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뮤지컬 <시카고>를 봤다. 역대급 극악의 티켓팅을 자랑하는 <시카고>지만, 뮤덕 회사 동료를 둔 덕에 1층 6열 정도의 황금 자리에서 최재림 & 정선아 페어로 관람했다. 쇼츠와 릴스에서 주구장창 보던 복화술 장면이나, 최재림의 홍학 퍼포먼스도 실물로 봤다. 소셜 플랫폼을 최근 2~3개월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이 눈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최재림의 “난 대학시절 묵찌빠를 전공했단 사실-” 멜로디와 함께. <시카고>와 <최재림>은 2분기 대한민국의 알고리즘을 점령했고, 이제는 인순이, 박칼린에 이어 허준호, 옥주현 등 출연진까지 줄줄이 소환 당하는 중이다.
한 5월쯤- 처음 최재림의 묵찌빠가 피드에 떴을 때는 으레 그렇듯 휙휙 넘기며 보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뒤로 한 대여섯번? 피드에 반복해서 올라오더니, 급기야는 복화술에서 봇물이 터졌다. 그쯤 되니까, ‘단순히 웃긴 쇼츠’에서 어느새 ‘재밌는 장면이 있는 뮤지컬 <시카고> ’로 인지가 됐다. 그러다 한 10번째인가? “비싼 자동차아앍!”하는 최재림의 절규와 함께 결심했다. ‘아, 이 뮤지컬 봐야하는 거구나.’ 6/18에 티켓팅 결심을 했으니, 첫 쇼츠로부터 약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TV 광고로 드라마 예고편을 띄우던 시절까지 갈 것도 없다. 네이버TV나 페이스북의 공식 예고편을 보고 캘린더에 첫방 날짜를 저장해두던 시절이 불과 5년 정도 됐다. 그 사이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나타나면서 콘텐츠 판도는 완전 달라졌다. 콘텐츠 소비 시간은 점점 늘고 있지만, 콘텐츠 개수는 그보다 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공식 예고편 하나로는 쉽사리 시청할 결심을 하지 않는다. 워낙 많은 콘텐츠를 보니 개별 콘텐츠에 대한 기억이나 인상이 강하지도 않거니와, 이제는 각종 경로를 통해 콘텐츠를 검증한다. 여기서 UGC가 마중물이 되는데, 커뮤니티 후기 하나로 시청을 결심하게도, 포기하게도 만드는 시대가 됐다.
닐슨미디어의 2022년 조사. 미국의 모든 세대가 콘텐츠 검색 및 시청 결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콘텐츠 회사의 마케터나 미디어 연구자들 모두 이런 시청자의 결심 과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뉴스레터, 연구논문, 미디어 컨퍼런스를 뒤져봐도 산업과 공급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뿐, 시청자의 세밀한 행동 패턴을 알아보려는 시도는 발견할 수가 없다. 실제 콘텐츠 마케터들과 이야기해도 UGC는 자연발생의 영역으로 여기며 공식 콘텐츠에 대한 기획을 더욱 강조한다. 아마도 업계 전체가 아래의 불문율을 준수하고 있는듯 하다. “콘텐츠가 재밌으면 시청자들은 알아서 찾아온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미 UGC를 통해 콘텐츠의 재미를 가늠하고 있다.
이번 글은, 몇가지 사례를 통해 소비자들의 시청 결심 경로를 추적해보려고 한다. 공식 예고편 뿐 아니라 커뮤니티 후기, X 게시글, 팬튜브 영상, 인스타그램 돋보기 등 시청자의 데일리 소비 패턴 속에서 하나의 콘텐츠가 어떻게 인지와 호감, 검증과 결심 과정을 거치는지 소비의 대동여지도를 그려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마케터라는 직업이 그 지도 상에서 매스 바이럴 포인트를 찝어내어 강화하거나, 느슨하고 헐거운 접점들을 더 쪼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해보려고 한다.
RPG 게임 맵에는 일부 영역이 검게 가려져 있는데, 이를 Fog of War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콘텐츠로 치면 시청자에 닿기까지의 경로가 안개 상태인 거라고 볼 수 있겠다.
[CASE STUDY 1 - 시카고] 쇼츠를 개많이 봤다가 뮤지컬 예매하고 영화 스트리밍 했다
최재림의 복화술 쇼츠는 나에게는 5월에 처음 떴지만, 영상은 이미 올해 2월에 올라갔고, 3월부터 슬슬 반응이 왔던 모양이다. 심지어 원본 영상은 8년 전 유튜브에 올라온 공연 기획사의 공식영상인데, 아래의 ‘일분뮤지컬’이라는 팬튜브에서 공을 쏘아 올리면서 역주행이 시작되었다.
