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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Mar 22. 2024

영화 ‘가여운 것들’ 리뷰

가여운 신성

요컨대, ‘가여운’ 유아는 잔혹한 현실 인식 위에서 최초의 대상관계를 영영 극복해 나갈 운명이었으리라. 설령 이 극복의 과정을 마침내 완결지을 순 없다손 치더라도, 끝내 유아는 자기 욕망의 대상과의 폐쇄된 관계만을 향유할 수는 없을 운명이므로. 실로 ‘유아’의 대상이, 다시, 당 ‘유아’를 ‘대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셈이었다 하더라도.


언젠가 어느 날에 이 ‘대상’은 어느 누구였다가 다른 누가 되며 세월이 지나곤 한다. 또 다른 언젠가 어느 날엔 이 ‘대상’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을 다른 누구에게 투사Projection하며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저기 저 애초의 일차적 ‘대상’을 소환(동일시/내사)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가 이웃하고 마주 서고 지나치던 그 무슨 행인들을 임시 그릇 삼더라도, 이 원초 대상들은 예의 무수한 그릇들을 갈아치우며 초기 2자 관계의 양상을 재생할 수밖에 없지 않던가.


그토록 반복되던 관계의 무늬가 결핍의 패턴을 그리든 욕망의 패턴을 강제하든 간에, 그는 그 자신이 미리 기획한 이미지로서만 삶을 바라볼 순 없다는 사실을 환각이 등장하는 그 시절 아울러 알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무던히, 또 무차별적으로 등장하는 저기 저 제3의 시선은, 우리가 제아무리 미리 기획한 이미지로 삶을 바라보고자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어떤 검열을 생의 가장 뿌리부터 영영 던져줄 양이니.


그리하여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환각을 긍정하기 위해선 현실을 그 환각에 짜맞추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철저히 환각에서 벗어나 ‘노력’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허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단 현실을 긍정해야 하는 과업 그 후에도, 그러니까 현실을 인정한 후에도 그는 현실에 안주할는지 꿈에 다가갈는지 다시 선택해야 한다. 오직 꿈에서 벗어나야만 꿈을 이룰 수 있지만, 그저 벗어나기만 해서는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저와 같은 꿈(환각)과 현실 사이의 필연적인 회전은, 혼란스러운 나선을 그으며 상승하지 않던가. 이 나선이야말로, 온갖 고난과 시련, 고민과 성취, 호기심과 탐구, 좌절과 극복으로 점철되어 있을 모양인데. 거기 기준 자리엔 꿈과 현실 사이를 회전하는, 더욱 추상적이고 경험적인 재차 현실이 자리하며 그 유효성을 예의 제3의 시선으로 탁마하고 있지 않던가(거기선 현실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있을 모양이다).


현실과 환각(꿈)을 가로지르는 이 재차 현실은, 몽유병을 포함하는 이 나선의 충분히 추상적이고 경험적인 층위의 현실은 온통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혼란을 견디지 못할 적 혹자는, 혼란 이전의 상태를 가정하여 이상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 인식 이전의 환각 상태란 없을 모양이다. 그가 자기 역사 속에서 환상을 상상하는 그 시절조차, 그가 그 환상을 가정했던 동기 또한 탈출하고자 하는 현실을 아울러 ‘우선’ 인지했던 덕택일 모양이니. 더욱이 환상은 현실을 재료 삼을 수밖에 없으므로, 환상과 현실 인식은 최소한 아울러 태어났을 테다. 혹은 현실을 먼저 인식했거나, 최소한 둘 중 선후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을 구분하는 잣대가 어느 날 태어날 뿐일 양으로, 저 태곳적부터 이미 그는 ‘환각’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실 인식 이전에 환각만 인식하는 상태가 있다고 가정하는 건 화자가 얼만치나 도망치고 싶은지만 반증할 뿐이다. 차라리 환각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우선 있었으리라.


그처럼, 현실 인식 이전에 환각만 인식하는 상태가 있다고 가정하고 거기로 돌아(사실은 돌아가는 게 아니지만)가고자 하는 건, ‘천재’를 가정하여 숭배하는 풍속과도 관련이 있다. 무엇을 익히거나 배우지 않아도 내면에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는 가설은 예의 도피와 관련 있을 모양이니. 내면을 깨달아 현실을 초월한다는 주장 아래 그가 초월하고자 하는 건 오직 감내하기 싫은 노력이나 고난, 번뇌의 현실뿐이다. 그와 같은 내면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현실을 누리는 즐거움이나 현실 속 사랑을 초월하지는 않고, 도리어 거기 멈춰서서 겪으며 누리고자 하지 않던가. 다만, 삶에 속해있는 죽음, 불편부당, 부조리, 번뇌만 선별해 초월하여 부정하고자 하는 양태를 보이곤 하는 모양으로.


거기엔 최초의 대상관계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관성도 섞여 있다. 현실과 환각 각각에 ‘굳이’ 부정과 긍정을 배분하며 나누는 양태가 거기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제3의 시선을 매개하지 않고, 그처럼 현실에 상호작용하지 않고 스스로의 환각 속에서의 자족을 가정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천재’를 가정하며 곪아가다 언젠가 어느 날 비로소 ‘신’을 상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신성’이 있다는 가설 아닌 가설이 비로소 청자로 하여금 정당화하도록 도와주는 이 흔해빠진 도피는 과연 무슨 증상을, 어떤 양상의 자기 신격화(과대망상)를 보여주는가?


그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자기 자신을 낳은 자아. 또는, 어미의 신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영영 붙어 존속하는 태아의 뇌는 마치 자족을 자칭하는 듯, 태곳적 향수 속에 거주하는 양으로 스스로 전시하는 중 아니던가. 비로소 그 무슨 제3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자랑스러운 저 환각 내부에서, 의기양양하게도 무구한 여타 등장인물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는 양으로 연출된 자기 소유의 소위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얼마간 얼마나 뿌듯해할는지.


‘가여운’ 유아를 자족하는 신성으로 탈바꿈하고, 당 유아를 가여워하던 인물들을 점점 더 가엽게 다시 탈바꿈하고자 애쓰며 현실을 환상으로 점차 뒤집고자 하는 이 서사는 예의 ‘신성’을 그토록 아이러니하게 그리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관객으로 하여금 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만 자족적인 ‘신성’ 혹은 ‘신’을 목격하게끔.


따라서, 환각 속에서 스스로 신이 된 언젠가 가여웠던 유아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현실’의 인물들을 ‘가여운 것들’로 뒤집어 정의내리고자 애쓸는지. 그리하여 스스로 신이 되고픈 현실 속 ‘가여운’ 자칭 유아들이 현실의 인물들을 향해 어찌나 저 말의 용법을 활용하여 외치고 싶을는지.

‘가여운 것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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