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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05. 2024

이입의논리

도서 ‘게임: 행위성의 예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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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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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개요
 - 1 예식
 - 2 게임
 - 3 가치 명료성
 - 4 이입
 - 5 수동태
 - 6 능동태
 - 7 게임디자이너
 - 8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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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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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장례식의 규칙은 어떤 목적을 가지는가. 어쩌면 고인을 애도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저 애도를 딛고 여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결혼식의 규칙은 그 목적이 무엇일까? 축하인가? 그렇다면, 그저 그 목적에만 부합하면 나머지 규칙들은 꼭 지키지 않아도 되나?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조문객들이 장례식에서의 ‘애도’를 예식 이후로도 계속해서 의무적으로 수행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객들이 결혼식에서의 ‘축하’를 예식 이후 계속해서 의무적으로 수행할 필요도 없다. 장례식이든 결혼식이든, 그 목적(애도, 축하)은 얼마간 명료하다. 물론 각각의 ‘예식’에서의 ‘목적’을 ‘예식’ 이후로 들고나와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을 뿐. 게임(놀이)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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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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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행위성을 기입하게 하고, 행위의 유효성을 토대로 예의 행위성을 반성하게 하고, 반성을 토대로 플레이어는 자기 자신만의 라이브러리에 해당 행위성을 등록한 후, 이를 다시 다른 ‘플레이’나 ‘현실 행위’에 활용하도록 돕기도 하는가 보다. 이를테면, 장례식이나 결혼식과 같이 각각의 게임은 때마다 명료한 목표가 있고, 이 목표는 일회성이며, 매 일회성인 목표를 통해 그 과정(고투)을 플레이어에게 얼마간의 레퍼런스로 남기는 모양이다.


가령, 승패를 논하는 게임에서의 행위의 유효성은 물론 ‘승패’에 기반한다. 게임 바깥에서의 가치와는 관련 없이, 게임 내부에서 특정 행위가 그 목적에 대해 얼마나 유효성이 있었는지, 그리하여 저와 ‘승패’와의 영향 관계는 어찌 되는지 게임 내부의 가치를 게임 바깥에서 ‘반성’하다 보면, 게임 바깥에서의 현실 행위성의 ‘역량’이 증가되어 자율성이 강화되는 식이다. 그리하여 과정에서의 ‘역량’ 혹은 ‘즐거움’을 위해, 게임 내부에 설정된 ‘목표’는 이와 같은 게임 밖에서의 반성의 순간 ‘일회성’으로 탈락해야 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목적이 아닌 미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플레이어가 플레이 중에는 바로 이 미끼를 미끼가 아닌 진정한 목적으로 간주하도록 스스로 이입해야 한다. 이 미끼는 디자인된 게임 설정 내에서만 작동한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미끼를 전적으로 물고자 욕망하도록 디자인된다. 그가 전적으로 이입‘하지’ 못 한다면 플레이(고투/과정)를 즐길 수 없고, 예의 쾌락뿐 아니라 플레이 자체에서 등장하는 여러 이점을 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최소한 플레이 중에는 전적으로 플레이에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플레이가 끝나면, 일회성의 목표로써의 미끼가 부속품으로 지니고 있던 그 모든 ‘가치’들을 모두 벗어나 게임 밖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이 현실 위에서야 게임 속 플레이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리 반성된 레퍼런스들은 비로소 그의 역량(행위성)으로 등록된다.


게임의 실행 중으로 보면 플레이의 목적(미끼)은 ‘이입의 대상’이지만, 실행 후로 보면 플레이 자체가 ‘반성의 대상’이다. 특히 게임의 미끼가 과도할 정도로 명료한 경우, 이 미끼에의 이입과 플레이에의 반성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중첩된다. 균형은 이 중첩에서 도래한다. 게임을 플레이할 적엔 명료하게 당 게임의 미끼를 물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면 곧장 거기서 나와야 한다. 명료한 목표는 명료한 행위성을 구현하도록 플레이어를 종용한다. 그리 담금질 된 행위성들이 현실에서 조합되어 활용되는 것이다. 그는 게임에 전적으로 이입할지언정, 게임이 끝나면 곧장 이입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임에서 연마한 ‘행위성’은 ‘도구적’이다.


이입하고 벗어난다. 여기서 행위성의 유동성은 행위성 자체와 아울러 연마된다. 계속해서 이입하고 벗어나다 보면, 우리는 잘 이입하고 잘 벗어날 수 있다. 그런가? 무수한 게임에 이입했다 벗어나는 과정은, 우리가 그동안 라이브러리에 등록한 행위성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불필요한 행위성의 전원을 끄는 작업 또한 능숙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유념해야 하는 건, 현실은 게임과 같이 명료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명료한 가치의 환상은, 수업의 목적을 학점으로 환원해 원하는 내용의 수업보다는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수업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인다고들 한다. 또한, 여느 교수의 수업 진행 방식으로 하여금 지식을 맞춤형으로 전달하기보다는 학생들의 긍정적인 리뷰를 의도하며 전달하는 식의 관성을 만들어내게 할 위험이 있다고들 한다.


