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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Jan 29. 2024

인간은 꼭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참다운 의로움은 죽음마저 이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한 명의 빛나는 캐릭터가 보였다. 이태신 장. 의로운 삶의 전형을 보여주며 영화를 살렸다. 세상은 가치관과 가치관의 대립 속에서 불꽃튀는 긴장이 만들어진다.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은 자기욕망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박진감 넘치고 생사를 가로지르는 운명의 한 판 승부를 펼친다. 둘 다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전두광처럼 살아도 되는가? 또는 이태신처럼 살아야 하는가? 철학이 진리를 묻는 학문이라면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둘 다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소신이 있다. 여기까지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렇다. 욕망이다. 두 캐릭터가 가진 욕망의 층위, 그 욕망의 실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욕망은 정당한가? 모든 욕망은 아름다운가?  과연 욕망이란 무엇인가?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인간의 욕망을 두 가지 층위로 나누었다. 첫째는 욕구이다. 이건 생물학적 요구이다. 먹고, 자고, 번식하는 욕구이다. 종의 유지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개체는 욕구충족을 위해 움직이고 사회나 국가는 개인의 욕구실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현상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대표적인 예이다.


두 번째는 상상이 만들어내는 욕망이다. 꿈과 이상, 목표 등이 다 이런 종류의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간내면의 에너지를 코나투스 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로 보면 사실 코나투스가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이끌어왔다. 부를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고 그래서  대서양을 건너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지중해 무역을 대서양 무역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지금은 우주로 나간다. 코나투스의 긍정적 측면이다 상상이 만들어내는 욕망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 측면의 코나투스도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한 문명을 절멸시키기도 한다. 히틀러는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부활을 꿈꾸었다. 아리안의 순혈혈통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유대민족을 말살했다.  



정치의 역할


정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인간 활동이다.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뿜어내는 코나투스를 지혜롭게 조율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법과 제도를 만들어 컨트롤한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며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될 것이다. 인간의 정치 역사는 인간욕망을 조정하고 컨트롤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내면서 변화해 왔다.   


프랑스혁명은 그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인간내면의 가장 보편적인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사를 질적으로 한 단계 변화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지향했던 자유와 평등, 박애는 이후 모든 인류가 지향하는 근본적 가치가 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여기에 입각해 구체적인 사회정치 시스템을 설계했다. 삼권분립, 공화정 등이 근대정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을 뒷받침했다.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 J.S 밀의 <자유론> 핵심내용이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는 자유와 욕망을 제한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욕망의 실현은 정당한 과정과 공정한 경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왜 악인이 더 잘 사는가?


그런데 가끔 힘을 가진 사람이 법을 어기고 자기 욕망을 실현해서 떵떵거리며 법을 지킨 사람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영화 속에서도 결국 승자는 전두광이었다. 의롭게 살려고 했던 이태신은 가혹한 대가를 치른다. 악이 선을 이기고 더 잘사는데 왜 굳이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들기도 한다. 또는 선이 악에게 굴복하는데도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나도 악하게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절대악과 절대선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여기에 대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언급한 내용이 있다. 영화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면 전두광 무리들은 의리와 충성으로 똘똘 뭉쳐있다. 만약 그들이 절대악의 무리라면 그들은 의리와 충성으로 뭉칠 수가 없다. 모두 배신과 이전투구로 흩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조금의 의로움도 없이 오로지 절대악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이 부분을 악은 선에 기생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법을 어기고 규칙을 어긴 자들이  온갖 특혜를 누리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이유는 대다수 선한 사람이 규칙을 지키며 의롭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악인이 득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다.  


나도 법을 어기면서 내 욕망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하고 전두광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사회에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도덕과 윤리를 포기하고 사는 삶은 어떤 삶인가? 짐승의 삶이다. 짐승처럼 살고 싶은가? 짐승 같은 사람들이 득실되는 곳에서 살고 싶은가? 오로지 힘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소수의 강자가 다수의 약자를 유린하고 군림하는 곳에서 살고 싶은가? 기꺼이 소수의 강자가 되어 다수의 약자를 겁주고 착취하며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방향의 삶인지. 그럼에도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지나간 역사에서도 그랬었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지배와 군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그를 허용하는가이다.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기에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너지고 다시 회복하고 무너지고를....모든 진화가 그렇듯이 인간 본성의 진화가 그렇게 단기간에 이루어질 리가 없기 때문에


미학의 문제


다른 한 가지는 미학의 문제이다. 의로움에 반응하는 인간의 미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국방부 장관의 이태신 해임으로 승부가 갈렸다. 전두광이 이긴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아주 짧게 전두광처럼 살고싶다는 순간적 충동이 올라왔다. 그가 쿠데타에 성공하고 화장실에서 배설하면서 껄껄 웃는 그 모습은 동물적 쾌감이었다.  짜릿하지만 그 짜릿함을 관찰하는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태신의 헌신적인 태도는 나를 흔들었다. 칸트가 말한 미를 느끼는 인식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온 몸에 전율이 오르며 뭉클한 감정이 저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그게 더 아름다운 것이다.  



현실주의자 vs 이상주의자


영화에 나오는 많은 인물군상들은 크게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두 부류로 나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상주의자라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 노력할 테니 쿠데타 같은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 그리고 설령 일어나더라도 성공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 대세를 따르는 현실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딱히 비난할 수도 없다. 자기 생존은 인간 삶의 기본적 욕구이기에.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의롭게 산사람의 비참한 말로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신은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 참다운 의로움은 죽음마저 이긴다. 그러나 그 의로움이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당신은 의롭게 살 것인가? 자기 양심의 선택이니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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