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것, 프로세스와 부품의 개성

시즌 4 HOW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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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삶의 행간에서 스스로 가공을 거칠 때 혹자가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다른 누군가는 이점을 강화하는 데 시간을 쏟을 양이다.


허나 그렇게 가진 결함으로 인해 팔방미인이 될 순 없다손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감당 가능한 결함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오직 이점만 생각할 순 없으리라. 최소한의 양식이라는 한계는 그렇게 종종 규범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곤 한다. 그럼에도, 강제되었든 아니든 나름의 노력에 그 한계가 언젠가 도래하기 마련 아니던가. 노력에 비해 결과가 더딘 어느 지점에 대해 하염없이 세월을 낚던 어느 날, 익숙한 이점은 도무지 당연한 반면 도저히 메워낼 수 없는 무구한 이 결함은 비로소 어떤 선망을 도래하게 할는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소위 ‘개성’이라는 덫 위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기는 한 모양이다. 한편으로 어떤 재능은 삶을 손쉽게 만들어 줄 수도 있겠으나, 그리 손쉬우면 손쉬울수록 어쩌면 당사자에게 가진 재능을 발휘하는 일은 일종의 ‘타협’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겠나. 그리 잘하는 일에 이끌려 서두른 타협은, 잘하지 못하는 무엇과 관련된 무수한 생태계들을 불편한 블랙박스로 잠가놓는 심리적 사건을 쉬이 동반할 수도 있겠다. 요컨대 재빠른 타협과 채 익지 못한 인내심은, 소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역’을 너무 일찍 도래하게 하는 나머지 끝끝내 그를 도피성만 떠돌게 하는 관성 내에 종종 가둘 양이다.


반면 잘 하지 못하는 일에 관한 사로잡힘은,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쉬이 거기 깊이 사로잡히곤 할수록, 그리 잘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자신에게 소위 ‘매력’으로 작용할수록 이는 그가 불편하게 꼬인 매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어떤 패턴을 증언하는 셈이리라. 거기엔 어떤 지불유예가 계속하여 기다리는 중이다. 제약 없는 숱한 기다림들, 응답 없는 도전들이 보상을 유예하는 과정의 부산물로 어떤 참을성이 거기 자리한다.


그리하여 자기 노력의 무수한 잉여 부산물들이 매번 그를 절망으로 메다꽂았을 모양이다. 낭비된 시간과 노력 사이에서, 그의 ‘개성’은 영락없이 ‘덫’으로 자리매김하였으리라.


반면 타협 위 도피성은 어떠한가? 그에게 ‘개성’은 덫과 그토록 무조건적 동의어가 되진 않을 터다. 어쩌면 그는 함정(블랙박스)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 함정을 마주한 적도 또 함정 내부를 살펴본 적도 없거나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애써 잊었다고 할 수 있겠으니. 그렇게 그는 저 멀리서 굽어보며 저기 불편한 블랙박스 너머는 ‘아마도’ 고통스러울 양이라 짐작만 할 따름이리라. ‘“굳이” 이 블랙박스를 알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필요 이상의 편집적 욕망 아니던가? 따라서, “굳이” 이를 다 알아야 하나? 잘하는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벅차지 아니한가? 하며 스스로 암시하여 오랜 세월 피해 왔던 함정으로부터 재차 도피하곤 하는가 보다.


