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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
우리가 상상해 내는 관념으로서 허구는 무수한 관계를 그 자료로 삼는다. 이를테면 사물과 사물 간의, 나아가 사물과 사람 간의, 더욱이는 사람과 사람 간의, 심지어는 관계와 관계 간의 관계를 토대하는 이 무수한 ‘허구’는 어떤 통계적인 개연성으로 그 관절이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최소한 우리 관념은 우리 자신의 앎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겠으므로, 관념 바깥의 도움을 받아야 동어반복이 아닌 자기와 다른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나. 이를테면 관념 자신이 현실에 내놓은 결과물을 다시 자기 자신의 자료로 삼는 양, 그러니까 마치 스스로 관련된 관계의 양상 자체들 간의 다시 관계를 거듭 자기 도구이자 자료로 삼는 '상상'처럼.
관념 바깥에는 무엇이 있나?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응이, 또한 예의 대응을 토대로 산출해 낸 해석을 포함한 다시 저 대응들이 우리의 ‘관념’을 이루고 있다면, 설령 우리의 관념(정신생활)이 그토록 허구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관념은 관념 자신이라는 국경 밖으로 자의(능동)적으로 나갈 순 없으리라. 위에서처럼, 우리가 관념을 전개하는 방법적인 방식(이를테면 상상의 방식)의 측면에서조차 애초의 자료를 ‘(바깥)현실’에 거듭 토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니.
따라서 관념이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언가 자료 삼아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관념 자체도 하나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게 유효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러니까 그게 현실에서 도피하는 공상이든 현실에 대한 공상이든 간에 공상 자체도 현실의 양태적 기전 중 하나일 테니까. 더 정확히, 공상하는 인간 자체부터 이미 현실에 속해서 작동 중에 있지 않나. 그러므로, 완전한 도피도 완전한 인식도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저 방향만 있을 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향 위에서 우리가 허구를 생산하는 메커니즘 자체를 다시 우리 허구의 '유효한' 자료로 삼을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 관념이 관념으로부터 떨어진 물리적 현실을 ‘생산’한다면, 관념은 이 산물을 다시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모양이다. 저기 저 관념의 ‘산물’이 비록 애초에 관념으로부터 생산되었더라도, 이를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는 관념은 저 ‘산물’을 생산했던 이전의 관념과 다른 관념을 이후 생산해 낼 수도 있을 테니까. ‘생산’과 ‘수용’은 어쨌거나 다른 과정이지 않던가.
가령 우리 관념의 흔한 산출물로 ‘기호’가 있다. 우리 관념 안에는 종종 ‘기호’가 실재한다. 간혹 우리는 '이미 유통되는' 관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얼마간 유통될 수도 있을 기호를 생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호를 통해 다른 관념을 생산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생산된 관념이 기호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이 기호를 종이에 굳이 끄적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머릿속으로 기호를 통해 ‘전개’하고는 한다(여기서 기호는 우리 내면과 표면 사이로 '유통'된다). 예컨대 종이에 숫자를 끄적이며 연산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암산을 할 적도 있다. 요는 우리가 상상한 허구를 전제로 다시금 다른 상상을 전개한다는 전개 자체에 있다.
따라서 그게 논증이건 창작이건 간에, 허구 자체는 관념이 현실과 상호작용한 ‘전개’의 흔적이다. 전개는 집단으로도 일어난다. 혹자가 논증해 둔 공식이 다른 이를 통해 전개되어 새로운 공식을 산출하기도 하고, 해당 공식(논증)이 다른 영역에서 응용되어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상황의 작동 논리를 설명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혹자가 창작한 이야기가 다른 이의 관념을 자극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고, 해당 이야기가 다른 영역에서 응용되어 관객이 시청하는 연극이나 영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전개(유통)' 위에서의 단위는, 그게 '허구'든 '기호'든 어떤 관성의 관념이든 간에, 이는 이를 처음 저술하고 상상해 낸 저자와 상관없이 스스로 '작동'한다. 요컨대 관념은 관념의 저자와 상관없는 '유효성'을 얼마간 따로 가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따라서 허구의 ‘유효성’이 현실을 얼만치나 작동하게 하는가로 가늠될 수 있다면, 허구 자체 또한 현실 위에서 창작된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러니까 예의 허구가 다른 허구를 얼만치나 작동(촉발)하게 하는지로도 이 허구의 ‘유효성’을 살필 수 있으리라.