살펴보면, 게임은 명료한 목표에 의존하는 행위 모델이고, 게임을 통해 각각의 행위성을 낱개로 연마하여 자기 라이브러리에 등록한 ‘행위성’은 현실에서 조합하여 사용 가능하다. 다만, 현실은 게임과 다르므로, 게임에서와 같이 ‘명료한 목표’를 가정하기 시작하면 ‘도덕적’ 혹은 ‘역량적’인 오류를 뱉을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의 목표는 게임에서의 저 명료한 ‘미끼’와는 달리 대다수 ‘복합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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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 명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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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마따나 모든 게임이 가치 명료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승패와 아주 상관이 없거나, 그저 웃기 위한 게임도 있는 까닭이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가치 명료성’은 종종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무 성과에만 치중한 업무수행 방식이 유발하는 어떤 ‘불친절’처럼.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우리는 그토록 자주 모호한 가치를 우회하기도 해야 한다. 명료하지 않은 상황을 ‘굳이’ 명료하게 만드느라 감수하게 되는 비용들을 무수하게 목도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이 ‘가치 명료성’에 의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온갖 문학, 영화, 회화 등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데서도, 끝내 이 감상을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기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기실 예의 ‘작품’들도 무언가(감동이나 재미, 의미 등)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 역할을 하는 셈이고). 그리고 여기서의 기호는 명료하지 않은 ‘경험’이나 ‘관념’을 얼마간 명료하게 만드는 일종의 약속이다. 우리는 꼭 ‘언어’가 아닌 그림이나 이미지, 소리나 리듬을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명료화를 시도한다.

가령 ‘착하다’라는 기호의 ‘모호한’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명료하지 못한 모호한 상태 그대로의 기호인 ‘착하다’로 개별 상황마다 방치되어 적용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친절하다’라거나 ‘다정하다’라거나 ‘배려가 많다’는 등의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호로 때마다 대체될 수도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가치 명료성은 보다 고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모호하고 복합적인 상황에서도 이를 명료하게 만들고자 시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기만 할 뿐 유효하지는 못한 무수한 과잉 명료화를 목도할 수도 있다. 허나 이는 보다 정확해지고 명료해지기 위한 시행착오가 아니던가. 누구도 단숨에 천 리 길을 갈 수는 없을 모양이니. 일단 한 걸음의 명료성을 위해 걸음마를 시도해야 하지 않나.

하나의 모호한 의미를 여러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들의 ‘관계’로 번역해 내는 것은 ‘가치 명료성’을 고도화하는 일이지만 ‘단순화’는 아니니까. 말하자면, 이는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한 작업인 셈이다. 게임의 행위성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우리는 공을 던진다는 낱개의 행위가 가지는 모호한 맥락을 여러 상황에 따라 분리해서 습득할 수 있다. 야구공을 던지는 투수의 행위, 농구공을 패스하는 행위, 농구에서의 슛 동작으로써의 공을 던지는 행위 등.

그와 같이, 일종의 고정관념을 마주할 적에도 덮어놓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자꾸 자기 최면을 걸면서 예의 고정 관념을 잊고자 하기보다야, 해당 고정 관념이 적용되지 않는 세부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고정되어 있던 관념이 유연하게 고도화되면서 예의 고정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 않겠나.

가령 우리는 모호했던 우리 감정을 글로 쓰면서 보다 명료하고 대처 가능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모호한 자기 자신이라는 ‘경험’을 기호라는 ‘인터페이스’로 구분하여 분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그에 비롯한 여러 (관념의) 고도화들이 그러하듯, 우리 행위성의 라이브러리에도 하나의 동일한 행위(공을 던지다 등)일지언정 각기 다른 맥락(농구, 야구)의 ‘행위성(맥락)’들이 별도의 ‘인터페이스’로서 등록되어 있을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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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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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게임에서의 미끼와 같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의 목표는 설령 좀 추상적일지언정 명료하다. 그건 ‘애도’나 ‘위로’, 혹은 ‘축하’가 될 수 있다. 게임이 아닌, 그러나 목표가 명료하기는 한 이 예식들(결혼식이나 장례식)은 게임만큼이나 행위성의 효율을 지향하며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예절을 그 행위성으로 등록한다. 우리 예절의 라이브러리엔 아마 무수한 행위성이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예절과 유사한 행위성을 우리네 라이브러리에서 찾자면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일 수도 있을 양이다.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킹으로써 ‘날씨가 참 좋죠?’ 혹은 ‘비가 오는 군요.’ 등의 대사와 ‘무해한’ 표정은, 게임만큼 효율적인 뭔가를 기대할 순 없더라도, 침묵을 깬다는 일회성 목적에는 종종 부합한다.

