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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17. 2024

영화 ‘위대한 개츠비’ 리뷰

개츠비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었다. 마치 1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지진도 탐지해내는 정교한 기계에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높은 감수성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감응력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 맥빠진 감수성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희망을 찾아내는 비범한 재능이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밤중에 잠자리에 들면 더없이 기괴하고 환상적인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계가 세면대 위에서 째깍거리고 달이 그 촉촉한 빛으로 방바닥에 뒤엉켜 있는 그의 옷을 적실 때면, 그의 머릿속에는 말할 수 없이 현란한 세계가 펼쳐졌다. 졸음이 몰려와 생생한 장면을 망각의 포옹으로 닫아버릴 때까지 그는 밤마다 그 환상의 형태를 늘려나갔다. 한동안 이런 몽상은 그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출구가 되어주었다. 그 환상들은 현실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충분한 암시였고, 반석 같은 이 세상도 요정의 한쪽 날개 위에 안전하게 놓일 수 있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피츠제럴드 / 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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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인물과 비교하자면, 지금 나라는 인물은 좌절당하고 패배당했으며 자기가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상상만 할 뿐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충만한 삶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를 보았으며,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나로선 전혀 지니지 못한 삶이었다.

필립 K. 딕 / 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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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승인하기 싫을 현실 앞에 멈춰 서서는, 이내 힘을 빼고 고개를 돌려 소위 회복되어야 한다는 저 ‘과거’에 적극적으로 잠길 적이 얼마나 자주인지. 마주한 통증마다의 뒷면에선 어찌나 빈번하게 추억이란 이름의 감미로운 도피처가 우리에게 그토록 쉬이 휴식의 자리를 내어주곤 하는지. 그렇더라도, 그처럼 과대평가되던 기억―설령 그게 전혀 과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각인일수록 더더욱―을 온전히 돌이키는 게 끝내 불가하다는 건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게 아닐는지.

상실의 경험 다수는 다음번 좌절을 더 잘 견디도록 격려하기도 한다지만, 이와 달리 처음부터 상실을 그 자체로 외면한 정신에겐 때때로 상실 이전 시간에의 이상화를 독려하여 그의 현재를 낭떠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는데. 그와 같이 삶 전체를 특정 이상에 전부 던진다는 자랑스러운 낭만은, 실상 언젠가 잃어버린 욕망을 여태 포기 못 한 노폐물로만 보일 적이 없지 않다. 기어이 파국을 무릅쓰는 모습은, 한 톨의 낙망도 납득 못 했던 어제의 여파로서 여전히 나약한 오늘이 끝끝내 스스로의 함정에 절뚝거리며 빠져드는 걸음걸이로 목격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당면한 모든 정황을 꿰뚫는 제아무리 궁극적인 희망도 어쨌거나 미래를 지목할 순 없겠다. 이는 우리가 아는 과녁만을 오로지 욕망할 수 있는 덕택이다. 각자의 앎은 본인만의 흔적으로 점철되어 있고, 안으로부터 어떤 형식으로 기워져 있는지에 따라 쉽사리 부푼 상상이 기어이 의식 위로 배설될 적도 있는 모양이니. 그처럼 매번의 도피를 통해 배우곤 하는 건, 예의 환상을 삶 위에 이룩하는 방법 따위가 아니라 우리네 삶이 자신의 환상을 마침내 따라잡기엔 너무 많은 꿈을 꾼다는 사실이겠다. 즉, 이로써 도달하는 지식이란 겨우 ‘누구나 무수하게 꿈꾼(꿨)다’는 통제할 수 없는 ‘평범성’ 정도에 불과할 터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때마다 꿈에 입장하여 벗어나길 거부하곤 하는 까닭이 그리 만들어낸 환상들에 과잉 만족한 덕택일까? 그럴 리가.

가령 여기 ‘불안’을 덧붙일 수 있으리라. 머릿속 여러 사고 실험들이 대상 없는 공포라는 ‘불안’에 기인한다 여겨지기도 하듯, 이런 불안이 실시간으로 거듭 소환해 다루곤 하는 게 ‘미래’든 ‘불행’이든 혹 온갖 가능성이 뒤섞인 총체적인 무엇이든 간에 실은 이 ‘불안’을 모조리 무시하고자 하는 저 오래된 미몽들이 비로소 종합적인 파국을 감수해야만 하는 건 처음부터 조금의 불안도 감수하기 싫어 상실을 부정해 왔던 덕분일 성싶다. 그렇게 누군가는 몸소 제작한 공상 속 청사진을 재차 삶에 구현하고자 애쓰느라 코앞의 필연성을 연산할 겨를이 없었는지. 허나 이처럼 도주해 다다르고자 하는 땅이 도무지 아름답다손 치더라도 그는 도달 못할 낙망에 영영 서 있고, 따라서 몽상 중에조차 그가 실제로 사는 곳은 오직 꿈 바깥 허름한 어딘가다. 그리하여, 그의 필연성(해결책)이 출발하는 자리 또한 마찬가지 장소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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