예의 허구가 허구 아닌 영역에서 현실을 작동하게 하는 게 아니라면(가령 연구에서의 임시 가설처럼), 다른 허구의 생산을 자극하는 허구가 가진 유효성은 일단 통계적인 개념일 터다. 무수한 허구를 생산하도록 자극하는 이 재차 허구는, 달리 말하자면, 창작욕을 자극하는 저기 저 작품들은 어떤 작품(허구)인가? 그러니까 관객이 도무지 관객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자리를 욕망하게 하는, 작품을 향유하기보다 다른 작품을 기어이 생산하도록 추동하는 이런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말하자면, 기호를 생산하도록 추동하는 기호, 이를테면 작품에 대한 작품, 기호에 대한 기호, 허구에 대한 이 허구는 그저 해소로 끝나지 않는 순환 고리를 만드는 욕망에 대한 욕망 자체로의 승화가 아니던가. 거기서 마침내 저 욕망은 사회적 요구의 억압이나 본능적 충동도 아닌, 그러나 이들을 납득(긍정)하며 자료 삼고 그 위에서 전개되는, 그리하여 그저 작품 자체로서의 충동(욕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처럼 저기 저 허구에 대한 허구는 욕망까지 지나치리라. 그리 승화되어 맞닿은 욕망이 그저 현실을 억압(본능의 발산/추구)하거나 현실에 억압당하는 게(사회적 요구/명령) 아니라, 예의 희비극의 현실 모두를 모조리 자기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양이다. 이와 같은 욕망에 대한 욕망은 현실을 긍정할 수밖에 없겠으므로. 그처럼 어떤 허구는 어떤 현실을 재차 산출하고, 그리 산출된 허구가 구성하는 현실을, 말하자면 더 이상 허구가 아니게 된 이 유효한 허구를 다시 자기 자료 삼는 과정 중에 있는 재차 허구다. 곧 모든 허구는 언젠가의 어느 현실에 비롯되어 전개되고, 어떤 허구는 이 전개를 기원 삼아 다시 전개되는 와중에 있다. 요컨대 전개 자체에 대한 충동을 무어라 부르건 간에, '저자와 상관없이' 자생하는 단위로 이루어진 이 전개(작동)는 허구와 허구가 아닌바 모두를 그 희비극에 상관없이 모조리 자기 자료로 삼고 다른 전개를 산출하며 전개된(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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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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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휘발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우리네 사소한 '허구'들 중 어떤 것은, 저자의 기획이나 혹자의 해석이 작동하기보다 먼저 유통되어 외부(바깥)로부터 우선 회자되는 방식으로 그 효력이 발동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서양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나 '나니아 연대기' 등 익숙한 '신화'와 같이, '흥부와 놀부'나 '혹부리 영감'은 어떤 종류의 참조 사항으로 묶여 다루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등장인물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보다, 서사 전체를 혹은 서사 내부 인물들을 쉬이 도용하여 가져올 수 있는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지목하는 게 종종 있으므로. 종종 이런 상징들은 사회에 새로 진입하는 개인에게 규범적 명령을 그 위협의 흉터로 새기기도 하겠으나, 달리 해석하는 어느 맥락에서 추상적인 '함의'를 소유하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신분석이 아버지 살해를 쉬이 설명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도용한 바나, 오늘날에 와서 재해석되곤 하는 '놀부'의 '돈'과 성공에 관한 욕망과 같이.
