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리뷰
2년 전 <작은 아씨들>을 리뷰했을 때 처음으로 만점을 주고 싶다고 리뷰를 쓴 기억이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미학적인 완성도와 디테일이 더 해져서 나의 오감이 절정으로 자극된 작품이라고. 그 이후 오랜만에 나의 감정이 올인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공중파 드라마의 새로 쓰는 신기원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프로파일러가 수사 중인 살인사건에 본인의 딸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스릴러 드라마이다. 장르의 특성상 범인을 추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일차적 재미이지만, 작가가 전하려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믿음과 의심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대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프로파일러 장태수와 그의 딸 장하빈이 있다.
프로파일러 장태수의 의심은 가족의 붕괴를 낳았고, 그의 계속되는 딸에 대한 의심은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주변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끼친다. 아버지로서의 믿음과 프로파일러로서의 의심이 수도 없이 부딪치면서, 이러한 갈등들이 이 작품의 긴장감과 오묘한 에너지를 형성하는 중심이 되어진다. 결국 믿음과 의심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부녀관계의 변화와 이야기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이러한 갖는 마음가짐의 대가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차갑고도 냉철하게 그려진다. 믿음과 의심의 경계선에서 자신이 믿는 것만 바라볼 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걸 이 두 사람의 관계로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건 장태수의 믿음과 의심 사이의 갈등을 후임으로 선임된 두 프로파일러가 고스란히 대변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베이스로 한 장태수의 의심은 이어진 경장이, 반대로 감정에 호소하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믿음은 구대홍 경장이 고스란히 대변해 나간다. 결국 이어진과 구대홍의 갈등은 장태수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메타포인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렇게 이분화된 두 사람의 태도마저도 사건을 해결하는데 그 어느 하나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어진과 구대홍 경장도 결국 자신이 믿는 정의대로 행동하면서 사건 해결에 진척만큼이나 큰 오점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믿음과 의심 사이 그 어떠한 정답도 내릴 수 없는 장태수의 흔들리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태주와 정두철은 범인으로 몰린 자식들에 대한 믿음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대비해서 보여준다. 딸에 대한 의심으로 거리를 두는 장태주와 달리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모든 죄를 덮으려 하는 정두철의 행동은 믿음과 의심의 차이가 어떤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는지 그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가출팸 숙소의 집주인인 김성희와 그의 아들 권도윤도 믿음과 의심 사이에 갇혀있는 인물들이다.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가스라이팅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김성희와 그런 엄마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아들 권도윤의 관계도 이러한 줄다리기의 구도를 여지없이 그려낸다.
사실 가장 흥미로운 건 작가와 시청자마저도 이러한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범인이 장하빈인거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장르적 특성상 이것이 맥거핀임을 시청자들은 쉽게 간파하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장하빈이 진짜 범인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만들면서, 이 작품은 끊임없이 여주인공에 대한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저울질하게 만든다. 공중파 드라마가 여고생을 싸이코패스로 그리진 않을 거라는 클리셰 가득한 믿음과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보여준 수많은 반전으로 인해 설마 진짜 장하빈이 범인인가라는 의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이러한 믿음과 의심 사이의 밸런스를 마지막 10화까지 힘을 잃지 않고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만 보고 예상했을 때와 다른 결말을 보았을 때의 반응은 시청자들마다 분명 다르게 느끼게 된다. 너무나 전형적인 결말이 오히려 장하빈을 의심한 시청자들에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연출이다. 예전 리뷰에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드라마는 10시간 이상의 러닝타임을 갖기 때문에 영화와 같은 퀄리티로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OTT 시대에 제작비 투자가 높아졌다고 해도 영화와 같은 공력을 들인다는 게 제작진 입장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무빙>과 같은 몇몇 작품들이 영화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선보이긴 했지만, 이 작품이 선보인 연출력은 드라마 스태프들이 어떻게 이런 공력을 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모든 미장센에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을 가한다.
시선을 유도하는 카메라 워킹부터 미장센으로 그려내는 온갖 다양한 메타포들, 그리고 놀라운 사운드 편집까지. 실제 비 오는 날 촬영하는 카체이싱 장면부터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부감샷(항공샷)에 그림자와 거울을 활용한 계속되는 메타포 가득한 화면들은 어떻게 TV 공중파 드라마가 이런 공력을 들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유독 관심 있게 봐야 할 연출은 바로 프레임에 가둔 측면 샷이다. 장태수와 장하빈의 식탁 대화를 마치 취조실처럼 보이게 꾸민 프레임부터 모든 인물들을 프레임안에 가둔 측면 샷들은 정적이면서도 마치 액자 안의 그림 같은 미장센을 그려낸다. 시청자에게 관찰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내면서, 그 안에서 여러 인물들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치열하게 줄다리기하고 있는 이미지를 고요하고도 긴장감 있게 묘사해낸다. 흐트러짐 없는 좌우대칭의 구도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출들이 힘이 많이 들어간 겉멋 가득한 연출이라는 비판도 있다.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나 역시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조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퀄리티로 이뤄낸다면 이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솔직히 말하면 미니시리즈 입봉작을 이러한 디테일로 만들어낸 신예 송연화 감독의 집착스러운 연출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애초에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전혀 다른 레벨의 미장센을 고려하고 만든 드라마 같았다.
