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런 적이 있다. 다 깨달은 듯,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오만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했을 때 얼굴이 빨갛게 될 정도로 당당하고 말갛게 굴었던 적이 있다. 주저하는 어른들이 바보같아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른이 된 것만 같아서 목소리를 키웠던 적이 있다. 그 때는 답이 있는데도 모두 함께 손을 잡고 합죽이를 하는 줄 알았다. 순진함으로 무장한 잣대로는,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말이 모두 변명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되었다. 글도, 말도, 주저하게 되었다. 거침없이 나오던 솔직한 소견이 몸을 사리게 되었고 서두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 순간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편안해졌고 또 순간순간 귀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생각과 판단을 쉬이 하지 않게 되었다. 망설이는 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건 내가 그리 느낀 순간은 내 말수가 줄어들었을 때일 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말에 책임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 말에 책임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어렵다. 겸손하기 어렵다. 사실 어제는 당연하고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겸손은 어렵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못하는 것은 헤엄하는 유체 앞 수중의 기포를 모두 터뜨리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순간이 더욱이 쌓여나갈 갓이다. 또한 내가 선택한 침묵에게 사유가 생겨 약속과 함께 말을 아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겸손을 배운다.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안다. 나의 아이러니한 선택들이 다시 나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어떤 가정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문득 궁금했다.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커다란 존재가 나의 앞으로를 관장하고 나를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궁극에 어디에 도달할지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훼까닥 발을 헛디디면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기 딱 좋은 이 지점에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이 있나. 개중에 하나가 그 “존재” 의 존재를 상정하며 발버둥치는 것이리라. 어떤 운명이 나를 이끌 것임을 가정하되 나는 주어진 최선을 다힌다는 것이 조금은, 아니 솔직히는 아주 많이 요상하지만 겸손한 결론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한다. 큰 운명이 있고, 나는 그 운명을 걸어가는 작은 별이다. 그렇게 겸손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