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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새댁 Nov 14. 2023

남편이 퇴사를 했다.(31) - 말, 김장, 구조조정

D+249일의 이야기

김장의 시즌이 다가왔다. 친정집에서 시골에서 가져온 배추로 우린 늘 해마다 김장을 하기에 역시나 남편에게도 김장 이야길 꺼냈다. 흔쾌히 "김장 하고 먹는 보쌈이 최고지~ 보쌈 먹으러 가야지~"라는 대답에 참 고마웠다. 친정에서 김장하고 2박 자는게 어디 쉬우랴.. 취직을 하는 상황과는 별개로 이건, 오빠가 직장이 있든 없는 간에 친정가서 김장하고 보쌈먹는다고 들뜬 모습이 참ㅋㅋ뭐랄까 고맙고 또 미안하고 또 왜 아직 직장을 못구하는 건지 짜증도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를 마지막으로 안아주며 엄마랑 아빠가 금요일에 미리 배추도 다 절여놔서 나랑 남편과 남동생은 사실 별로 할 것이 없었다. 야채 씻고 다듬고 배추 씻고 소를 섞는 일 뿐. 너무 엄마가 고생한 것 같아서 넘 고맙고 엄마 또 오겠다고 했더니 엄마의 말 한마디에 난 눈물을 쏟을 뻔했다. 어쩜 어른들은 다 아는지.. "○○이는 조금 더 기다려보자. 넘 조급해말아". 


집에 돌아오면 느끼는 감각은 현실이다. 어디를 가서 열심히 놀다오면 놀다 왔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집에만 오면, 이력서를 쓰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노라면, 같이 밥먹다가도 밥먹고 나면 이력서를 써야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지독한 현실이 다가왔다. 


몸이 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가야 몸이 간다. 6개월도 지났고 현실 속에만 오면 난 어김없이 차가워진다. 그러기 싫은데 정말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는 언니가 자기가 콩깍지 씌여서 눈 딱 감고 결혼할 것 같다고 하길래 언니에게 "아니, 눈 반쪽은 떠라" 라고 얘기했다. 결혼은 정말 현실. 


어제 자는데 남편이 내게 한 화면을 보여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뭔 얘긴가 하니 이전 직장의 대표가 직원들에게 쓴 구조조정 이야기였다. 이미 예견된 이야기라고하면서 다 짤리고 있다고 하더라. 근데 나는 별 생각이 안들었다. "그래서 뭐?" 8개월은 더 다녔을텐데.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퇴사하는 건 적어도 실업급여가 나온다. 100만원이 넘는^^. 나에게 여기는 이미 가라앉는 배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음 아니? 나에겐 가라앉는 배여도 월급이 지급되는 배였으므로 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구직시장이 많이 얼어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함부로 퇴사하면 안된다는 등등.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인과 잡코리아를 들어가본다. 채용공고는 그래도 많이 올라오는데 왜 내 남편이 들어갈 곳 하나 없는걸까. 마치 결혼할 때 집 마련했을 때처럼, 이렇게나 많은 집이 지어지는데 내가 터전을 마련할 곳 하나 없는걸 슬퍼한 것처럼. 남편에게 말은 못했지만, 내가 지금 '돈'에 많이 얽매여있다보니 주변에 이혼한 사람들을 보면 1% 부럽긴했다.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벌써 그냥 몇 번 쓰다 말했지 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퇴사를 했다' 는 31편째다. 나 올해는 정말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데...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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