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 Mar 08. 2024

영화 ‘파묘’ 리뷰

설명서와 주술

사용법에 대한 ‘설명서’는 원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 이 ‘설명서’는 얼마간 주술적이다. 그리고 사용법을 익히는 게 ‘설명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수록, 그리하여 인간이 타고난 직관이 곧장 ‘설명’으로 통용될수록 다수의 사용자가 이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주술적으로 사용한다. 다수의 일반인은 스마트폰의 원리 따위를 알 리 없으나 사용 방식은 잘 안다. 그와 같이 사용성과 원리의 괴리가 클수록, 사용자가 원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는 동시에 직관적으로 그 사용성을 익히기 편할수록 더 많은 사용자가 이를 손쉽게 사용하고 있을 양이다.

오늘날 하나의 기계를 만드는 과정에도, 종종 모든 부품과 작동을 다 아는 종합적인 전문가는 없을 수 있다. 그저 부품의 이름과 그 부품이 대략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을 텐데. 부품의 작동 원리나 재질, 또 부품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는 예의 ‘설명서’라는 주술에 의존하여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명서’는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협력하기 위한 약속의 체계이기도 한 모양이다.

과학자들의 연구 또한 저기 저 ‘설명서’가 필요한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맨눈으로 DNA를 살필 수 없다. 자동차를 타면서 자동차의 모든 원리를 꿰고 있을 수도 없다. 어떤 과학자는 다른 분야의 과학자가 알고 있는 걸 모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과학자는 자기가 연구에 사용하는 도구의 사용법만 알고 그 원리는 모를 수 있다. 여기서 ‘설명서’는 ‘원리’가 아닌 사용법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명서를 읽고 이해하는 소위 합리성은 과학에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만으로 세계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고, 만약 있다고 한다면 분야가 특정되지 않는 일반 과학이 과학 자체의 전 분야를 단숨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과학도 각각의 분야가 나뉘어 있다. 또한 ‘설명서’는 나름의 합리성을, 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이는 과학이 아닌 분야의 합리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예컨대 어떤 이는 인간의 상상이 어떤 패턴(질서)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미 그 자체로 ‘상상’의 ‘합리성’이 작동하는 중이라는 주장 아니던가(허나 상상에 합리성과는 다른 질서가 있다는 말은, 상상에 질서와는 다른 질서가 있다거나 합리성과는 다른 합리성이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의 우스운 모순이다).


그와 같이, ‘설명서’에서 제시하는 사용법이 ‘원리’ 자체와 점차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네 합리성 또한 사용법의 합리성이나 원리의 합리성과 같이 세부적으로 쪼개져 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도구에 ‘설명서’가 반드시 붙어 있는 건 아니다. 또한 사용법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반드시 거기에 그 원리가 함께 발견되는 건 아니다. 너무도 많은 분야가 ‘사용법’이 먼저 발견된 이후에 ‘설명서’를 제작하고, 그 후에야 ‘원리’를 탐구하는 순으로 진행되곤 한다. 반드시 원리부터 출발할 순 없다.

이를테면 언어가 그러하다. 먼저 사용하고, 그 사용법에 대한 설명서(문법)를 작성하고, 그러한 언어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리’가 연구된다. 물론 어떤 학문은 반대로 진행된다. 원리가 발견되고, 원리에 의한 도구가 발명되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인 설명서가 작성되는 양으로.

우리 삶은 어떠한가? 삶의 원리라는 헛된 본질 따위가 삶 자체보다 과연 먼저 발견되었나? 발견조차 삶을 전제한 위에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저 의기양양한 삶의 원리 따위가 사후적으로야 겨우 도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제아무리 누군가 태어나면서 자기는 이미 삶의 원리를 알고 있는 ‘천재’라고 진중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코믹하게 우기더라도, 우리가 삶을 대하는 건 우선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삶을 우선 사용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던가.

무수한 분야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조차 우리는 사용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삶 자체에는 선제적인 ‘설명서’도 없다. 아이는 자기 몸을 사용하여 우선 걸음마를 현실에서 경험하며 익혀야 한다. 거기에 ‘합리성’은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 설명서 없는 사용성의 주를 이루는 건 ‘현실 경험’이다. 그렇게 우리가 ‘설명서’ 없이 오직 직관으로 ‘사용법’을 익힐 때, 무얼 기준으로 작업한다고 할 수 있겠나? 시행착오라는 ‘현실 경험’ 속에서 우리가 다루는 건 오로지 ‘유효성’이다. 그것이 다시 어떤 현실 경험을 배출해 내는지와 같은.

여기서 사용법에 대한 ‘설명서’는 원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 이 ‘설명서’는 얼마간 주술적이다. 더욱이, 설명 없이 사용법을 먼저 익힌 이후에야 비로소 써 내려가는 설명서의 내용은 그 사용자(저자)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대한 저기 저 무수한 ‘설명서’들은 이미 하나의 주술 더미다. 거기엔 사용자들의 무수한 역사(시행착오)가 그 뒤늦은 날개를 펴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어마어마하게 넘쳐나는 이 ‘설명서’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거기서 나름의 합리성들을 때마다 다시 읽어내야 한다.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아우르는 명목상의 합리성이 아닌 그저 나름대로의 합리성들, 질서들, 그러니까 현실 경험의 유효성들을 찾아내야 한다. 종종 저것이 과연 ‘설명서’인지 ‘주술’인지 구분할 수 없는 건 당연할 양이다. 모든 설명서가 얼마만큼은 주술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주술 또한 얼마만큼은 설명서일 테니까. 이를테면, 우리가 원리를 모르는 채 사용하는 스마트폰만큼이나 복잡한 주술로 이루어진 주물은 실로 찾기 어렵지 않나.

가령 어떤 상상에서 무슨 합리성(패턴/질서)을 찾아내듯, 주술에서 나름의 합리성을 찾아내는 건 ‘설명서’의 질서(합리성)를 통해 사용법을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터다. 실상 삶에 대해 종종 그 사용법(실존)이 원리(본질)에 앞서있듯, 그게 종교건, 과학이건 우리 삶에 속해 있는 무엇이건 간에 얼마만큼은 그 실존(사용법)이 본질(원리)에 앞서 있지 않겠나.

물론 어떤 ‘설명서’는 ‘사용법’이 아닌 ‘원리’를 설명하고 있을지 모르듯 누군가의 ‘본질’은 ‘원리’가 아니겠고, 또 기실 본질이라는 용어의 사용법을 살피자면 저기 저 ‘본질’은 그저 주장을 극적으로 이끌기 위한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에 불과한 임의적인 개념이겠으나.


매거진의 이전글 드라마 '살인자ㅇ난감'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