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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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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놀이로서 상상을 발산한다지만, 진정 상상이 필요할 적은 특별히 위험 아래서다. 요컨대 상상의 일차적 '기능'은 저 (생물학적) 위험을 예견하는 일이며, 그렇게 촉발된 상상이 추론으로 제대로 발달하기 시작하는 건 근본적인 불안을 직면하면서부터이고, 그렇게 망상(발산된 상상)을 억제하는 방식조차 종종 과잉 불안에 대한 조치로서 추론(가공되어 수렴된 상상)이 거꾸로 침착함을 종용하도록 작동해서이지 않던가. 어쨌거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효과를 담보하는 건 필연성뿐이므로.
그처럼 우리는 상상을 통해 지각에 '주의'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험하게 할지도 모를 사물들을 우선 '주의'하고, 이후 나머지 것들 중에서도 무언가를 표지하는 지표에 또한 '주의'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이고 저것은 길이며 그것은 무슨 의미다 등으로. 따라서 그게 '위험'을 품든, 다른 '관념'을 품든 방금 지각의 '대상'이었던 과녁은 다시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상징'으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지각하며 해석하는바, 그 매개가 되는 대상은 '절대적 대상'인 동시에 우리 관념적 우선순위를 따라 우리 주의력이 배분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때마다 '순위 매겨진 대상'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선 물리적 '필연성' 사이에서, 다음으로는 관념적 '필연성' 사이에서 '상상'을 사용한다. 그렇게 상상은 그게 언제건 '추론'이 될 씨앗을 품고 있다.
기호는 그러한 추론(필연성)의 부산물이다. 추론(상상) 자체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의 분출을 통해 이차적으로 상상되는 '발산적 상징'이 아니라 상상의 태생부터 품고 있었던 일차적 현실의 유효성을 축으로 재차 가공된 '기호'가 필요할 터다. 추론은 '기호'를 그러모은다. 그러한 기호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이전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산물들이다. 요컨대 어떤 감동을 구현하기 위해 자기 내면을 '추론'하여 작품에 다다르듯이.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둔 기호들과, 타인들이 만들어 둔 기호들과, 문명이 이룩한 표준 기호들과, 관례로 통용되는 세례의 기호들 등, 무수한 기호들 틈에서 이를테면 한 가지 대상에 결부된 다각적인 필연성을 프리즘처럼 발견하기도 한다. 면밀한 층위의 기호들은 그 나름의 필연성을 품고 있고, 이는 유효성으로 도약하기 직전의 일종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이제 이런 기호가 현실로부터 유효성을 검증받는 과정은, 기호 너머로 타자(가령 우리가 때마다 도용해야 하는 기호 배후의 '저자'는, 비록 언젠가의 우리 자신이었더라도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타자'다)가 부여한 의미를 (설령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포착하(고자 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에 다름 아니리라. 이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그러니까 그 순간 임의로 설정된 '자의적 상징'이 '가공된 기호'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상징 자체에서 자의적 의미를 분리해 타자와 자신의 관념 세계를 자기 안에서 다시 하나의 도식(구조)으로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일 터다. 나아가 그러한 기호는 당 상징에서 자의적 의미를 비운 후 타자가 이미 거기에 달리 부여한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능력 자체이며, 고로 이 과정에서 기호는 감상적 대상에서 도식적 지도의 단서로 전환된다. 비록 그게 감상 그 자체에 대한 도식일지라도, 거기서 단서를 추출하고 사용하는 정신의 기능적 주체는 '추론'이다.
우리는 이 추론의 도식 능력 발달 위에서만 의사소통한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위해 추론을 더욱 발달시키고, 의사소통은 우리의 추론을 더욱 연마하고 추동한다. 요컨대 추론 능력의 발달을 거부한 비대한 자아가 그 자신의 비대함을 설명하고자 그토록 애를 쓰더라도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설명 그 자체가 이미 추론을 담보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설명에 실패한 예의 '자의적 의미'들은 이를테면 응석의 기호로 남는다.