각자 올해 2월, 올해 4월에 올라온 쇼츠다. 나도 많이 늦었다..!
쿠팡 파트너스 채널인가, 기획사 공식채널인가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정말 뮤덕 채널이었던 모양이다.
이 계정에서는 <시카고> 2024년 공연을 기념해 최재림의 복화술 쇼츠를 5월 14일에 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묵찌빠 아저씨에 이은 복화술 아저씨 최재림의 세계관과 함께 알고리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 이 뮤지컬의 화제성을 주목하는 기사들은 원본(?) 영상 하나가 600만 조회를 기록했다고 강조하는데,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다른 유트브 채널에 올라온 정말 엄청나게 많은 쇼츠와 릴스는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조회수를 집계할 엄두를 내지 못한 모양이다.
복화술 알고리즘. 하다하다 잔망루피도 패러디를 하고 있다.
<시카고>는 쇼츠와 릴스에 임팩트 있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반복 노출하다보니 소비자들이 시청을, 아니 관람을 결심했던 대표적인 케이스다. 심지어는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 존스 주연의 2004년 영화마저 갑자기 역주행하기 시작하는 부산물이 있었다. 실제로 <시카고> 관련한 커뮤니티 게시글을 찾아보면, 대부분의 시청 경로는 ‘쇼츠가 계속 많이 떴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쇼츠들의 95%는 최재림의 복화술 혹은 정선아의 All That Jazz 넘버다. 우리는 하루 평균 몇 건의 쇼츠를 볼까? 기억도 못할 정도겠지만, <시카고> 쇼츠는 콘텐츠의 홍수를 뚫고 시청자의 머릿속에 각인 시켜버릴 만큼 다양한 채널에서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올렸다. 한마디로, 알고리즘을 점령했다.
원래의 뮤덕들은 <시카고>가 복화술 뮤지컬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며 통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동시에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공연기획사의 바이럴 마케팅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며 해명(?)하는 뮤지컬 릴스 계정에 따르면, “뮤지컬 덕후들이 숏폼 공장을 가동”한 것이라며, “뮤지컬이 전국적인 밈이 되는게 팬으로서 너무 기뻐서” 그랬다고 한다.
유명한 뮤지컬 릴스 계정 saymulab. 얼마전 기나긴 해명글을 올렸다.
[CASE STUDY 2 - 피지컬:100] 공식 소스로 인지한 후, UGC로 결심한다
CJ ENM의 뉴스레터 ‘:D레터’에서는 <피지컬:100> 시즌1의 시청 경로를 10~40세 각 세대별로 리서치하여 정리한 적이 있다. 이번 케이스는 그 글을 발췌하여 소개해보려고 한다. :D레터의 분석에 따르면, <피지컬:100>은 공개일에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여타 넷플릭스 오리지널과 달리, 런칭 2주차부터 소비자의 입소문을 타고 신규 시청자가 유입되며 랭킹을 유지했다고 한다.
:D레터에 따르면 <피지컬:100>은 2주차에 타 콘텐츠에 밀려 떨어지는 대신, 시청자의 입소문과 함께 화제성을 유지했다.
화제가 되는 콘텐츠일수록 시청 경로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한데, :D레터에서 분석한 10~40대 시청자별 시청 경로 역시 인스타그램 숏폼, 출연자 개인 계정, 운동 커뮤니티, 심지어 분석 기사 등 무척 개인화 되어 있는 편이다. 다만 그 와중에 일련의 패턴을 짚어 내자면, 디지털/오프라인에 걸친 공식 소재에 처음 노출되며 콘텐츠를 인지하지만, 그것이 바로 시청할 결심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노출부터 시청할 결심에 이르기까지 2~3단계의 추가 노출을 통한 흥미도 제고 과정을 거치는데, 그 중간 단계는 출연자 계정 혹은 커뮤니티/쇼츠 등의 UGC의 영향이 대부분이다.
