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 대충도 생각이 안나는 예전 일이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아주 또렷하다. 일주일에 서너 번 어김없이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 자는 척하다가 실패한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식탁에 끌려 나와 사장님의 훈시를 묵묵히 듣고 우리 둘 앞에는 미지근하고 탄산이 빠진 맥주가 두 캔 놓여있다. 엄마는 '이제 자게 보내줘요'라는 휘청거리는 목소리의 간청을 하나 어김없는 '가만히 있어'라는 말에 입을 다물고 사과였나 참외였나를 깎고 있었다.
꽤 긴 이야기가 거진 끝이 났고 아버지는 '너도 할 말을 하라'며 기회를 주었다. 나는 정말 이때다 싶어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막장이나 야자타임 같은 느낌은 전혀 아니었고 바닥에 엎드린 영의정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같은 식의 말로 '나도 대접 좀 해달라'는 말을 공손히 올려 바쳤다. 그리고 곧 아버지는 가뜩이나 큰 두 눈을 부릅뜨고 동공을 부들거리더니 곧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엄마는 아버지가 엄청 속상해하며 엉엉 우셨다고 제발 본심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당부로 내 입을 꿰매버렸다. 뭐야, 말하래 놓고 말하니까 말하지 말래. ㅋ
"그래,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그때 마음이 답답해진 거였구나. 그래, 아빠가 이제 알았다..."
"어! 그래쪄떤 거야!"
살면서 이래저래 희한한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몰라도 상대방 맘을 헤아리는 타율이 꽤 높다고 생각한다. 하드웨어는 영락없이 외탁이지만 하는 말이며 즐겨 먹는 인스턴트가 꼭 나와 닮은 아들을 보니 '이런 거 아닌가' 싶은 때에 쉽고 조리 있게 말을 만들어 놓으면 아들이 그 위에 올라탄다. 그래, 아빠가 다 들어주고 다 헤아려줄게.
비교적 만만하게 갈 수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 들른 날이었나 싶다. 환승역까지 포함해서 네댓 정거장 오가는 길에 콩돌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콩돌이는 어느새 의사표현을 꽤 잘하게 되었고, 비교적 말문이 트이기 전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요래조래 잘도 묘사해 댄다. 아버지의 반작용으로 성장한 아들은 허심탄회 정제 없이 쏟아내는 자신의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아빠! 그때 그 장난감 사러 갔을 때 기억나? 그때 그래가지고 이래 가지고 저랬었는데 그때 마음이 이랬는데..."
"아아-- 그랬구나. 그때 아빠가 잘 몰라서 서운했겠구나... 정말 그랬겠구나..."
"응, 아빠! 근데 그러고 그 담에 거길 갔는데 이렇게 해가지고 요런 기분이었는데 그때 아빠가 이래 가지고..."
"아아- 그런 거였구나. 아빠가 그렇게 이야기해서 콩돌이가 마치 저런 생각이 들게 한 거구나. 그런 거였구나..."
"아니, 아빠! 근데 그건 그것보다 이래 가지고 그렇게 생각한 건데 그때 이런 게.."
"야, 진짜 끝이 없네. 안 되겠다, 도망가야겠다!"
나는 어느덧 도착한 종착역의 플랫폼에서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떼었다를 반복하고 '아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달렸다. 아들은 아빠의 뒤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못다 한 말이 있다며 자신의 맘을 이해시키려고 달려든다.
---문자 메시지---
아버지: 야,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러한 거니 요렇게 그렇게 해서 끝내라.
나: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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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련된 코끼리가 자신의 몸집이 커진 것을 모르고 조련사를 보면 덜덜 떨듯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 (나보다 키가 한참 작은 아버지인데도 나보다 커 보인다.) 그런데 이제 나한테 할 전화를 콩돌이 엄마에게 하는 아버지는 내게 무척 눈치가 보인다는 듯 아내가 그를 대변한다.
PS- 전에 미국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도통 연락을 할줄 모르는 내게 '잘 지내냐'며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기분이 계속 업되어있고 화이팅이 있었는지 아버지께 "사랑합니다!"라고 했고 아버지는 "웃기지마."라고 바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