이런 예시에선 이미 받아들여진 우화(허구)가 먼저 있고, 그에 관한 해석의 여지가 등장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나의 우화에 사후적으로 온갖 이론들이 적용되기도 한다. 그렇게 간혹은 거기 우화라는 허수아비가 온갖 이론들을 흥미롭게 소개할 수 있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무수한 해석들이 다양하게 인용되는 우화가 가진 저 유명세의 근거를 설명(교훈의 사회적 합목적성 등으로)하고자 하지만, 실상 이런 우화 자체가 여타의 해석을 '흥미롭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되는 사태 자체가 당 유명세의 발판인 경우도 많다. 해석의 호불호를 떠나서, 여기서 우리는 해석 자체만을 학습하는 지겨운 여정에서 흥미로운 우화의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는 여정으로 옮겨올 수 있을 테니.
그처럼 우화는 해석을 세인들에게 소개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간혹은 도리어 해석이 우화를 세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허나 실상 해석 자체도 하나의 우화가 아니던가. 우리는 사소한 법칙조차 이런 우화(허구) 없이 학습하기 버거울 텐데. 어린아이가 뺄셈을 배울 적마저, 정수를 논증한 후에 뺄셈을 연역하기란 요원한 일이지 않나. 도리어 뺄셈 자체를 은유하는 하나의 우화를 통해 일단 논증을 우회하곤 한다. 요컨대 열 개의 사과를 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고양이가 네 개를 훔쳐 달아났다면 몇 개가 남느냐는 식이다. 이처럼 우리는 유효한 허구를 통해 법칙에 도달하지만, 거기서 그리 도달한 법칙 외의 나머지 요소는 언젠가 유효했을지언정 끝내 법칙에 대비되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는 '법칙'뿐 아니라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마저 그 해석의 진위를 떠나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우화(허구)를 통해 그 진실을 우선 은유하여 해석해서 이를 교정하여야 진위에 도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양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우선 상상한다. 그리고 차후 연역한다. 논증이 고민을 위시한 엄밀한 표현의 방법인 까닭도 거기 있다. 허구 자체로는 무슨 의사소통도 경유하지 못하고 또한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겠고, 또 우리는 허구(상상) 없이 어떤 사유에도 도달할 수 없겠으나, 허구(상상)만으로 유효성을 검증할 수도 의사소통을 시도할 수도 없다(이 상상과 연역 사이의 관절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 역량을 단련시키는 소위 '놀이'가 도처에서 발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가령 뺄셈이라는 연산 개념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소위 '허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뺄셈이라는 개념을 확증한 채 이에 대해 탐구하거나 논의하고자 할 즈음에 필요한 건 이제 '상상된 우화(허구)'가 아니라 '상상된 논증(허구)'이니까. 말하자면 허구(우화)를 통해 도달한 법칙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과정에도 허구(논증-가설)는 필요할 모양이다. 분명 우리가 허구와 허구가 아닌 것을 구별해 내기란 어느 대목에서 요원한 일이겠으니. 우리의 관념적 습관뿐 아니라, 관념이 매개하는 저 모든 기호 또한 모조리 허구적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허구를 통해 매번 유효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것이 설령 허구에 대한 허구라 할 지라도.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세운 유효성을 축으로 이 '허구'들을 걸러내고 연산하는 등으로, 허구에서 비롯된 현실(법칙)을 연역한다.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가 연산하는 질료는 이미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서 산출된 '허구(가령 기호)'일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가 누가 누구보다 허구(현실)를 특히 더/덜 (법칙 아닌) 그 자료로써 다룬다는 명제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건, 실상 누구나 모조리 허구만을 다루고 있고 우리 역량은 오직 이 허구의 유효성(설령 그 유효성이 다른 허구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하더라도)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추출된 어떤 법칙, 어떤 현실은 걸러낸 허구 자체가 아니라 허구를 그리 걸러내는 방식, 연산하는 방식, 비로소 연역하는 과정 자체에 있는 어떤 관계의 지형도일 모양이다. 요컨대 허구에 현실이 대응하는 게 아니라, 허구들끼리 상호 간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포석(고정점)들이 우리의 법칙(현실)을 구성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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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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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우리 삶은 경험적인 만큼 추상적이다. 소위 말하는 ‘성숙’에 대한 개념적 접근은 다수의 딜레마를 연상하게 한다. 이 개념은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상당히 사회 의존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뭔가를 지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너무 추상적인 개념은, 바로 그 추상성 때문에 개념적인 엄밀성을 폐기당하기도 한다.