:D레터의 분석에 따르면, “프로그램의 인지는 공식 온/오프라인 마케팅을 통해 이뤄”지지만, “인지를 넘어서 시청을 결심하게 되는 건 누군가의 추천이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한다. “특히 <피지컬: 100> 같은 프로그램은 특정 타깃 (운동인/헬스인)이 아니면 인지 단계에서 멈출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다음 단계로 보내주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소비자들의 긍정 언급과 추천”이라고 강조했다. 보통 UGC 마케팅의 최대효과를 진정성 있는 콘텐츠 확보라고 하는데, 제품이나 장소 후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콘텐츠에 대한 후기, 즉 UGC도 진정성의 측면에서는 다를 것이 없으며,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시간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재의 시청자들이 콘텐츠를 시청할지 결심하게 만드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CASE STUDY 3] 페북 글에서 시작된 정치 드라마 시청 여정
마지막으로는,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돌풍>을 보다가 <지정생존자>까지 와버린 나의 개인적인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케이스를 갖고 온 이유는, 1번과 2번이 쇼츠와 인스타그램 등 영상 콘텐츠에 집중되어 소비가 일어난 것과 달리, 특수하게 페이스북과 텍스트 콘텐츠 중심으로 시청할 결심에 대한 판단과 2차 소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디지털 콘텐츠를 언급할 때 릴스, 틱톡 등의 영상 콘텐츠에 한정하여 인식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 허점을 짚어 내고 디지털 마케팅이 트위터, 페이스북, 브런치 중심의 텍스트 플랫폼도 눈여겨 봐야한다는 근거로서 이 사례를 활용코자 한다.
<돌풍>을 처음 접한 것은 공식 소재가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의 포스트에 6월 30일경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기자답게 <돌풍>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 주를 이루었는데, "신념에 잠식된 괴물을 그려내려한 감독의 의도” “배우 연기가 아까운 드라마” “신념과 욕망의 충돌” 키워드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시청할 결심을 유보하고 있었는데, 글 하나 가지고는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음날 7월 1일경 페이스북에서 또다른 사람의 <돌풍> 리뷰를 발견했고, 그때 시청을 결심했다. 그주 금요일인 7월 5일 저녁에 침대에 누워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총 12부작짜리 드라마를 3일 만에 끝냈다.
이정환 기자의 페이스북 게시글. 슬로우뉴스가 아주 퀄리티 높다. 추천한다.
나는 콘텐츠를 시청한 후에도 다른 사람의 분석이나 감상평 등을 2차 소비 한다. 여느때처럼 트위터와 유튜브, 구글부터 뒤지기 시작했는데, 넷플릭스 공식 채널에 올라온 김희애와 설경구 배우의 토크 콘텐츠 <홍보하러 왔다가>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정환 기자가 언급한 감독 인터뷰 기사가 생각나서 찾아보았고, 한겨레에서 <돌풍>이 한국 정치사의 주요 장면을 오마주했다고 분석한 기사를 흥미롭게 소비했다. 내가 2차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사람이었다면, 설경구와 김희애의 연기 대결보다는, 이번에는 <돌풍> 속 한국 정치사 오마주 장면을 정리해서 올렸을 것 같다. 결국 정덕의 심장은 아무래도 이런 것에서 혹하니까.
그러다 출근한 7/8 월요일에 오싹하게도 넷플릭스 트위터에 노출되었는데, 주제는 <돌풍>을 재밌게 본 사람이 좋아할만한 넷플릭스의 또다른 정치 드라마였다. 그 중 <60일, 지정생존자> (2019, tvN)가 있었고, 결국 2주 뒤 7/23 오전에 출근하며 보기 시작했다. 어젯밤 그러니까 7/27에 16부작을 끝냈고, 미드 <지정생존자>를 시작해버렸다. 재밌는 점은 이 3개의 드라마를 연달아 보는 동안, 평소에 끼고 사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을 전혀 찾아보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분석 기사와 브런치, 블로그를 중심으로 봤는데, 특정 장면에 대한 소비보다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리뷰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보좌관도 내 보석함에 넣어뒀다.
글을 마무리하며 -
미국의 다수 미디어 리서치 기관에 따르면, 현재의 10대는 여러가지 미디어 콘텐츠 중 ‘사용자가 만든 콘텐츠’, 즉 UGC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볼 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데,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콘텐츠 수량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Z세대의 시청 패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딘가에서 썼던 보고 자료가 갑자기 생각났다.
예고편 하나만 나와도 극장가로 몰리던 예전과 달리, 이제 시청자들은 그 어느때보다 신중하다. 그리고 마케터들은 이들의 신중함을 이해하고 끈질기게 쫓아다녀야 한다. 동시에, 공식 콘텐츠에 대한 기획 만큼이나 UGC의 생성을 유도하고 그 흐름을 창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콘텐츠에 대한 인지만 시켜놓고 끝나버리는, 소위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