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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Jan 03. 2024

완벽을 향한 끝없는 도전 _ 예술적 삶 2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

우리가 잘 아는 화가 반 고흐의 일생을 조사해 본 적이 있다.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언제 유명해졌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는 37살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짧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을까?  이것도 알고 싶었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그는 부와 명예를 위해 예술가의 길을 걸었을까? 이런 질문들이 계속 떠오르면서 그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죽기까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평론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주목받지 못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가운데 그는 고독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의 정신세계는 혼란스러웠고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고독은 그림에 잘 드러난다. 거칠고 강렬한 그의 붓터치는 내면세계의 감정을 보여준다. 유명해지기를 원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그림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보통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과 대화하며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좀 더 특별한 수단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을 통해 소통한다. 그것은 보통사람들이 숨 쉬는 것과 같다. 세상의 인정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글이나 그림, 멜로디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의 인정은 보너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자신의 표현을 인정해 줄 때 천군만마와 같은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게 없더라도 묵묵히 창작할 수 있다. 그게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롭고 힘든 길이다. 세상은 가장 뛰어난 한 명을 원하고 그 한 명마저도 이른바 전문가의 평가를 통해 결정된다. 그들의 눈에 들지 않으면 주목받을 수 없다. 이는 실력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상대적 독립변수이다.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에즈라 파운드라 는 시인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고흐는 사후에 평론가의 주목을 받고 이제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불멸의 화가가 되었다. 나는 이것을 유한 속에 무한이 숨어 있다고 표현한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의 삶을 살 수가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포크 가수 존 바에즈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Diamond and Rust> <River in the pines>등을 좋아한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로 70이 넘은 그가 파리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을 잠깐 보았다. 보다가 이내 채널을 꺼버렸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듣던 20대의 그 낭랑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스탠더드 팝의 전설 패티 김이 왜 은퇴를 선언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의 인생을 존경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존 바에즈는 20대 그 시절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그 영원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절대를 향한 도전은 삶의 원동력

절대를 향한 도전이다. 죽을 때까지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거기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목표를 향해 숨이 멎을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거기에 허무가 끼어들 틈이 없다.
또 얼마 전 유튜브로 작가 조정래 선생의 생생한 고백을 보았다. 작가는 고독해야 한다고. 사람을 만나러 다니면 안 된다고. 창작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가 있다며 하루 일과를 공개했다.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운동하고 밥 먹고 글 쓰고 그게 다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영원히 빛나는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세상 경험을 쌓느라 정신없지만 진짜는 자신과 마주 앉아 고독한 경주를 하는 것이다. 허무가 없는 삶, 절대를 향한 끝없는 도전, 내가 창작에 꽂힌 이유이다. 도전, 몰입, 창조 그리고 행복 이게 전부다. 나는 여기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세상의 인정은 두 번째이다. 내가 창작의 가운데 희열을 느끼는 게 우선이다.

정말 변태스럽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문득 떠오른 한 장면에 심취해 온 힘을 다해 쓴다. 그러다 보면 한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땐 정말 짜릿하다. 몸 안에서 도파민이 샘솟는다. 세상의 인정은 보너스다. 내가 만족하는 창조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하다. 진짜  일류는 자기와 싸운다. 남과 싸우는 사람은 2등이다. 그렇기 믿기로 했다.  맞다, 예술은 배고프다. 예체능은 무조건 잘해야 한다. 1등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주목하고 세상이 인정한다. 1등은 한 사람이다. 수많은 2, 3등은 얼마나 괴로울까?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2,3등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힘들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이다.
스타의 길은 어렵고 험난하고 더 고독하다. 높이 올라가면 그만큼 추락할 위험도 많다.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기 내면을 충실하게 만드는 게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다. 화려해 보이지만 위태로운 길이다.


예술의 가치

지금까지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 인간은 공감과 위로를 얻고 싶어 한다. 그걸 흔히 감동이라고 말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교감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감상자는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면서 삶의 위로를 얻는다. 어느 부분에서 위로를 얻는지는 창작자가 예측하기 힘들다.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의 분위기와 정서가 주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 심미안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영화를 보며 특정 시절의 상황을 이해하고 분노한다. 아름다운 멜로판타지를 보며 자신의 젊은 날 첫사랑을 떠올린다. 릴랙스의 시간이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예술은 우리 삶을 빛나게 한다. 춤추게 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문명사회의 총통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통제를 선택했고  혼란을 야기하는 <예술>을 포기했다. 그 대신 소마라는 알약을 먹으며 행복감에 취하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세계인가?”

그러자 야만 사회에서 온 존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불편해지고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며 권리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허용해 주세요”

불안과 혼돈을 제거한 기술과학 사회에서  존은  견딜 수 없어 결국 죽음을 택한다. 불완전하고 불안함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존재들의 충돌을 통해 드라마틱하고 버라이어티 한 인간 삶의 긴장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예술은 이를 모방한다.

이 얼마나 멋진가?.

종교적 삶, 철학적 삶, 이성적 삶, 예술적 삶 가운데 예술적 삶이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고 김흥호 교수는 말한다. 그분은 서예를 하셨다. 그래도 도달해야 될 목표가 있고 완성해야 할 과제가 있으니 삶에 역동성이 생긴다. 매일 정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결코 지름길이 없다. 무한 반복이다. 자기완성이다.  싱어게인 시즌 3을 가끔 유튜브를 통해 보게 된다. 탈락과 합격의 희비가 교차한다. 탈락하신 분들이 음악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길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꼭 TV를 통해 인정받지 못하더라고 동네에서라도 인정받고 묵묵히 노래했으면 하고. 생계가 문제라면 돈 버는 직업을 갖고 남는 시간에 동네 카페에 서라도 노래하면 되지 않을까? 1등이 아니어도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몰도바의 어느 구석 아파트에서 일주일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오로지 사유에만 몰두하며 끙끙대고 있다. 침묵이 얼마나 많은 사유를 가능케 하는지 실감하고 있다.  오늘은 인터넷마저 장애가 생겨 끊겼다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고리마저 사라졌다. 물론 일시적일 것이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내가 고독을 원하는 것은 절대 고독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고독으로 인해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라고.  세상을 떠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아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어야 할 때라고 이내 곧 냉정해진다. 스스로를 유배한 셈이니 철저하게 유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밤송이가 시간의 이슬을 맞아 알맹이가 꽉 차 벌어지고 이윽고  제 무게를 못 이겨 땅에 떨어지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고독한 순례를 이어간다. 새해가 밝았다. 모두에게 희망찬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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