게임에 ‘설정’이 주어진다면, 현실에는 ‘상황’이 주어진다. 게임에 이입한다면 현실에도 이입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게임에의 이입에 실패할 수 있다면, 현실에의 이입에도 실패할 수 있다. 너무 지루한 게임이라는 단순한 사례에 응하자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입’에 실패할 수 있듯. 그러고 보면 이입의 대상은 오직 ‘가상’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은 셈이다.

우리는 소설에 ‘이입’한다. 영화에 ‘이입’한다. 게임에 ‘이입’한다. 자기 자신의 현실에 ‘이입’한다. 초점은 ‘이입’으로 인해 등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입(동일시)으로 인해 자리 잡는 ‘행위자’다. 우리는 소설 속 여느 행위자와 동일시하고, 영화 속 여느 행위자와 동일시하며, 게임의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면서, 현실에 속한 자기 자신에 동일시한다. 한편, 나머지 매체에 대해 그러하듯, 우리는 현실에 속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괴리시킬 수도 있다. 때때로 이는 유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큰 결정을 앞두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에 집중을 조금 한다든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앞에서 한동안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려 둔다든지. 행위성으로 치자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괴리시키는 행위성 또한 소위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우리네 라이브러리에 얼마간 등록되어 준비될 수 있는 레퍼런스일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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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동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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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동일시)을 통한 행위성은 ‘학습’되기도 하듯 ‘주입’되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친 만화 영화의 주인공들은 종종 관객을 매혹한다. 아이들은 매혹된다. 말하자면 행위성이 ‘주입’된다. 그들은 이입‘하는’ 게 아니라 이입‘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의 환상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고 머릿속으로 이입(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몽상 속에서 ‘악’을 물리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만화 영화의 주인공에 이입된 모습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모습의 가상의 혹은 현실의 학우에게 ‘이입’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이입을 통한 목표는 명료한가? 종종 명료하다. 악을 물리친 영웅의 ‘영광’이나, 한 가닥 선생님의 칭찬이나 뭐 그런 것들. 그러나, 거기 이입되고 있는 아이가 정작 매료된 건 그런 목표가 아닐 수 있다. 여기서의 미끼는 영웅의 영광이나 선생님의 칭찬이라기보다, 그 과정에 있을 수 있으니. 미끼는 선생님의 ‘칭찬’ 자체가 아니라 ‘칭찬을 받는 자기 모습’이라는 이미지일 양이다.

동일시(이입) 가능한 이미지는, 당사자가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역할’을 역할의 일회성 목표와 함께 미끼로 던진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동안에도, 이전에 구현해 두었던 환상을 재생(이입)할 수 있다. 칭찬받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꾸중이라는 상황에 ‘이입’하기 보다 칭찬 받는 자기 모습에 ‘이입’되고자 하면서, 꾸중 받는 현실에서 정신적으로 도망치기도 한다.

무수한 ‘역할’에의 ‘이미지’에 매료‘된’ 아이는 그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동일시(이입)되며 해당 행위성을 자기 라이브러리에 등록하게 된 셈이다. 그는 자꾸 매료된 역할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동일시)하며, 현재 능동적으로 행동(이입)해야 할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게임에 이입‘되는’ 것도, 행위성을 학습하겠다는 목적이라기보다 게임 속 익스트림한 상황에 머물러 있는 가상의 등장인물들에 매혹(이입)되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영웅이든,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가든, 기민한 혁명가나 능수능란한 여우나 고상한 귀족 등의 인물들처럼.

나아가, 무수한 광고는 제품의 성능을 연출하기보다는,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동일시 가능한 이미지를 연출하곤 한다. 유려한 연예인들이 나와서 기꺼이 해당 제품의 소비자가 되는 광경은,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이입하기보다 수동적으로 이입되도록 값비싼 레드 카펫을 거듭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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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능동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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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하면 과거에 이입했던 즐거운 환상이란 행위성의 라이브러리로 돌아가 이를 재생하며 도망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한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직접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상의 미래 인물에 이입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러한 인물을 스스로 구현해 내야 한다. 그리하여 이입한 인물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소위 미디어에서 그토록 말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은 이미지’ 따위에 동일시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를 연출하는 게 아니라, 그저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면서 해결한 인물을 구현해 내면 그뿐이듯.