가령 우리가 ‘의자’라는 관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그 지시 대상이 명증한 사회적 합의라고 말할 수 있는 직관적인 접근성을 통해 다소 쉽게 타인에게 증명할 수도 있다. 허나 ‘용서’나 ‘사랑’, ‘질투’나 ‘증오’라는 개념은 다르다. 그것들은 지시 대상이 없거나, 그런 대상들 간의 관계(들의 다시 관계)를 토대한 추상적인 ‘개념’인 까닭이다.
무언가 이해하고자 할 때는, 구체적인 양상으로부터 얼마간 귀납적인 추론을 시작하여 개념 자체의 연역적인 약속에 달해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념은 일반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해’ 자체와 ‘이해했다고 자부하고 싶은 욕망의 이미지’가 다르듯이,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보다 이미 이해했다고 젠체하고 싶은 ‘이미지’가 그 개념에 관한 엄밀한 이해 자체와 상관없이 어떤 자아상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한다. ‘어려운 개념’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다. 그 개념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자체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타인에게 자랑스럽게 황망한 주석을 늘어놓는 주인공(선생)의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양이므로.
#탑
성숙은 생리적인 의미뿐 아니라 그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딜레마로 가득하다. 동일한 행동이 어떤 상황에서는 ‘성숙’하다고 간주되나, 다른 상황에서는 ‘성숙’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성숙’하다는 평판을 원하는 양태와 ‘성숙’하고자 하는 양상은 다르다. 나아가, 이 ‘성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시행착오는 겪기 싫지만, 그 개념을 알고 있는 양 굴고 싶은 이미지(이럴 때 종종 그 근거로 ‘직관’이 무단으로 도용되기도 한다)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미지(거울-자아상)로서만 등장한다.
성숙 자체에 관한 일반 개념으로의 논증이 아니라, 그 앎을 하나의 은유로 퉁 치고 ‘이해’에 대한 노력으로부터 경솔하게 자유롭고자 하는 이 이미지의 대표 격으로는 ‘탑을 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탑을 오르는 이미지는, 첫 번째로는, 나이만 먹으면, 경력만 쌓이면, 세월이 그리 쌓이지 못한 혹자가 이해하지 못할 심오한 뭔가를 자연히 알게 되고 그에게 충고해도 된다는 나태한 발산적 태도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령 업무상의 경력을 인생 그 자체의 전인격적인 우월성으로 번역하여, 후배의 업무 외 사생활의 정신적 일관성에 대한 교정을 시도하는 무수한 인생 선배들이 어찌나 많은가. 전인격적인 우월성 따위를 자처하는 근거가 경력이건 나이건 업적이건 간에, 예의 저 전인격적인 열쇠가 삶에 존재한다는 가정은 이미 나머지 사소한 모든 문제들을 단숨에 퉁 칠 수 있는 황망한 만능열쇠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식의 코믹한 도피적 환각의 일종일 모양이다.
여기서 활용되는 ‘탑’의 이미지는 ‘사회적 탑’이다. 언술하는바, ‘니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라는 월권(참여) 의지에서 도용되는 ‘세상’이라는 개념은, 스스로 먼저 겪은 (객관화를 거부하는) ‘사회’(라는 주관적 이미지)에 다름 아니므로. 여기서 탑을 오르는 행위는, 그저 삶을 먼저 겪었다는 의미 정도에 불과하다. 무수한 인간보다 먼저 태어난 벼룩도 세상과 삶을 겪는다. 고민 없이 그렇게 “자동으로” 세월의 탑을 오르지만, 벼룩은 지나간 세월을 그만큼이나 자랑스러워하진 않는다.
두 번째 탑의 이미지는, 자기 극복의 이미지다. 여기서도 ‘성숙’이 도용된다. 요컨대 희로애락이 벌어지는 삶의 땅에서 멀어지는 “이미지적” 방식은, 지하로 가거나 하늘로 오르거나 일 텐데. 지하로 침잠하는 이미지로서는, 결코 땅을 주시하며 그렇게 할 수가 없을 테니. 의식의 빛이 희미한 지하의 이미지를 가진 원시인이나 유아는, 어떤 대상이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한다. 좋은 것은 모조리 내가 삼키고, 나쁜 것은 그 자체로 타인(이질성)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당사자)로서는 거리두기 없이 자기 삶을 관조할 수 없다. 관조하고자 한다면 이 희로애락에서 멀어져야 한다. 이 희로애락 자체를 구경할 수 있으면서 멀어져야 한다.