예컨대 다각적인 추론의 축에서 다형적 해석을, 그리하여 다수의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예술 작품이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유효한 방식이 있다. 처음 작품 그 자체에 기획되고 부여된 '자의적 의미'가 자기 '본질'에 대해 열심히 주장하는 동안, 한편 그게 창조되고 유통되는 사회적 맥락이 부여한 '의미'는 이미 사용되고 있던 사회적 '기호'를 작품 내부로 수집하여 새로운 기호를 창안하기도 한다. 그 이후에야, 최초에 기획되어 주장되었던 '자의적 의미' 또한 하나의 연출된 상징으로서 작품이 가진 다수 기호 중 일부인 하나의 기호로 남겨질 수 있다. 더하여 그 저자인 예술가 자신이 자기 작품에 대해 단 하나의 해석만 원하고 미묘한 여타의 해석에는 치를 떠는 '연출된 태도' 또한, 혹 그게 사실 그가 유년기 어느 시점부터 추론의 발달을 거부한 결과로서의 '필연’적인 ‘태도'에 불과하더라도, 이 태도 자체도 해당 작품이 담보하는 필연의 프리즘에 속하는 일종의 '기호'가 되어 다각적인 해석 가능성 중 일부가 된다.
그렇게 온갖 기호들이 새로운 유효성을 위해 조작하는 건 다시 '주의력'의 행방이다. 그리하여 저 주의력의 어떤 강도와 비율이 마침내 기억이나 감정, 물질 등 무엇을 향하든지, 새로운 주의력의 도식은 다시 기호를 창안하곤 한다.
고로 우리네 주의력이 한 곳에 고착되지 않는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자의적 의미를 필연의 프리즘으로 가공하여 예의 추론의 도식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 자체가 저 끊임없는 가공의 열매로서 우리 정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가지는 일종의 시행착오일 수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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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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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사용은 이미 본래적인 의미와 덧붙여진 의미를 구분한다. 이를테면 사회가 다수결의 권력으로, 혹은 국문학자의 권위로 구분해 놓은 사전적 의미 위에 은유를 통해 예외적인 의미가 덧붙는다. 은유는 용법의 본래적인 의미를 가정할지언정, 해당 본래적인 의미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 효과를 창출한다. 은유는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나아가며, 그렇게 다다른 '다른 의미'가 사회적 인정에 의해 다시 사전적 의미가 되었을 때, 그때 이미 은유는 은유가 아니게 된다. 은유는 유통되지 않은 방향으로 유통하는 것을 그 기능으로 한다.
메타포 또한 기존의 상징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자리하는 장소에 그 의의를 갖는다. 메타포는 하나의 쓰임으로부터 다른 쓰임을 추가하면서 더 추상적인 의미를 수집하여 스스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메타포는 사용 자체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맥락 안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단어들이 점차적으로 다른 의미를 띄기 시작할 적도 있다.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사용되던 낱말들이 마지막 장에 가면 전혀 다른 의미를 띄기도 한다. 그처럼 사용되는 시점에서 이미 모든 문장과 낱말은 저 맥락을 덧입기 시작한다. 따라서 맥락이 누적될수록 거기 소속된 몇몇 낱말들은 점차적으로 메타포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메타포는 자의적 의미지만, 그 의미는 저자의 내면생활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당 문장이 현재 소속되어 누적되고 있는 맥락에서 비롯된다.