그러나 도래하는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이미 완전히 포위된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살고자 항거(직면)하겠으나, 에워싸인 포위 속 한 줄 소박한 퇴로라도 주어졌다고 믿는 다른 이들은 그 병목에서 저들끼리 압살당하거나 등 뒤를 공격당하거나 어쨌거나 그 희망 어린 소박한 길에만 매달려 온통 순교하기 마련 아니던가. 요컨대 저기 저 순교가 제아무리 자랑스럽더라도, 따라서 ‘사명’이라는 유사 퇴로를 사후적으로 제아무리 열심히 호소하더라도, 어쨌거나 저 도피(를 ‘부정’하고자 애쓰는 ‘다시’ 도피)의 와중엔 ‘인내’보다야 ‘충동’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되지 않겠나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무한한 지불유예로 스스로 영영 걸어갈 순 없을 양이다. 그 가혹한 풍경은 목적지를 약속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침 운동을 ‘매일’할 적엔, 날마다의 짧은 목표가 매번 다시 더 멀리 생기고, 또 새로 생긴 목표가 더 멀어지고 멀어지다 끝내 사라져야 이를 지속할 수 있다. 그는 이 무의미를 긍정하기 위해, 어쨌거나 어떤 지긋지긋함을, 어떤 좌절을 미리 가져와야 하는 셈이다. 그가 특정한 성취가 아닌 어떤 꾸준함에 대한 태도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승패에 관련 없이 지겹고 외로운 탐사를 죽기까지 영영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실패’를 미래로부터 끌어와야 한다. 그리 미리 끌어온 실패마저 언젠가 가짜라고 밝혀질지언정.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무한한 지불유예로 스스로 영영 걸어갈 순 없을 양이다. 그 가혹한 풍경은 당사자에게 그 무슨 성취도 미리 부정하길 명령하는 까닭이다. 아군의 머리가 잘리듯, 그리 뿌리 의미들이 그토록 덧없이 잘려가는 까닭이다. 가설을 더 멀리 세울수록 덧없어지는 삶은 그 자신의 정신을 어떤 낙담으로까지 이끌어낼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양이다. 그토록 공허한 삶이 진실이건 아니건, 분명한 건 누구도 처음부터 이를 견뎌낼 수야 결코 없다는 사실이리라.


과연 언제까지 저 진공상태를 견뎌야 하나? 우리는 이 해결 불가능한 낙담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앞으로도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거듭 이 진공상태 자체를 헛되이 ‘부정’하고자 애쓰곤 한다. 혹은 ‘보복’하고자 한다. 순간의 충동들로 항의하곤 한다. 삶 속의 이 사랑이, 이 약동이 과연 무의미하느냐고. 삶의 이 약동들이 무얼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분명 이 힘이 무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끝내 인간은 종교와 만날 수밖에 없다던가.


그러나, 저기 저 생의 약동들을, 고로 저 무수한 힘들의 집합을 집어들고 하는 이 항의가, 공허한 삶 자체에 대한 이 보복 시도가, 또한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공허하지 않나. 나아가, 삶의 약동하는 힘이 어쨌건 간에, 삶이 살아가기에 공허한 딱 그만치 (자의든 타의든) 삶을 굳이 끝내는 일 또한 실로 공허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삶을 가공하는 일 또한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가공’을 통해서 이 진공상태에 도달했고, 되떨어졌다가도 다시 또 여기 이 공허에 기어이 도달할 수 있을 모양이다.


곧, 과연 저기 저 파도치는 충동들 중 무엇이 ‘자아(나)’인가? 하며 의문을 품을 적에, 그러니까 과연 저기 저 극단적인 감정들을 통제해야 한다면 통제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하며 상념에 잠길 적에, 따라서 이성(대상)으로 감정들을 통제한다고 했을 때 당 이성 또한 이 통제를 통해 어떤 목적지(감정)를 겨누고 있지 않던가? 의문에 잠길 적에, 충동은 당연히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이성도 아닌 어떤 ‘중심’을 스스로 가정하고 있지 않나? 하며 재차 가설을 세우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몰래, 주체도 대상도 감정도 이성도 아닌 “그것”이, ‘감정’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은 채 ‘이성’을 도구 삼아 홀로 떠 있지 아니하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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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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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소위 노력(가공)의 대상은 쉬이 말해 결함이지, 실상 이는 결함이라기보다 ‘결핍’에 가깝지 아니하던가. 그러나, 소위 결핍은 어쨌거나 당사자가 살아내는 삶의 경로인 맥락을 포함하고 있지 않나. 당 결핍이 결핍으로 작동하기 위한 환경이 당사자가 겪은 과거 자체건, 조건이건, 혹은 그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그 자신의 관점이건 상관없이, 그러니까 어떤 사소한 근거를 통해서건 거창한 명분을 통해서건 상관없이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으리라 스스로 믿는 바로 그 원인 환경이 결핍을 만들어내고 있을 양이다. 여기서의 (인식 결과로써의) 결핍은 이미 앞선 (원인 환경으로써의) 결핍을 한 번 이상 건너온 결과물이리라.