#수직성
여기서 탑을 오르는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감정과의 거리두기를 포괄하는 태도다.
감정을 겪는다는 건 두 가지로, 우선 그 감정(가령 시기심)을 인정하건 하지 않건 그에 따른 무조건적 반응을 가동한다는 의미로 귀결될 수도 있으나, 달리로는 현재 겪고 있는 감정 자체를 알아차린다는 의미로 매듭지어질 수도 있을 모양이다. 여기서 탑을 오른다는 건, 그 위에서 자기감정을 바라보고 알아차린다는 후자에 더 가깝다.
감정을 살피려면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이 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개별 충동들을 객관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뿌리 깊은 ‘주인공 의식/자기애’를 억누른다.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위대한’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객관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위대한 감정들뿐 아니라 사소하고 얄팍하고 치졸한 감정들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바로 그 객관화의 도식 위에서 이 탑을 오르는 과정은 벌써부터 시련의 과정이다.
이 탑을 시련의 탑이라고 부르건, 고난의 탑이라고 부르건 명칭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양이다. 마치 이미지는 개념을 잘 이해하라고 만든 우회로에 불과한 양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면, 도달을 위해 그동안 얼마간 사용되었던 ‘이미지’는 그 무용과 역사 속에 폐기되고, 그 자리를 임상과 논증에 내어줄 수밖에 없는 바와 같이.
그럼에도 탑을 무한히 오를 수는 없다. 원시인이나 유아가 자기감정을 살피지 못하는 건 ‘감정’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지만, 감정 자체와 거리를 두더라도 너무 멀어지지 않는 동시에 일관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변화를 거듭하면 명확히 관조할 수 없다. 이미지적으로 말하자면, 파도치는 강 아래로는 물고기를 살필 수 없는 바와 유사하다. 심지어는, 가까이서 본 적 없는 감정에 대해 멀리서 보고 판단하는 정밀도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탑을 오르는 종국의 이미지는, 마침내 그 위를 비행하는 게 아니라 탑 위에 서서 아래를 ‘깊이’ 내려다보는 이미지로 귀결될 터다.
이 수직성은, 감정과 인지로 복잡하게 얽힌 저 정동들의 도식을 때마다 다시 마련해줄 수 있는 역량의 이미지일 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을 오르는 목적이 감정을 포함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라면, 이 탑의 이미지는 땅에 박혀있는 그 뿌리 또한 포함하고 있어야 할 터다.
#지하실
굳이 유년기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뿌리가 자리한 지하실에는 인정하기 싫은 감정들이 인정받지 못한 채 갇혀 있을 테다. 그게 꼭 ‘악의’만은 아닐 양이다. 삶의 명령어들(이를테면 도덕이나 부모의 가치관 등)이 인정하지 않을 감정들이, 다른 감정들로 자기 모습을 가린 채 베일 뒤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동일시로 만들어지는 자기 자아상만큼이나, 거기 위배되어 무의식에 억압되는 감정들 또한 자연스럽다. 요컨대, 왜 자의적으로 억압되었겠는가?를 주제로 자아상이 뱉어내는 무의식의 억압 기준을 잡을 수도 있을 성싶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증오(공격성)’ 또한 ‘사랑’과 ‘동등하게’ 자연스러운 양으로).
그러므로, 탑의 수직성은 머나먼 거리에서 자기 정신의 지도를 추론하여 그리면서 발견한 때마다의 모순을 탐구할 필요를 언제고 느낄 양이다. 그는 일종의 탐정 놀이를 통해, 가면 역할을 하는 감정(정동)과 맨얼굴의 감정(정동/욕동)을 구별해내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탑을 오르는 이미지가 지하실을 탐사하는 이미지를 그 내부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지하실의 이미지는 뒤집힌 탑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겠다.
