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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10. 2024

영화 ‘마더’ 리뷰

애증과 죄책감

애증(사랑과 증오)의 목적지는 언제나 이상형이(었)다. 유아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현실을 이상으로 곧장 동일시하며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사랑’하다가도, 그 괴리를 부인할 수 없을 만치 내몰리고 내몰리던 언젠가 비로소 그토록 이상으로부터 동떨어진 현실을 온통 ‘증오’하기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증오를 극복하면, 그는 자기와 같이 그저 운명에 나부끼는 한 명의 인간, 한갓 사물, 그처럼 그저 덧없는 운명들을 타자들로부터 발견할 뿐일 테다.

그렇게 그는 사랑과 증오를 거쳐 자기도 모르게 통합에 다다르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사랑했던 것과 증오했던 것이 어쩌면 같은 것이라는 미묘한 ‘통합’의 과정 위에서, 그 끝나지 않는 길 위의 어느 날 그는 비로소 ‘죄책감’을 다루고자 하는 시행착오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멀고 멀어 마침내 그 과녁에 이를 수 없는 길이리라.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끝내지 못한 와중에 마침표를 찍게 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구할 순 있다. 멀고 먼 길을 돌아서, 그의 ‘증오’의 대상이 매번 그 배역을 달리하며 그에게 극적인 감정를 퍼 올리는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의 대상 또한 매번 그 배역을 달리하며 그에게 극단적인 감정을 퍼 올리는 걸 감수하면서. 그렇게 혹자는 그 자신의 증오를 자기 사랑만큼이나 인정해야 어딘가 이를 수 있듯, 마찬가지 다른 혹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자기 증오만큼이나 인정해야 어딘가 이를 수 있으리라.

저 대상은 우리에게 언젠가의 부모였고, 친구였고 연인이었으며, 또 불한당이었고, 관객이었고, 우상이었다. 이 무수한 미증유의 딜레마 아래서, 곧,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얼만치 뻔뻔해야 할지, 얼만치 죄의식을 느껴야 할지 때마다 다시 가늠하고 또 가늠해야 했다. 사랑이건 증오건, 처음 누군가에게 정렬되었던 저 힘은 그 대상을 달리하며 점차 흩어지고 모이고 모양을 달리하며 굳어졌다 유연해졌다 해 간다. 담겼던 그릇들을 지나가며, 각각의 그릇에 찌꺼기가 남는다. 힘은 한 번에 다양한 대상에 나뉘어 담기기도 하고, 갑자기 그릇을 상실해 허공을 떠돌며 애도하기도 한다.

언젠가, 그게 제아무리 동전의 양면일지언정, 사랑과 증오는 명백히 다른 그릇에 담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그저 단순하고 명료한 길을 벗어나면, 또 언젠가 둘 모두 같은 그릇에 섞여 담긴 심연에 다다르는 순간 그는 ‘죄책감’을 감내해야 한다.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날것의 자기 증오가 미안한 어느 날은, 혹은 오래된 무던하고 습관적인 증오를 뛰어넘어 혹자를 끝끝내 사랑하게 된 어느 날은 당사자에게 바로 이 죄책감의 무게를 다루도록 강제한다.

상대의 심연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그리 서로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또 증오할 수밖에 없지 않나. 어떤 이는 그의 사랑에 증오로 답하며 그의 마음에 못을 박기도 할 터다. 또 어떤 이는 그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어가며 그를 떠안기도 할 양이다. 어쩌면 분명 우리 각자는 약한 면이 있고, 그리 약하다는 건 다만 증오가 많다는 걸 의미하지 않듯 그저 사랑이 많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지 않겠나. 그저 저와같이 시끄러운 애증에 저토록 쉬이 휩쓸린다는 걸 뜻하지나 않을는지. 그리고,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심연을 들여다본 그 역량만큼, 누구에 대한 죄책감인지 모를 어떤 죄책감에 전적으로 휩쓸려 직면하여 시달리다 비로소 언젠가 이를 다룰 수 있게도 되지 않겠나.

이 애증의 대상 앞에 서서, 누군가는 죄책감에 짓눌려 오로지 사랑으로 그 자신을 내던지는 식으로, 또 누군가는 죄책감에 짓눌려 증오로 그 삶을 모조리 벼리는 식으로, 그렇게 이 대상 앞에서 다루지 못한 죄책감은 언제나 길에서 혹자를 극단적으로 이탈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지만, 매번 그는 길 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으리라는 걸 언젠가 알았던 덕택에, 우리 자신이 고착된 이 대상이 어떤 관계 양상을 증거하고 있던, 그게 어찌나 대단하게 정당하건 혹 부당하건, 우리 정신은 끝끝내 우리 행동에 따라잡히고야 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물론, 도망칠 수 없진 않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온갖 타인에게 죄책감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굳이’ 계산된 고상함의 언변을 벼리는 것. 그리하여 행동으로부터 정신이 하염없이 도망치는 것. 마침내 그 위태로운 자랑스러움만 남기고자 ‘현실’을 비하하고 ‘자아의 존재론’을 과대평가하는 것. 그처럼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그렇게 온갖 ‘경박한’ 타자가 자신을 질투하고 두려워한다고 쫓겨 믿으며 최후까지 스스로 외면하여 고상하고자 하는 위태로운 의기양양함을 이어가는 것. 그리하여 죽기까지 행동에 정신이 따라잡히지 않았다며 스스로 힘껏 비대한 암시를 거듭 거는 식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스러지는 스스로 다행하다는 삶도 분명 있으리라.

한편으로, 어쩌면 공공연한 비밀 위에서, 아울러 만천하에 공개된 증오 아래서, 어색한 표정으로 사랑을 속삭여야 할 적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다루지 못할 엄청난 죄책감을 저 아래 은닉하여 없다고 부정한 채 이는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식으로 비명 지르는 내면의 압력 속에서 그처럼 겨우 연명만 하거나,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기 위해 누구든 죄책감을 뒤집어씌울 전략적 선점의 순간만을 늘상 고대하며 과녁 잃은 보복(원망)의 무차별적 기회만 노리는 등의 극단적 도피(해방이 아닌 해소)를 검열하여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애증과 그에 비롯한 죄책감 '우선' 마주해야 하지 않을는지. 그러니까, 일단 마주해야 언젠가 비로소 휩쓸리지는 않을 수 있고, 나아가 다룰 수도 있지 않을는지.

설령 무수하게 실패하더라도.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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