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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돌이 아빠 Oct 04. 2023

자존심

<겉밝속축>시리즈

<꿈> 종이에 연필과 과슈, 23 x 16 cm, 2023

 자존심은 내면의 기둥일까, 아니면 자신을 찌르는 일말의 유리조각일까? 뚜렷한 정체가 없는 이 '자존심'이라는 세 글자는 끊임없이 나를 간질인다. 느닷없이 폭소가 날만큼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도, 진심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대는 것도 식을 듯 근근이 남아있는 자존심의 열기 때문인 것 같다.


 커트 코베인은 건즈앤로지스의 인트로 공연을 거절하고 너바나의 공연 중간 엑슬의 이름을 조롱하듯 부른다. 반면 히치콕은 무릎을 꿇으며 촬영을 이어갔고 감독으로의 권한을 내려놓는 굴욕을 견디며 영화를 마무리했다. 김병현은 자기보다 머리 한두 개 더 있는 제프 켄트에게 데드 볼을 던지고 주먹을 까고 다가오는 그를 향해 담대히 걸어갔다. 그런데 박지성은 자신을 넘어뜨리고 침까지 뱉은 토레스를 못본체 그러려니 넘기며 앉은 자세로 묵묵히 스타킹을 끌어올렸다.


 나는 본심을 말하거나 자기 변론을 하거나 부당함을 표현할 때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서부터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은 마치 침착이라는 부적을 이마에 붙이고 공자 맹자가 빚어낸 것 같이 겸손, 겸양, 자책, 책임감, 인내, 근성, 묵묵함, 너그러움, 검소의 덕목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살면서 그런 태도를 비슷하게 지닌 사람들을 몇 명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한 단어의 커리어만으로 주변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증명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삼 위의 온갖 보기 좋은 태도를 취하기에 나는 탈피 중인 가재처럼 너무 여리고 주변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느낀다.


 흔히 이야기하는 '인생의 멘토'보다 압도적인 수로 반면교사를 주는 선배나 어른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게 만든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억척스러움', '뻔뻔함', '자화자찬', '일방통행의 연설' 같은 것인데 악을 쓰듯 이런 부분은 답습하지 않으려 몸부침 친 것 같다. 하지만 근래 무지막지한 자책감에 시달릴 정도로 철면피스레 스스로를 추켜세우며 말도 안되는 입장을 늘어놓는데, 막상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보니 과거에 미워했던 이들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말을 뇌까린다. "정말 오죽했으면..."


 비록 내가 꿈꿔온 근사한 태도로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은 아닐지 모른다. 때로는 쓸쓸해보이고 보는 사람이 차마 입 밖으로 혀를 찰 수 없을 만큼 안쓰러울지라도 방전되기 직전 건전지로 연결된 꼬마전구처럼 희미한 자존심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꽤 오래전부터 지겨울 정도로 오르내리는 '자존감'이라는 말은 내겐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차라리 '꼴에 자존심'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이 더 좋은 것 같다. 사정이 안 좋으니 자존심이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거고, 상황이 나아지니 악취와 함께 구겨진 자존심을 빨아서 판판히 펴 말리는게 뭐 어떠나 싶다. 나는 그냥 짜증 날 때 마저 억지스럽게 '나는 소중하고 괜찮아'라고 하기 싫다. 물론 이럴 수 있는 건 쭈굴해진 나를 그러려니 해주는 가족이 있어서 일테고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지긋지긋할지도 모르지만 그냥 작아졌다 커졌다하는 자존심을 움켜쥐고 부들거리는게 나이기에 생긴대로 살아야지 싶다.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의 열매가 맺는다"라는 말이 머리에서 늘 맴돈다. 그만큼 나는 귀감이 될만한 인격자의 꿈을 갖지만 시들어 떨어진 줄 알았던 자존심이 어느 순간 활활 타올라 화전경작 후 납작하고 시커먼 땅이 드러나듯 성질의 바닥을 까발린다. 근데 그때 속이 후련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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