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티호 마데이라 와인 밀수사건, 미국 독립혁명에 불씨를 댕기다 -
밀수꾼 왕초에서 미국독립선언서 최초 서명자로
<핸콕>이란 영화가 있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미국 영화로 슈퍼 히어로로 나오는 주인공(윌 스미스 분)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다. 그에게 간호사가 서류를 내밀며 하는 말. ‘Put your John Hancock on this paper(이 서류에 사인하세요).’ 자기 이름을 기억 못 하는 주인공은 서명란에 ‘존 핸콕’이라고 적는다. 제목이 그래서 <핸콕>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John Hancock’ 이란 말은 지금도 영어로 ‘자필 서명(handwritten sign)’이란 관용구로 쓰인다. 이 말은 존 핸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대륙회의 의장이었던 핸콕은 누구보다 강경하게 독립을 주장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다른 대의원들은 8월 2일에야 서명했다. 56명의 서명자 중에서 핸콕의 이름이 가운데에 크게 적혀 있었으므로 나중에 서명하는 대의원들은 나머지 여백에 겨우 이름을 써야 했다.
일설에 의하면, 핸콕이 서명을 일부러 크게 한 것은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돋보기 없이도 자신의 서명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대영제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행위로 교수형 감이었다. 핸콕의 이름이 ‘자필 서명’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 데에는 미국독립선언서의 용감한 첫 서명자였기에 존경의 의미로 이런 관용어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핸콕은 밀수꾼에서 후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마데이라 와인 밀수 사건
영국은 18세기 중반까지는 식민지 미국 무역업자들의 밀수 행위를 대체로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밀수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식민지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실하게 얻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리적인 면에서도 밀수는 영국에 남는 장사였다. 밀수로 번 돈으로 영국산 사치품을 대량 구매했던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고 나서 60년 동안의 이 시기가 미국의 밀수 황금시대였다.
수십 년 동안 밀수를 묵인하던 영국은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63)과 칠 년 전쟁(1756~63)이 끝날 즈음엔 태도를 바꿔 단속에 나섰다. 그러자 식민지 무역업자들은 불만을 품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보스턴에서 가장 부유한 무역업자인 존 핸콕(1737~93)이 세관의 선박 조사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1768년 4월 7일 세관원들이 자신이 소유한 리디아호에 승선하자 핸콕은 선장에게 명령하여 갑판 아래 화물칸 수색을 못하도록 했다. 영국 식민지 정부의 세관과 무역업자들 간의 이러한 긴장된 대치 국면 속에서 한 와인 밀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1763년) 당시 지도
이 사건이 미국 독립혁명을 촉발시킨 유명한 리버티호 마데이라 와인 밀수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성난 군중이 선박을 압류한 세관에 몰려와 항의하며 난동을 부렸다. 세관장은 압류 선박이 탈취당할까 봐 리버티호를 영국 군함 옆에 정박시켰다. 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오자 세관장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리버티호를 지키던 영국 군함 롬니호를 타고 해군 요새로 피신해야만 했다.