한편, 습관적 패턴의 은유로부터, 아직 사전적 의미가 되지는 못했으나 그 용법이 너무 관례적이라 소위 새로운 의미의 유통은 더 이상 아니게 될 때의 과도기적 상태에서 우리는 종종 '클리셰'를 마주한다. 그때 목도하는 건 새롭다고 할 수도 없을 만치 다수의 사용을 덧입지만, 그렇다고 다수결의 권력이나 국문학자의 권위에는 다다르지 못한 무수한 언어들이다. 가령 기록되지 못한 방언들이나 비속어들이 그러하다. 기성의 옷을 입지 못한, 허나 무수하게 활용되는 '메타포'들의 이 과도기적 상태는 그저 다수 권력의 강대함이나 기성 권위의 대단함만 증거할 따름인가? 그렇게 공적인 언어를 지명하는 힘이 일종의 '폭력'이라는, 그런 고발의 명분 외에 저 '힘'이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이 사용은 되고 있으나 사회에 등록되지는 못한 상태는, 소위 권력이나 권위가 회고적이라는 걸 아울러 이르고 있다. 요컨대 '사용'이 먼저 있고 '분류'나 '정의'는 나중에 온다.
우리의 지성 또한 우리 행동 뒤에 온다. 우리 정신을 작동하는 일 또한 '지성'의 '행동'이라고 할 때, 이 '지성'을 다시 분석하고자 하는 '지성'이 다시 따라올 터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지성'은 다분히 회고적이다. '은유'도, '메타포'도, '클리셰'도 회고적인 분류일 따름이다. 보다 이전에 '사용'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회고 이전 '사용'의 상태를 지나친다. 말하자면 우리는 마음껏 '상상'한 뒤 각각의 일관성 아래 가공한다. 그처럼 추리가 되기 전 공상이 있다. 그처럼 정신적 수렴이 있기 전 정신적 발산이 있다. 그처럼 발산적 공상이 자유연상(관념)에 하염없이 가까워진다면, 수렴적 추리는 한없이 사유(현실)에 가까워지는 과정인 셈이다. 허나 자유연상이 하나의 창작이라면, 사유 또한 하나의 창작이다. 다만 전자는 즐거운 발산이고, 후자는 고통스런 수렴이리라.
그렇게 우리에게서 나오는 언어 중 다수가 회고되고서야 그 '의미'를 획득하곤 할지라도, 언어의 발화 시점에 우리 모두는 '사용'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을 하고 있듯, 회고의 시점에서도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을 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서 '분석' 또한 지성의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예의 '사용'에 통합될 수 있겠으므로, '지성의 사용으로서의 분석'에 대한 재차 '분석'이 가능하리라. 모든 분석이 당 분석에 대한 분석(미분)으로 미끄러지듯, 그 역 또한 가능할 터다. 모든 사용이 그 이전의 사용으로 추리되어 가정(적분)될 수도 있지 않겠나. 요컨대 은유 이전의 은유, 발상 이전의 발상, 저 '사용' 최초의 지점에 극단적인 우연성이 확인된다면, '분석' 최후의 지점에는 극단적인 필연성이 확인되지 않겠나.
그렇게 필연이 우연들의 사슬의 관절 역할을 맡는다면, 우연은 일관된 필연들의 질료 역할을 하리라. 요는, 저기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긍정하는 데 오는 사슬(창작)의 재차 필연이다. 우리가 사후적으로만 사유할 수 있듯 소급해서만 사유가 가능하며, 거기서 우리는 끝끝내 '분석'하기 위해 이미 '사용'을 가정하는 중이고 또 가정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경청(분석)할 때 화자(사용자)를 가정한다. 그러나 역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사용)할 때 청자(평론가/분석가)를 고려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모든 사용은 얼만치는 분석이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리라. 우리의 '사용'은 본의 아니게라도 '분석'을 고려하고 있다. 여기서 주요한 건 하나의 극단을 개념으로 선취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얼마나'의 비율이다. 과연 이것은 '얼마나' 사용이고 '얼마나' 분석인가? 그처럼 우리 정신은 언제나 '상상'과 '사고'의 어떤 과도기적 '사용' 상태에 있다. 이를테면 은유와 메타포와 클리셰 사이를 모호하게 왕래하는 어떤 용법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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