<왓쳐>부터 김사부 시리즈까지 리뷰에서 입에 닳도록 칭찬했던 한석규. 이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한석규는 뛰어난 딕션과 발성을 가진 훌륭한 배우이지만, 형사 같은 비슷한 배역에서는 송강호처럼 자기 복제화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는 배우이다. <텔미썸딩>부터 <주홍글씨>, <베를린>, <왓쳐> 그리고 이번 작품까지 모두가 마치 동일 인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늘 감탄하게 되는 극악의 감정 전달 능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면서 또다시 한석규라는 이름의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믿음과 의심 사이, 죄책감과 괴로움에 흔들리고 피폐해져 가는 장태수라는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너무나 디테일하게 표현해 내면서, 이 작품의 중심에선 그의 감정선에 완벽히 몰입하게 만든다. 심지어 대사가 많이 없음에도 눈빛과 표정, 여기에 숨소리에까지 감정을 실어 날리는 한석규의 내공은 드라마의 여백마저 본인의 연기로 채워나가는 경지까지 보여준다.
그러한 내공에 밀리지 않는 신예 채원빈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차가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그려내는 신비로운 마스크와 오묘한 기운은 장하빈이라는 끝 모를 캐릭터를 표현해 내는데 이보다 더 이상적인 캐스팅은 없어 보였다. 여기에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더해져 한석규와의 호흡에서도 훌륭한 조화를 보인다. 노재원의 색다른 캐릭터 해석력도 인상 깊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를 구현해 낸 한예리의 연기도 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최영민을 연기한 신예 김정진의 리얼한 연기도 인상적이었으며, 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유오성마저 자신의 캐릭터를 끝내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매력적인 마스크에 비해 그동안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지 못했던 최유화도 김성희라는 캐릭터를 만나 새로운 느낌의 사이코패스를 그려내면서, 그녀 커리어 중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다.
극찬만 했지만 그렇다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결말이다. 앞서말했듯이 너무나 전형적인 엔딩이 오히려 반전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이 빠진다. 물론 이마저도 장하빈을 의심한 나의 몫이기도 하지만, 드라마틱한 재미를 위해 마지막 한번 더 이야기를 뒤집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믿음에 대한 메시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지금의 엔딩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솔직히 나의 기대는 장하준 만큼은 하빈이가 실수로 죽였다는 반전같은것이 나왔으면 했다.
맥거핀으로 드라마를 억지로 늘린듯한 인상을 준 중반부도 아쉽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주제를 부족함 없이 전달한 작품이지만, 스릴러 장르 특성상 궁금할 수밖에 없는 범인에 대한 실체를 계속해서 비틀면서 부족한 서사를 맥거핀으로 때우는 듯한 인상을 반복해서 준다. 특히 모든 서사를 한꺼번에 드러낼 수 없는 스릴러 드라마의 전개 속에서 깜짝 등장한 정두철은 다소 뜬금없는 전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작품을 다 감상하고 나면 이러한 부분들이 큰 단점이라고 느껴지진 않지만, 매주 2회식 공개되는 공중파 드라마 특성상 이러한 맥거핀은 견디기 힘든 탄식과 고통을 선사했다.
감독의 집착으로 그려낸 미장센이지만 다소 느린 호흡의 편집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어두운 조명은 시청에 불편을 초래할 정도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특히 논란의 6화) 리얼리티를 우선시하는 작품이기에 개연성이 조금 부족한 장면들도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옥에 티 같은 인상도 받게 된다.(예를 들어 송민아 피에서 약물이 발견되지 않은 부분이나, 장하빈이 잠긴 모텔방에 쉽게 잠입하는 장면 등등)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작감배(작가, 감독, 배우)의 삼박자가 완벽히 맞아 들어간 작품이다. 심지어 이 작품이 유달리 남달라 보이는 것은 그러한 작감배의 수준마저 기존 드라마의 범주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신인 감독과 작가가 촘촘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숨 막히는 전개를 그리면서, 결국 공중파 드라마에서 다시는 못 볼 미장센과 이야기를 완성해 낸다. 여기에 한석규라는 경지의 배우가 극의 중심을 이끄니 어나더 레벨의 드라마가 탄생된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을 단순히 범인 찾기의 스릴러 작품으로만 본다면 반복되는 맥거핀과 뻔한 결말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남다름에 호응하여 믿음과 의심 사이에선 장태수와 같은 고민을 했다면, 그리고 믿음에 대한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했다면 다신 못 볼 걸작의 향연이란 걸 분명 깨닫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온전히 나의 감정이 올인한 작품이었다.
20년대 좋은 국내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