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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끼 Jul 25. 2023

04. 자기관리

달리기로 느끼는 꾸준함의 무게

이건 '어느 과식한 날의 일기'라고나 할까, 그닥 특별하지 않은 하루의 기록이다. 나에게 자기관리란 그런 의미다. 오늘처럼 과식을 해도, 애인과 다투어 기분이 좋지 않아도, 축하할 일이 있어도,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냥 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대단한 것을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일'도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면 그렇게 대단해진다.


https://pin.it/6XD7cix


서문

여름방학의 대학생은 느슨한 일정을 보낸다. 약간의 권태감이 느껴지는 이 시간을, 적당한 '뭐 먹고 살지'의 초조함과 함께 보낸다. 여느 대학생 처럼 나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붕 뜬 마음으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종강을 하고 7월의 첫주를 맞아 나는 스물셋 특유의 고민들과 습한 여름 날씨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여름을 보내자 싶을 때쯤 갑자기 여름 내내 딱 한 가지만 지켜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지금의 달리기다.


나는 욕심이 많고 성격이 급한 편이라 꾸준함의 중요성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어떤 도전들은 마무리 짓지 못하기도 했고, 어떤 시도들은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했다. 그래서 여름의 자기관리 항목으로는 딱 한 가지만 지키기로 했다. 어떤 주를 보내고, 어떤 날들을 보내는지는 나에게 맡기자, 하지만 어떻게 되든간에 일주일에 4일은 꼭 달려야겠다. 오늘은 중간점검의 날이다. 꾸준함이 나에게 선물한 작은 열매에 대해 기록해보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 기록은 두 달간의 여름 달리기를 마무리한 후, 한 달 뒤에 해보려고 한다.






루틴

집을 나서 돌계단을 따라 천변으로 내려오면 물냄새가 난다. 비가 온 날의 다음날이면 흙냄새도 섞여 있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하루에 하루를 걸쳐 뛰게 되면 약간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취향도 생긴다. 나는 우리 집을 등지고 서면, 왼쪽 길보다는 오른쪽 길로 뛰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 판판한 보도보다는 약간 거친 아스팔트가 좋다. 발목을 덮는 양말보다는 복숭아 뼈가 나오는 짧은 양말이 좋다.


런닝을 할 때는 보조앱을 사용하는데, 목소리 좋은(?) 녹음 음성이 목표도 설정해주고 페이스도 조절해준다. 고맙기도 하지 본격적으로 뛰기 전 가볍게 몸을 풀어주며 걷는다. 오른쪽 길로 달리기 위해 팔을 쭉쭉 늘려주며 다리를 건넌다. 이제 제법 길이 든 신발과 함께 뛸 준비를 마친다. 음악의 음량이 줄어들고 달리기를 알리는 신호가 들린다. 하늘로 두 번 콩콩 뛰어주고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나의 취향이 담긴 루틴이다.



7월 24일

머리 끝이 어깨 위를 시계추처럼 훑고 지나간다.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면서 내 호흡과 페이스를 맞춘다. 하나, 둘, 하나, 둘...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면서 정면을 응시한다. 그러다 가끔씩 땅을 봐줘야 하는데,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지렁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지구에 그렇게 좋다던데... 나오지 말고 다들 흙으로 들어가렴.


... 혹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알려주길. 잡생각을 하지 않고 뛰기란 나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초반에는 지렁이 생각(?)이나 내일 아침메뉴와 같은 잡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고 하더라도 후반에는 나와의 대화만 남기 때문이다.


서서히 기관지부터 폐에 이르기까지, 나의 호흡기관 전체를 숯불에 올리는 느낌이 난다. 들숨과 날숨이 내 목을 지나면서 몸 안을 뜨끈한 수증기로 채운다. 습한 날씨 탓에 들숨과 날숨이 모두 물을 머금어 몸 안이 산뜻해지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음악은 최대한 신이 나는 것으로, 박자가 빠르고 시끄러운 것으로 한다. 음악이 전환되는 순간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는 나를 강하게 만든다. 다시 전주가 들리면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 뛰는 듯' 굴어야 한다. 어쩌다 노래가 신이 나면 그게 통하기 때문이다.



아드레날린

헤드셋의 목소리가 중간지점을 알리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곳에, 도달한 “나”를 발견한다. (“나”가 많다. 이 순간엔 “나”가 제3자가 된 듯한 이질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베스트 컨디션일 때도 이곳까지 달려온 적은 없었다. 사실이 피부로 느껴지자 호흡이 흐뜨러진다. 달뜬 마음에 웃음이 난다. 이게 성장이라는 걸까? 꾸준함의 힘은 이런 것을 말하는 거 아닐까? 지금이라면 성격이 급한 나라도 Step by Step이라는 컨셉트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힘이 들지 않는다. 더 뛸 수 있을 것도 같다.


... 그 사망 플래그라고 하나? 쉬이 해서는 안될 말이다. 신나서 빨리 뛰어버린 나는 돌아오는 길에 지옥을 경험한다. 음악을 뚫고 '오버페이스 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빨리 말해주지 그랬니 가빠오는 숨이 나에게 겸손을 일깨운다. “나대지 말도록” 네.


들숨과 날숨이 경쟁하듯 내 몸을 가쁘게 채운다. 여기서 멈추면 지금의 나는 지옥에서 벗어나겠지만, 30분 후의 내 마음은 지옥일거야. 나한테 지지 마. 나는 이를 악 문다. 그리고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떨어낸다. 페이스를 되찾아가기 위해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쓴다. 규칙성을 찾아가는 숨소리가 몸을 울린다. 자꾸만 땅으로 떨어지려는 시선은 휘어 잡아 끌어다 올린다.



중간점검

도착지점에 달하는 순간 내가 무엇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삑 소리에 맞추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얼굴을 따라 흐르는 물을 훔친다. 이게 다 내 땀인가? 기록으로 확인하니 처음으로 5km를 쉬지 않고 뛰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월의 둘째 주부터 나는 딱 한 가지만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단 한 가지가 나의 흔들리지 않는 몸과 마음의 체력이 되어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쿨다운 시간에는 역설적으로 가장 뜨거워지는 몸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성장이나 발전, 인내... 여러 말들을 써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내가 견뎌낸 꾸준함이 가져온 변화의 무게를 실감한다.


올 여름 나는 앞으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더 뛰어야 한다. 장마를 지나, 작열하는 태양을 넘어, 가을을 맞이하는 내가 어떤 무게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지가 궁금하다. 엄청나게 대단한 것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천변을 달리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일'도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면 그렇게 대단해진다. 이건 '어느 과식한 날의 일기'라고나 할까, 그닥 특별하지 않은 하루의 기록이다. 나에게 자기관리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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