나는 매일 아침 선영이 외치던 굿모닝이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 있어 당황하였다.
일 잘 다녀와요 ♥
지난 새벽. 서운함에 서둘러 대화를 정리한 내가 받은 건 하트라는 단어였다. 이모티콘 하나에 서운함은 물론 다 가셨고 설레임은 덤이었다. 실수라고 하는 선영은 나를 아침부터 들었다 놨다 했다.
다시. 선영에게 난 어항 속의 물고기였을까.
빈지노 - Aqua Man
하루종일 너란 바닷속을 항해하는 나는 aqua man
헤엄 헤엄 헤엄
I'm rolling in the deep inside of you. 너의 어장은 너무 캄캄해
헤엄 헤엄 헤엄
습관적 글쓰기를 위해 하루를 기록합니다. 하루동안 제게 입력된 생각이나 상상의 순간들 어쩌면 일기일지도 어쩌면 소설이 될 수도 있는 이 글은 하루의 끝 쯤 하루를 확인할 수 있는 영수증 정도 되겠네요. 영수증을 확인하면서 음악도 소개해드릴게요. 영수증 플레이리스트 <영플리> 지금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