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에 대하여
나의 방어기제는 언제나 회피였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아닌 척, 모른 척의 달인이 되었을 정도로 회피가 습관이 되었다. 이유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접했을 때, 회피를 통해서 내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또한 상대방의 의도대로 해주고 싶지 않을 때 주로 모른 척 했던 것 같다.
회피를 하면서 주로 사용하게 된 스킬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주로 회사를 퇴사하거나, 참여하기 싫은 행사가 있으면 거짓말을 했다. 퇴사 사유가 부정적이기보다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위해 끌어들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어리고 미성숙했다.
사실 그 때는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다. 나는 내가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 상황이 자연스럽게 넘어가길 바랐다. 하지만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들로 인해 나는 거짓말하면서 여기저기 회사를 옮기고 다니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나는 어설픈 내 거짓말을 사람들이 알더라도 모른 척 해주길 바랐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모른 척하면 상대방도 모른 척 해줄거라고 믿었다. 순진했다.
굳이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내가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아왔던 나는 내 진심을 이야기하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까에 대해서 항상 의문이었다.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고 혼나기만 했던 나는 솔직하게 말한 걸 후회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를 뒤에서 괴롭히던 그 친구에게는 화를 크게 내서 내 감정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아닌 척하면서 약을 올리는 게 더 효과가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별일 아닌데도 자꾸만 불쾌하다며 일부러 내 감정을 건드리는 모습이 싫었다. 생일 선물을 챙겨줘도, 여행 다녀와서 선물을 줘도 그 친구는 별로라는 말만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 때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눈치챘다. 나는 선물주고 챙겨주기까지 했는데 왜 미안하다고 해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할수록 더 모른 척을 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희안한 관계였다. 상대방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크고, 나는 기대하는 대로 해주기를 거부했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하는 그 행동이 괴씸해서 나는 솔직하게 내 감정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모른 척을 했다. 사실 그들의 행동이 그렇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본인들의 생각에 내가 분명히 기분 나빠할거라고 기대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많이 유치했다.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계속 만났다. 그럴수록 그들은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서 내 평판을 망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들은 내가 했던 부정적인 말들을 내 약점으로 삼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분 나빴던 걸 털어놓거나, 그 사람이 어떻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것들이었다.
황당했다. 그게 약점이 될 수가 있는 건가? 물론 내가 뒷담화한 당사자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는 내 얘기를 들어주길 바랐다.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나열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 뒤에서 무슨 얘기를 못하겠는가. 사람들이 뒤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알고 나서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뒷담화를 했다는 이유로 화만 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들은 내가 자신들처럼 똑같이 할까봐 겁을 냈다. 물론 나는 나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 대답해줬다. 사람들은 물어본다고 그걸 얘기하냐고 했다.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 사람들의 머릿속엔 내가 겪었던 것처럼 자신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득차 있었겠지.
그들은 매우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나보다 많든 적든 상관없었다. 그 사람들은 순수한 내 의도를 자신들의 더러운 프레임으로 덮어씌웠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도 내가 하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 나중에 후회할거라는 협박만 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별 말도 아니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저 내가 하는 말은 뭐든 싫었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저 과거의 일들을 얘기하면서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같이 웃고 떠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사람들의 치부를 꺼낸다고 했고, 나는 그게 그 사람의 치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얘기했다. 아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바라지도 않았고, 내가 사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것 자체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을 믿고 나를 대하던 사람들의 비웃음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솔직해야 할지, 적당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거짓말 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걸까. 하지만 너무 솔직하면 내 손해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보다 솔직함을 약점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고치고 싶었다.
너 생긴대로 살아라.
가끔 즐겨 보는 즉문즉설에서는 법륜스님이 "그냥 생긴대로 살라"고 이야기 한다. 욕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가진 좋은 면만 가지고 싶어서 그런거라고. 보기에는 너무 쉽게 툭 던진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나는 내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짓말을 안하겠다고 해서 정말 안하게 될까? 이제는 피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무의식의 내가 회피하는 걸 그만할까?
거짓말을 안한다고 해서, 뒷담화를 안한다고 해서, 회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쨌든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들을 겪고 느낀 건 나에게 온 그 일들이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미성숙하고 어렸던 내 모습을 마주하며, 나와 비슷했던 그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각자의 열등감과 분노가 뭉쳐서 나를 향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도 나도 어리기만 했던 그 때, 한 명이라도 솔직했다면 어땠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멀어진 사람들에 대한 후회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멀어졌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한 명 뿐이었기에 사실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도 나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만나왔지만 서로에 대해서 솔직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는 내가 무시했던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재해석하고 있다. 사실 내 생각에 너무 좋은 사람이었던 나는 내 인생에서 성추행이나 따돌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 순간들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럴수도 있다고. 나도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을 겪을 수 있다고 나는 비로소 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