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승리』를 읽고
배대웅 작가님은 11월 15일 [자랑해도 될까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책에 대한 글을 발행했다. 겸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겸손함이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3일 만에 주요 일간지의 지면을 석권한 이유는 --- 아무래도 ‘연구소’라는 미개척 주제를 탐구한 덕분이다” *
이 겸양의 표현에 반박하자면.
작가님 말씀처럼『연구소의 승리』가 세계 연구소의 제도사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주요 언론을 제패한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고 본다. 새로운 주제 플러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연구 기관에 대한 책이 뜻밖에 재미있어서 참신한 반전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 흥미로움은 어디서 나왔을까? 작가님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단 ‘없다’가 아니고 ‘있다’이다.
“마법도 없고, --- 역대 급 혁명 서사도 없지만 현재 인류 문명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들은 들어 있다.” *
## 스토리텔링의 마법이 있다
⓵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이 책은 각각의 연구소에 대한 챕터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학과 연구소’라는 두 개념을 통해서 인식의 확장을 시도했기 때문에 마치 한 편의 이야기가 흐르는 장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주제는 “과학이(연구소가) 어떻게 사회를 설계했는가?” (추가하자면 “어떻게 역사를 이끌었는가?”)가 될 수 있다.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베스트셀러 『올리버 키터리지』는 열세편의 각자 다른 단편 모음집이다. 하지만 어느새 스토리가 이어져 올리버 키터리지라는 여자의 일생으로 마무리된다. 한강의『채식주의자』도 세 편의 단편이 연결된 구조다.
『연구소의 승리』도 여러 개의 짜임새 있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한편이 의미 있는 스토리로, 몰입하게 하면서, 결국 지구가 하나의 연구소가 된 현재의 모습으로 안내한다.
이렇듯 연구소는 이제 전선이 아니라 연결망이 되었다. 과학자는 조국이 아니라 인류의 이름으로 연구하고 있다. 협력이 곧 실력이고, 네트워크가 곧 실험실이 된 시대가 도래했다. (p246) #
기자들이 감동을 받은 부분이 제각각인 언론사들의 서평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매일경제>는 미국국립알레르기 감염병 연구소의 모더나의 mRNA 기술에서 시작하여 초고속 백신 제작 이야기를 인상 깊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우리나라 KIST 스토리를 다루고, <국민일보>는 내가 좋아하는 ‘쓸모없는 지식’에 대한 에피소드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질소 비료를 만든 손으로 독가스를 개발한 연구소의 두 얼굴에 주목하고.
나의 최애 단편은 단연 제니퍼 다우드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두 여성 과학자 이야기다.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가위에 대한 상식도 요긴했지만 여류 노벨상 수상자의 이력이 인상 깊었다. 연구소들의 막대한 지원과 상호 협력 스토리와 더불어 사르팡티에가 어린 소녀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았다.(장래 소망이 퀴리 부인이었던 중학교 때 생각이 나고, 어린 손녀가 크면 들려줘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모두 매력적이어서 기자들이 한두 개로 간추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가가 아닌 논픽션 글쓰기 작가도 이런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어야 함을 시사한다.
⓶ 이야기의 깊이와 언어에 있어서
“책은 지식을 더하고 사유를 심화해야 한다.--- 책이 흔해진 시대에 더욱 선명한 사유의 구조를---” *
“연구소가 그만큼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할 언어도 만들지 못한 탓이다.” #
과학을 사회와 역사 속으로 끌어내서 이야기로 풀어내고 사유하게 하는 능력은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 기초 과학 연구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호소력 있게 연구소를 설명하는 언어를 만들어 낸 것도 사회학도의 풍부한 인문학 소양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퀀텀점프는 한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지적교류가 임계점에 도달해 터져 나온 도약이었다. (p259) #
작가님의 예전 글에 대학원 시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룬 수업 이야기가 있다. 영어를 넘어 독일어 원서로 읽던 급우를 언급하며 자신을 열등생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때 스승님이 이 책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사회학을 창의적으로 적용하며 위상을 높였다고 크게 칭찬하지 않으실까?
## 역대급 혁명 서사가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어려운 과학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작가의 말을 빌려 ‘현재 인류 문명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들’을 조금 깨친 느낌으로.『최소한의 과학 공부』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작가의 간절한 염원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따라온다.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에 동화되어서다.
비유하자면 연구소란 지식을 국력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엔진인 셈이다. 연구소의 존재 가치는 바로 이러한 전략을 가능케 하는 집단지성에 있다. 연구소는 ‘돈을 쓰는 기관’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 해결 능력’ 그 자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인구절벽, 저성장, 국제적 기술경쟁, 기후변화, 신종 감염병 등과 같은 미증유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것은 사회의 과제를 과학의 논리로 전환하고, 과학의 성과를 사회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연구소는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과학을 설명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시민과 신뢰를 쌓아야 한다. #
어떻게 사회를 설득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어디서 강의를 할 수도 없으니….
우선 친구에게 선물하고, 직장에도 비치하려 책을 두 권 샀다. 작가가 조용히 이루고자 하는 혁명, “연구소, 다시 사회 속으로”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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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글씨는 작가님의 브런치 글과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연구소의 승리』 배대웅, 계단, 2025
* 브런치 글
https://brunch.co.kr/@woongscool/310
https://brunch.co.kr/@woongscool/309
<직장 대기실에 비치된 브런치 작가님들 책, 실용서들 위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