말하자면, 도피하면서 도피하고 있지 않다 믿기 위해 만들어낸 무수한 [재차] 도피(근거)들이 다층적인 도피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퇴로들이, 애초의 함정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의 창조 원인을 그리 부정하며 당사자는 굴레에 갇히곤 하는 것이다. 함정(계시)이 없는데 퇴로(사명)는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퇴로(사명)인가? 함정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졌을지언정, 거기 창조된 퇴로(사명)는 예의 ‘함정(계시)’을 그 원인 삼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동일 원인이 언젠가는 이점이고 언젠가는 결함이라 불릴지언정, 그러므로 자의든 타의든 평가의 대상이 되는 기준을 품은 저기 저 “개성이라는 덫”이 자체 긍정(도피 행위)을 전제로 그 긍정(도피 행위에의 인식)을 다시 부정(도피)하는 굴레의 영원한 동력이 되고 있으리라. 그와 같이, 우리는 애초의 원인(함정)을 애써 부정한 이후에 우리 스스로 종종 섞여 드는 자기모순(도피)의 [재차] 원인을 비로소 무엇으로 재정의(도피)하(고 싶어 하)는가? 여기 자기모순(도피)의 원인은 이제 자기모순 자체(도피로써의 개성)가 되고 있지 아니하던가. 그야말로 신화적 동어반복(도피에의 도피(에의 도피(에의…….)))의 탄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그처럼, 거기서의 원인과 결과, 전개는 모두 ‘도피’로 수렴된다. 동어반복으로 해결되는 듯한 외양을 계속해서 덧붙여 곪아가는 문제의 사슬은, 그와 같이 연이어 증식된다. 중앙의 폐허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무수히 덧붙은 장식들이, 흔히 발견되는 신화적 브랜드(선망의 대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의를 돌리고자 하는 건, 그리하여 신화 자체의 성질이 ‘고착된’ ‘동어반복’의 (도피한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도피하고, 이에 대한 ‘인식(직면)’으로부터 다시 도피를 거듭하는) 고상한 ‘이미지’인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지 않겠나.


하나(도피)가 다른 하나(도피)를 근거 삼는 작동의 사슬이 여기서 ‘마치’ 끊어지는 양 (그렇게 임의의 참칭된 전체(자족)를) 연출하는 방식(도피)으로, 허나 실상으론 (부품으로서) 연쇄되어 등장하는 모양이다.


‘전체’를 보았을 적엔 그게 제아무리 순환 굴레라고 하더라도, 개별 톱니바퀴는 순환의 일부일지언정 순환 자체가 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부품이 스스로 순환하기 시작한다 주장한다고 해서 전체와 같아(동일시)질 순 없을 텐데. 그처럼 톱니가 내부 순환의 완결성을 참칭하기 위해 다른 톱니와 거리를 두고 홀로 (공)회전 한다 주장한다고 해서 부품이 아니게 될 순 없으리라. 실상 여기 톱니가 보복하고자 하는 건 그 자신이 ‘전체’가 아닌 ‘부품’이라는 현실 자체겠다. 그러한 보복의 와중에도, 톱니는 바로 그러한 현실 어딘가 부품으로서 자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가상의) ‘전체’를 보았을 적엔 그게 제아무리 (공)회전이라고 하더라도, 개별 부품은 예의 (공)회전의 일부일지언정 (공)회전 자체가 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자족하고자 시도한다고 해서 전체와 동일해질 순 없을 텐데. 그처럼 개인이 (공)회전의 완결성을 참칭하기 위해 타인과 거리를 두고 홀로 자족한다고 해서, 그 오래된 원망과 보복의 시도가 성공할 수는 영영 없으리라. 다시 말해, 실상 그가 보복하고자 하는 건 그 자신이 ‘전체’가 아니라는 현실 자체이므로. 그러한 보복의 와중에도, 이미 그는 바로 그러한 현실 어딘가에 자신이 보복하려는 과녁 중 하나로 아울러 자리매김하고 있겠으므로.