종종 가면 너머의 감정은 일종의 결핍으로 간주되곤 한다. 필요 이상의 식욕의 감정을 쓰고 나타난 결핍에서, 당사자가 섭취하고자 하는 건 언젠가 받지 못했던 사랑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비행 청소년이 어느 날엔가 도둑질하고자 한 것은 실상 어른(부모)들의 사랑이요, 그들이 무작위적인 폭력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응석을 부려도 받아줄 수 있는 일종의 보금자리라는 해설은 그토록 흔하지 않나(그러나 사랑이 순수한 딱 그만큼 증오 또한 당연하고도 순수하다). 그들이 그렇게 뒤집어진 탑을 내려가면서, 그리하여 그 밑바닥의 연옥으로부터 다시 올라가며 ‘이해’하게 되는 건 과연 그 자신의 어떤 결핍, 그러니까 가면 너머 맨얼굴을 한 어떤 감정들인가?
나열하자면 끝이 없으리라. 지하실의 이미지는 언젠가는 미노타우로스를 좇는 테세우스의 미궁이었다가, 보물을 찾는 해적들이 누비는 바다였다가, 신화 속 영웅이 괴물들을 살해하는 숲이기도 하였을 테니.
#영웅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연옥을 오른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통해 미궁을 탈출한다. 지하실에서의 괴물들을 그와 같이 분별하는 건 첫 번째 의미의 탑, 이미 미로에 다름 아닌 저기 사회적 도덕률이 아니라, 그 도덕률의 모순을 폭로하는 다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의미의 탑, 자기 극복의 의지는 그 수직성 위에 서 있는 그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규율로써의 윤리를 내포한다. 그처럼 두 번째 의미에서 탑을 오르는 자는, 자기 지하실을 들여다보며,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안내를 받아 어떤 정동이 가면이고 어떤 정동이 맨얼굴(욕동)인지(실상 그조차 그저 뿌리 깊은 가면에 불과하겠으나) 알 수 있으리라.
모든 영웅신화에서 영웅들은 지하실을 거친다. 무수한 종교에서도 어떤 죽음과 재생을 경유하여 신적인 인간의 탄생을 축복한다. 그들이 지하실에서 본 것은, 그리고 우리가 지하실에서 봐야 할 것은 가면 너머의 맨얼굴을 한 정동(욕동)들일 모양인데. 이는, 사회적 압력에 관한 극복을 포함한다. 책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순간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는 한층 승화된다. 여기서 영웅은, 그저 사회적 의무를 초과하는 어떤 의무(외부에서 온 사명은 물론 아니다)를 감지한다.
소위 말하는 대극의 합일은, 동일시로 성장한 의식과 억압되어 쌓인 무의식 둘 모두를 통합하는 것일 텐데. 그러나 여기서 무의식을 의식에 포함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마치 증오를 사랑에 포함해야 한다는 식의 기울어진 의미 부여가 될 뿐이겠다. 증오도 사랑과 동등하게 자연스러운 만큼, 통합 과정은 의식이나 사랑의 독점이 아니라 무의식이나 증오에 관한 인정과 서로 간의 공생이어야 할 양이다. 통합은, 사랑으로 모든 걸 퉁 치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사랑과 증오 각각에 관한 인정에 도달하게 하는 양으로, 무의식과 의식 서로 간의 인정과 공생에 다다르게 해야 할 모양이니.
#통과제의
그와 같이 지하실을 탐사하면서 탑을 오르는 이미지를 제도화한 저기 저 통과제의들을 하나의 의례로 포함하는 고대의 여러 부족 집단은, 성인식(통과제의) 이후 성인의 징표로 신체를 변형하기도 한다. 상처를 내고 흉터를 새기기도 한다. 이 흉터(이미지)는, 탑을 오르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시련(고통)을, 그리 그 자신이 자기 자신이자 세계 자체인 우주를 마주해 겪을 수밖에 없을 고통(시련)을 그에게 영영 재고하도록 강제하는 상징이다.