분노의 표적이 된 세관
1767년 11월 영국에서 새로 부임한 세관장들은 현지의 격앙된 분위기에 놀라 영국 정부가 식민지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관세를 제대로 거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미움을 받던 찰스 팩스턴 이란 세관장은 주민들한테 붙잡혀 고문을 당할뻔하다가 여장을 하고는 뒷문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여러 명의 세관장들이 군중에게 쫓겨 도시를 탈출하거나 영국군의 경호를 받으면서 배편으로 달아났다. 밀수품 압수 과정에서도 세관원과 주민들 간에 곳곳에서 집단 충돌이 벌어졌다. 1769년 세일럼에서는 밀수단속 중인 한 세관원이 뇌물을 거부하고 압수를 고집하자 주민들이 고문을 가하고 마차에 묶어 온 동네를 끌고 다녔다. 같은 해 프로비던스의 한 세관원도 “공무집행 중에 붙잡혀 재갈을 물리고 옷을 모두 찢어발긴 채 두들겨 맞고 손수레에 실려 가야만 했다.” 이같이 당시 세관원에 대한 폭행과 린치는 흔치 않게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기 10여 년 전부터 폭동, 세관선 방화, 세관원과 정보원에 대한 폭행이 잇따랐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영국정부의 밀수 금지 조치로 인한 세관의 밀수 단속이 식민지 미국 사람들을 격앙시켰기 때문이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영국 국왕이 “새로운 관청을 수없이 세우고 여기에 수많은 관리를 보내서 민중을 괴롭히고 돈을 뜯었다”라고 비난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세관원의 행태를 지적한 내용이다. 이때 세관의 가택수색 영장만큼 반발과 증오를 부른 것도 없었다. 밀수품을 재량껏 수색할 수 있도록 무제한 수색권을 세관원에게 특별히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관원들은 밀수품 압수 실적에 따라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 식민지 무역업자들은 가뜩이나 금수 조치로 힘든 상황인데 세관원들까지 돈 욕심에 설쳐대니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밀수꾼을 등쳐먹는 세관원들이 법의 탈을 쓴 해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밀수 단속이 강화될수록 영국 왕실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는 세관으로 향했다
밀수에서 혁명으로
리버티호의 선주인 존 핸콕은 와인 밀수입 죄로 기소되었다. 6개월에 걸친 핸콕의 재판은 영국이나 식민지인들에게 모두 초미의 관심거리였다. 영국은 이 뻣뻣한 인사가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야만 정부의 권위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세관의 무리한 수사로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았으므로 영국 정부는 결국 소송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식민지 전역의 미국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영국으로선 낭패였지만 이 사건으로 명성을 얻은 핸콕은 식민지인들의 영웅이 됐다.
media, Seoul
존 핸콕의 초상 Portrait de John Hancock (1737-1793)
존 핸콕(John Hancock, 1737년 1월 23일 - 1793년 10월 8일)은 미국의 정치가이다. 제2차 대륙회의 및 연합회의의 의장을 맡아 매사추세츠 주의 첫 주지사가 되었다. 미국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사람이다.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군 요새에 피신해 있던 세관장들이 업무에 복귀하려면 강력한 경호가 필요하다고 본국에 보고하자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군대 파견은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영국군이 미국 땅을 밟자 미국인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결국 일 년 반 뒤, 이때 파견된 영국군 연대에 의해 보스턴 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리버티호 와인 밀수사건이 미국독립혁명에 불을 댕긴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핸콕은 영국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후에 대륙회의 의장이 된 핸콕은 누구보다 강경하게 독립을 주장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사람도 존 핸콕이다. 이후 핸콕과 같은 무역업자들은 밀수 단속에 반발해 건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다. 한 와인 밀수사건이 미국 독립혁명을 촉발시킨 것이다.
밀수단속에 불만 폭발, 결국 독립혁명의 불씨로
1764년 설탕법, 1765년 인지세법 등 영국 정부의 과세 강화 조치는 식민지 거주민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여기에다 영국이 그동안 용인해 주던 밀수단속을 시작하자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영국이 단속을 강화한 데에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인디언 부족들을 각기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싸운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63)과 칠 년 전쟁(1756~63)의 여파가 컸다. 특히 칠 년 전쟁은 윈스턴 처칠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유럽뿐만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까지 식민지를 놓고 유럽 열강 간에 벌어진 큰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인한 재정 지출로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전비를 식민지 미국에서 거둬들이는 관세 수입으로 메우려 했다. 영국 본국에서 식민지 정부의 세관에 강력한 밀수 단속령이 떨어지고 세관원들도 영국 본토 인원으로 대폭 교체되었다. 그동안 뒷돈을 주고받으며 서로 잘 지내던 밀무역 업자와 세관원들의 공생 관계도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영국의 정책 변화는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1769년 리버티호에 대한 방화,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 1773년 보스턴 차사건(티파티 사건)을 촉발시켰다. 이때 일어난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해 흔히들 서민 소비자들이 애국심으로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세금에 대한 저항으로 기억하지만 사실은 세금 부담보다는 밀수 이익이 더 중요한 배경이었다.