‘완성’된 자기 원인론으로서 간주되고 설정되는 ‘신성’이 어떤 인격을 ‘굳이’ 그리도 자주 덧입는 건, 저와 같이 ‘전체’를 참칭하고자 애를 쓰는 주체는 언제나 다름 아닌 ‘미완’의 인격체일 수밖에 없던 까닭 아니던가.


기실 결핍조차 어떤 기준 환경 없이 그 자체로는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족적인 욕망도 자족적으로 성립할 수야 결코 없을 텐데. 이는 욕망이 모방하고자 하는 것이 애초부터 바로 이 기준 환경인 까닭이며, 무엇을 ‘욕망’이라 부르고 또 무엇을 ‘결핍’이라 부를지까지도 이 기준 환경에 달려 있는 덕택이다. 그리하여 기준 환경이라는 개인의 믿음 체계가 개인 스스로 오롯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결과라면, 언젠가 개인이 이를 스스로 바꿀 수 있기는 한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말하자면, 어느 누가 거기에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어째서 보복하고자 하는가? 어째서 원망을 멈출 수 없는가? 소위 결핍은 그 용어의 사용 과정에서부터 결여된 무언가를 벌써 가정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욕망은 미래에 대해 보복하고자 하는 데 반해 결핍은 과거에 대해 보복하고 원망하고자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결핍은 어째서 그토록 의기양양하고 짐짓 ‘어른스럽게’, 세상이 얼마나 틀렸고 잘못 보고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세상의 제도적 권위’를 한껏 빌려, 그렇게 곧잘 그리 ‘피상적으로’ 주장하곤 하는가.


과연 저기 저 파도치는 욕망들 중 무엇이 ‘자아(나)’인가? 하며 의문을 품을 적에, 그러니까 과연 저기 저 극단적인 결핍들을 통제해야 한다면 통제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하며 상념에 잠길 적에, 따라서 검열로 결핍들을 통제한다고 했을 때 당 검열 또한 이 통제를 통해 어떤 목적지(욕망)를 겨누고 있지 않던가? 의문에 잠길 적에, 욕망은 당연히 아니고 결핍도 아니고 검열 자체도 아닌 어떤 ‘중심’을 스스로 가정하고 있지 않나? 하며 재차 가설을 세우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몰래, 욕망도 결핍도 아닌 “그것”이, ‘결핍’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은 채 ‘검열’을 도구 삼아 홀로 떠 있지 아니하던가 말이다.


따라서 소위 ‘개성’은 그 개념적 뿌리부터 이미 그것이 우리가 ‘전체’가 아닌 부품이라는 방증인 까닭에, 처음부터 우리가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객관도 주관도 개성도 욕망도 결핍도 아닌, 이를 검열하고 행동하게 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우리가 과연 “그것”을 바꿀 수 있는지의 문제가 ‘늘’ 남는다. 바꿀 수 있다면 또다시 과연 이를 바꾸는 주체는 누구인지 등, 매번, ‘늘’ 그렇게 거슬러 오르면 아무래도 마침내는 때마다의 ‘프로세스(구조의 작동)’ 자체와 마주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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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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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가정된 ‘전체’라는 허망한 과녁을 헛되이 연마하기보다, 현실 위에 놓여있는 단위 프로세스의 개별 ‘부분’들을 연마하는데 이를 수 있다. 예의 단위에 다다르고 이를 다시 경유하여 비로소 ‘개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포도를 신 포도라 질시하는 이솝우화의 여우와 굳이 닮을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네 ‘개성’은 우리 자신의 가능성뿐 아니라 한계를 비롯해 그 한계를 초과하는 타인에 관한 선망 혹은 질시까지 지시하고 있을 양이다.