현대사회의 통과제의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무수한 만화영화에서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서사에서는 소원을 이뤄준다는 용의 구슬을 찾아 혼란스런 세계(지하실)로 진입하기도 하며(드래곤볼), 또 어떤 서사에서는 보물을 찾아 망망대해(지하실)로 떠나기도 한다(원피스). 마찬가지로, 혹자는 부자(탑)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서점과 인터넷(지하실)을 떠돌기도 하고, 또 다른 혹자는 취업(탑)을 위해 떠돌기도 한다던지.
금융을 중심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통과제의를 넘어서면, 이제 하나의 흉터로서 그의 계좌엔 얼만치의 숫자가 찍혀있던가? 이 숫자가 당사자가 자본주의를 마주해 겪을 수밖에 없(었)을 고통을 그에게 영영 재고하게 하던가?
만화영화가 어린아이들 내부 지하실의 가면 쓴 정동들과 실제론 상관없듯, 아무래도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이나 부를 축적한 부자가 비로소 소유하게 된 계좌에 등록된 숫자들 또한 그들 내부 지하실의 가면 쓴 정동(욕동)들과 실제론 상관없지 않나 말이다.
현대사회의 신화는 너무나 많은 “주의”들로 쪼개져 있을 양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사례로 삼아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데 앞서 삶의 규칙들을 제시할 뿐이다. 그저 삶의 규칙이기만 한 것들은 가치관이 되기엔 어려움이 있다. 고대 무슨 부족에서도, 어떤 약육강식은 신성한 법칙이고, 또 무슨 약육강식은 그저 야만적인 혼란의 증거일 따름이었겠으니.
게다가 성공 자체가 통과제의가 될 수 없는 건, 이 성인식을 통과한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시민’의 사전적 의미부터가 이미 ‘성공’한 사람이 아니니까.
또한, 현대 사회 스스로가 열려 있다고 종종 자부하기는 하듯. 그리 다양한 가치가 나부끼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치에 대한 독점을 견제하는 규율로서의 가치만이 불변의 유일 가치가 될 필요가 있겠으나, 바로 그런 까닭에 전체성으로서의 시민 일반의 동기부여에는 종종 실패하고 있는 양 보인다. 말하자면, 거짓일지언정 세계를 단번에 꿰뚫어 이해하게 해 준다는 단 하나의 거대한 허구(통과제의)가 그 신화적 자리를 잃었다. 오늘날엔 그저 특정 나이가 지나면 ‘성인’이 되는 중이니까.
#이미지들
그러나 논증되거나 체험되지 않는 허구가 그저 상상에 그치듯, 의례는 의례일 뿐이다. 전통적인 정신생활에서조차 통과제의(아버지 살해-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의례를 통과한 성인들도 이후에 여전히 자기 탑을 올라가고 있어야 할 터다. 그렇게 자기 정신에 관한 관찰과 분석을 이어가고 있을 터다.
여기 탑을 오르는 이미지 또한 그저 이미지에 그칠 양이다. 지하실도 마찬가지다. 허구가 그저 허구이듯, 신화는 그저 신화다. 성숙의 과정은 이미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직접 들여다보고 현실을 또한 직접 들여다보는 데에 그 첫 번째 과제가 있지 않나. 이는 무수한 딜레마의 과정일 양이다. 성숙의 이미지를 타인 앞에 어떻게 전시할지 따위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고자 하는 동시에 성숙 자체의 개념적 의미를 고찰하는 바로 그 딜레마에서처럼.
언젠가 우리는 지하실이나 미궁의 은유를 통하지 않고도, 또 언젠가부터는 은유 자체를 통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감정을 늘 살필 수 있어야 할 양이다. 우리는 의도하기만 하면 우리가 억압하는 것들과 원하는 것들을 돌아보고자 시도할 수 있다. 이미지나 신화를 통하지 않고도, 그럴 의향만 있다면, 실패할지언정 거듭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통과제의라는 의례 없이도, 그리고 그 의례에 따르는 신체적 흉터(이미지) 없이도 우리 삶의 고민을, 고민해야 한다는 오직 그 확신만 유일하게 가지고서, 계속해서 탁마하여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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