당시 영국은 파산 직전의 동인도 회사를 구하기 위해 1773년 차조례(Tea Act)를 제정하여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에 들어가는 동인도 회사 제품의 차에 대해서는 관세 부과를 철폐했다. 이 차조례 덕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밀무역 업자가 취급하는 홍차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네덜란드와 차 밀수로 막대한 이익을 얻던 핸콕 같은 식민지 밀무역 업자들은 앉아서 망하게 될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핸콕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하수인들을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시켜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의 배 3척이 보스턴 항에 들어왔을 때 이들의 타깃이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보스턴 차사건은 소박한 애국 시민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부유한 밀수꾼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식민지의 부유한 상인들은 마데이라 와인과 같은 인기 상품을 밀수를 통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이런 와중에 터진 1768년 리버티호 마데이라 와인 밀수 사건과 5년 후인 1773년 일어난 보스턴 차사건은 미국 독립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두 사건 모두 밀수와 밀접히 관련돼 있었던 것이다.
미국독립혁명, 부유한 밀무역 업자들이 일으킨 반란
“군주가 시민과 백성의 재산과 그들의 부녀자를 넘보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를 성취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군주는 타인의 재산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자기 재산을 빼앗긴 것을 더 못 잊기 때문이다.”
-《군주론》 17장 마키아벨리 -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피해야 할 덕목의 하나로 백성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을 꼽았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꿰뚫고 있다. 영국은 식민지 미국인들의 재산에 손을 대다 독립운동을 촉발시켜 결국은 식민지를 잃었다.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마키아벨리의 경구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다. 1776 성난 군중들이 뉴욕 맨해튼 볼링 그린 공원에 세워진 자신의 기마상을 녹여 독립전쟁에 쓸 탄환 4만 2000발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영국은 식민지 사람들이 그동안 용인되던 밀수로 얻던 이익을 빼앗으려 했다. 이는 결국 식민지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식민지 미국을 잃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다. 대영제국이 식민지 미국에 밀수 금지 조치를 내리는 대신 관용 정책을 계속 펼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미국은 독립혁명을 일으켰을까? 미국 독립혁명이 겉으로는 자유 수호와 정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근원에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미국 독립혁명에서 내세운 자유란 결국 밀수할 자유였다. 미국 독립혁명은 식민지 사람들이 밀수로 얻는 이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벌인 혁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 독립혁명은 영국의 밀수단속에 격분한 식민지 미국의 부유한 밀무역 업자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마데이라 와인, 세계 최초 FTA 무역상품
리버티호 밀수사건으로 미국 독립혁명을 촉발시킨 마데이라 와인이 식민지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과 관련이 깊다. 유럽 왕가의 가계는 그들끼리의 빈번한 정략결혼으로 가까운 친족관계로 맺어지는 일이 많았다. 스페인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유럽의 왕가들은 서로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전쟁까지 벌였다. 이 전쟁에서 열강은 해상무역의 이익, 특히 신대륙 무역 확보라는 전략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각각 맹주로 삼아 동맹을 맺고 편을 갈라 싸웠다. 이때 영국이 포르투갈을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1703년 맺은 협정이 메수엔 조약 (Metheun Treaty)이다.