이를테면 각자의 개성을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를 퉁 쳐서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 ‘당연히’ 없듯, 모든 문제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의 ‘전체(본질)’ 따위도 ‘당연히’ 없다. ‘당연히’ 개인의 고정된 ‘본질(전체)’ 따위도 없다(그저 개성(차이)이 있을 뿐이다). 이 ‘고정된 본질(전체)이 없다’는 명제는 오히려 우리가 무슨 문제에서도 쉬이 발을 뺄 수 없게 만든다. 본질이라는 허황된 말로 무슨 세부 경험도 퉁 칠 수 없어야 하는 게 삶인 까닭이다. 그처럼, 역량의 문제는 퇴로 없이 모든 문제에 일일이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곤 한다. 그토록 무수하게 실패할지언정.


그러니 다른 혹자가 주장하는 그 자신의 본질을 살핀다는 언변은, 과연 그 본질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헛된 본질이라도 가정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지 그 양상을 추론하는 문제로 소급된다. 가령 어떤 사건의 원인이 어느 개인의 과대망상 덕택이라면, 과대망상 자체는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의 원인이기는 하니까. 우리가 사건의 원인을 추론할 때, ‘본질’을 가정한 인간이 예의 자의적 ‘본질’에 위배되는 현실을 위협하고 그 현실에 보복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에 대해, 거기서 굳이 그 ‘본질’이 그 자체로 헛되든 헛되지 않든 상관없이, 그런 허황된 ‘본질’을 가정한 인간이라는 유형을 임의로 가정해야 비로소 추론과 분석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예컨대 뭇사람들의 값싼 관심이라도 사기 위해 자기 내면에 ‘위대한’ 본질을 가정하여 스스로 믿고자 하는 유형이 있다고 해보자.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자기 내면에 언어나 기타 수단으로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무엇이 있다는 주장을 이어가는 병리가 진지한 학술로서도 발현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약속이라는 언어가 너무 천박해 당사자의 ‘희망’이나 ‘상상’을 양적으로는 몰라도 ‘질적으로’는 표현 불가능하다는 식의 증상이 그에겐 분초마다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타의 타인이 예의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내면의 ‘기능’에 대해 추론을 시작할까 봐서라도, 그는 기능으로 판단 당하지 않기 위해 기능적이고 형태적인 판단을 비하하며 ‘질적 판단’을 과대평가할 양이다. 설령, 굳이 겸손한 표정으로 그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라도, 은연중에라도 결국 그는 자신을 소위 ‘전체’에 동일시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여줄 모양이다. 이를테면, 겸손까지 자의식의 연출에 활용하는 등으로. 그리 기능으로 분할될 수 없는 어떤 내적 기이한 지대(라고 주장하는 장소)까지 관객들을 끌고 가서, 아울러 절대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리라 가정된 온갖 순교자들의 교설들을 끌고 와서, 관객에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양날의 평을 '굳이' 받아내고자 하리라.


허나 제아무리 신비로워 보이는 형용사들을 주워다 붙이며 시인들의 글귀를 애써 머금는들, 예컨대 그가 그 자신의 미움은 스스로 고귀하고 겸손하며 충분히 성숙한 미움이라고 별도로 주장하더라도 실상 그 미움은 다만 그저 평범한 미움 중 하나일 뿐이고, 그의 그 위대하고 숙련되고 통찰력 있다는 사랑 또한 누구나의 일상에 섞여 있는 딱 그 정도의 사랑일 뿐이다. 또한 그의 학술적 겸손과 진중한 학문의 정확성에 대한 구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뱉었다는 고뇌의 딜레마도, 사실상 누구의 평범한 토라짐과 마찬가지로 그저 토라짐일 뿐 아니겠나.


그처럼 이해받을 수 없다는 엄청난 감정의 깊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미움이나 원망 따위가 다른 평범한 미움이나 원망과 ‘굳이?’ 구별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구분될 수 없음이, 그러니까 무턱대고 자랑스럽고 의기양양할 수 없음이 그에겐 엄청난 비극이고, 그 비극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여기에 대한 학술이 반드시 도래해야 한다면, 그는 이미 문학과 학문을 혼동하면서, 실은 누구의 삶이 그렇듯 스스로의 삶 또한 예의 ‘전체’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학술은 보편성과 필연성 사이에서, 그러니까 가장 평범한 평범성을 근거로 해야 소위 ‘설득력’을 가져갈 수 있을 텐데도 그는 굳이 선민의식을 위해 평범성을 희생하고 다른 학술들을 그 내용의 정확(진실)성 여부가 아닌, 당 저술가가 그 내용을 통해 의도했다고 가정하는 임의의 어림짐작 위에서 감상적 원망만 내용에 적당히 포개어 이어가곤 하지 않겠나.


그는 어째서 자신의 미움은 ‘질적으로’ 성숙한 미움이고, 또 이를 만인에게 (학술적으로라도) 인정받아야만 하고, 마찬가지로 소유한 모든 감정이 남들보다 ‘위대한’ 감정이어야 하며, 그게 관철되지 못한 비극을 학술적 주제로 풀어(/열어 밝혀) 여느 관객에게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기실 ‘위대한’ 감정 따위가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가? 위대한 미움 따윈 없다. 그저 미움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랑이 위대하다면, 그만이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구의 사랑인들 사랑이 그 자체로 위대할 뿐일 터다. 시행착오 없이 그저 내면을 갑작스레 어느 날 깨달은 깊이 따위도 당연히 있을 수 없지 않겠나. 그저, 스스로 한갓 사물, 한갓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어 (소위 ‘일관’된) 전체성(의 환상)을 참칭하는 (‘이완’된) 응석의 배설이 거기 있을 뿐이다. 심지어 여느 사람들이 언급하는 진정한 위대함 그 자체조차 실은 흔히 이야기하는 ‘전체성’이 될 수 없지 않나. 최소한, 그와 같은 위대함을 평하는 관점조차 회고적으로만 도래할 테니.


그처럼 ‘가정된 전체’라는 양태는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부품으로서의 삶이 거부되는 방식으로만, 이를테면 도저히 모두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다는 불평의 형용사이자 좌절의 반대급부로서만 증상적으로 도래한다.


그러나, 기능적으로 우리는 매 작용들과 그 작용 간의 관계들 사이에서 작동할 뿐이므로, 가정된 전체가 존재하건 하지 않건 상관 없어지는 순간 이후에야 때마다의 작동 양상들을 탐사하고 가공하여 구조화하는데 이를 수 있다. 말하자면, 온갖 시행착오(비일관성)를 노력 속에서 남김없이 겪어야 하는 삶이 오직 거기 있을 뿐이다. 문법상의 전체 따위가 아니라 때마다 필요한 작용의 프로세스들이, 그리고 그 프로세스들의 관계 양상들이, 나아가 이 관계 양상들을 매번 다시 구조화하는 우리네 유효한 역량들이 거기 있을 뿐이다.


예의 역량들은 언제나, 그저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바. 최초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또 그와 아울러 할 수 없는 것까지 지시하는 ‘개성’은 그러므로 하나의 가능성인 동시에 덫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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