프랑스를 지지하던 포르투갈은 이 조약으로 영국 편으로 돌아섰다. 영국은 그 대가로 포르투갈 산 와인에 대해 경쟁국인 프랑스산 보다 1/3 이하의 특혜관세를 적용해 주기로 했다. 영국은 적대국 프랑스산 와인의 미국 수출을 막으려 애썼다. 프랑스산 와인과 경쟁관계에 있던 포르투갈산 마데이라 와인에 관세 특혜를 주면서까지 식민지 미국 시장에 수입을 적극 장려한 이유다. 핸콕의 마데이라 밀수 사건이 일어나기 6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마데이라 와인은 식민지 미국 시장에서 큰 수출 경쟁력을 갖게 된다. 특이한 향으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포트와인도 메수엔 조약 이후로 영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메수엔 조약이 군사동맹 성격도 있지만 영국산 양모와 포르투갈산 와인에 대해 서로 무관세 ·낮은 관세율을 적용한다는 상호 특혜관세 조항을 두고 있어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메수엔 조약으로 마데이라 와인은 영국의 식민지 북아프리카와 미국에서 관세 특혜까지 누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후에 미국 독립혁명의 상징이 된 마데이라 와인은 이렇게 국제무역에서 세계 최초의 FTA 무역상품이 됐다.
미국독립혁명의 상징, 마데이라 와인
밀수라는 관점에서 미국독립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교역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마데이라 와인을 들 수 있다. 이 특별한 와인의 탄생지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가 1420년 곤살레스 선장을 보내 발견한 대서양에 있는 마데이라 섬이다. 그는 지중해에서 사탕수수와 포도나무를 가져다 이곳에 심게 했다. 이렇게 해서 축구 스타 호날두의 고향이기도 한 이 섬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마데이라 와인은 17세기부터 이 섬의 주력 수출품이었던 설탕을 대신해서 포르투갈의 새로운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마데이라 와인의 수출이 늘면서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났다. 운송 중 적도 부근을 오랜 기간 항해하다 보니 와인이 고온으로 쉽게 발효되어 식초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랜 고심 끝에 와인 생산업자들은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 알코올을 마데이라 와인에 혼합하면 와인의 알코올 성분을 강화하면서 상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새로 개발한 방법인 알코올 첨가는 와인의 독특한 맛을 변질시키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 난제는 18세기 중반부터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만을 마데이라 와인에 첨가함으로써 해결했다. 여기에 기막힌 우연이 겹쳐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따랐다. 어느 날 항해를 끝낸 한 선원이 배에 실었던 마데이라 와인을 마시고는 그 절묘한 맛에 깜짝 놀랐다. 고온과 오랜 행해 중 배의 흔들림이 만들어낸 독특한 맛이었다. 습하고 더운 선창 안에서 숙성되어 좋은 향이 나는 와인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주정 강화 마데이라 와인은 유럽에서 생산되는 와인보다 도수가 높고 풍미가 독특하여 인기가 높았다. 결국 적도의 뜨거운 태양과 흔들리는 파도에 포도주 장인들의 집념이 더해져 명품 마데이라 와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마데이라 와인이 다시 한번 국제무역에서 교역 상품으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영국이 포르투갈과 맺은 메수엔 조약에 의해서였다. 이 조약으로 관세 특혜를 누리며 미국 시장에 진출한 마데이라 와인은 곧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나중에는 밀수품으로도 인기리에 팔려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리버티호의 마데이라 와인 밀수 사건은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미국독립혁명을 촉발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미국에 처음 소개했던 마데이라 와인이 결국 그들의 식민 지배를 끝장내는 순간의 상징물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축배로 마데이라 와인을 들었다.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취임식 때 마데이라 와인을 축배 와인으로 썼다. 마데이라 와인이 미국독립혁명의 성취를 알리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에 의해 발견된 마데이라 섬에서 탄생한 마데이라 와인은 식민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를 추동하는 국제 교역상품으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몇 백 년 후에는 다시 한번 리버티호 밀수사건으로 미국독립혁명이라는 역사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는 주인공이 되었다.
참고 자료
- 밀수꾼의 나라 미국, 피터 안드레아스 글 항아리 2015
- 밀수 이야기, 사이먼 하비 예문아카이브 2016
- 해양사의 명장면, 박원용 외 산지니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