우리는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이입하는 무수한 등장인물들을 알고 있지 않나. 가령 문학에서 등장하는 그러한 인물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끝끝내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어쨌거나 직접 이입하기는 하지 않던가. 문학의 등장인물이 자기 상황에 이입한다는 건, 어쨌거나 당면한 상황에 대한 규칙을 내면화한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게임에 이입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때때로 명료할 수도 있고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 규칙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치 않았던 미끼를 물도록 종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게임이나 문학, 영화나 다른 매체들로부터 (가상의) 행위성들을 등록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 행위성들을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사소한 행위성이라도 사용하려면 우리는 당면한 상황(현실)에 (능동적으로) 이입‘해야’ 한다.


저와 같이 능동적으로 이입‘한다’는 건 당면한 정황이 다소 매혹적이지 않더라도, 그리하여 가령 실패가 예견되어 있더라도 행동한다는 걸 의미할 모양이다. 어쩌면 주인공의 역할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내부의 행위성을 조합하여 이입하고 또 행위해야 한다. 물론 여기 이 ‘능동적인’ ‘이입’에 관한 매혹적인 ‘이미지’들이 없는 건 아니다. 무수한 만화영화에서, 또 온갖 성공한 이들의 자서전에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들의 ‘이미지’가 등장하기는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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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게임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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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저기 저 ‘이미지’만으론 늘 부족할 터다.


요컨대, 수동적 이입의 이미지는 목표가 쉬이 특정되기도 한다. 악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키는 ‘영웅’의 목표는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한편 고난과 역경에 대한 태도들의 ‘이미지’가 말하는 바도 유사하다. 기실 능동적으로 이입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거기 이입한다면, 결국 당사자는 능동적으로 이입하는 모습에 수동적으로 이입되는 셈이니까.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리하여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운명 위에서조차 서로를 갈구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미지’는, 불가능에 굴하지 않는 ‘능동적인 이미지’로 독자를 매혹하여 독자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예의 이미지에 이입하게 종용하기도 한다.


능동적인 이입은 당장 마주한 상황에 대한 이입이기도 하지만, 여타 특정 상황에 이입하고자 노력하는 행위이기도 할 모양이다. 설령 그 상황이 멋지지 않아도, 혹은 그 상황에 서 있는 가상의 인물(이입의 대상)의 이미지가 멋지지 않을수록 능동적이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그 순간 당사자의 이입은 상황 그 자체에 ‘강제로’ 맞추어져야 하지 않나(우리 정신은 이 ‘강제성’ 혹은 ‘폭력성’을 통해야만 익숙한 관성(동어반복) 밖(사유)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그는 얼마간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해야 한다. 상황의 목표나, 상황에 속해 있는 제도들의 목표나, 상황에 속해 있는 다른 등장인물들 각각의 목표를 추정해야 한다. 그게 제아무리 낯설고 추상적이거나 복합적일지언정, 혹은 모종의 이유로 이를 완벽히 추리하는 게 불가능할지언정 시도해야 한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거기 작동하는 제도들이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거기 속한 다른 인물들이 어떤 추상적인 게임을 하고 있는지 추리해야 한다. 그는 개별 게임 디자이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자기만의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각각의 성향이 어떤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어떤 전략을 짜고 있는지.


그렇게 그는 각각의 다른 인물들이 자기 자신의 게임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상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나아가, 게임 디자이너가 일종의 도시계획자나 건축가와 유사하다는 저자의 은유에 빗대자면, 도시 계획이나 건축의 의도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능동적인 이입을 위해서 그는 그 자신이 플레이어일 뿐만 아니라 게임 디자이너가 되어 각각의 추상적인 규칙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우선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 이입한다는 건, 현실에 속해 있는 다른 이들이나 제도들의 게임이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찾아 연산한다는 ‘목적’을 자기 자신의 ‘목적’ 안에 포섭한다는 의미 아니겠나.


따라서 능동적인 이입의 미끼는, 개별 상황마다의 범위를 설정해야 하는 모호함도 뒤따를 모양이다. 얼마만큼 파악해야 하는가? 과연 할 수 있는 최대로 파악해야 하는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얼마만큼의 체력을 스스로에게 남겨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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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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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는 각각의 상황은, 그리하여 능동적으로 이입해야 하는 얼마간의 범위는 하나의 단위가 될 수도 있겠다. 소위 행위성의 중첩이, 게임 밖에서의 거시적인 ‘목표’와 게임 내에서의 일회성의 ‘목표’를 구별하면서도 포개어진 플레이를 이야기하듯. 능동적인 이입은, 연이어 흘러가는 목표의 전반적인 맥락 안에 단위 상황에 이입해야 하는 목표를 포개어야 할 양이다. 얼마만큼의 범위를 특정해야 하는지는 매 단위 상황마다 다를 텐데. 당 단위를 매번 특정한다는 이 추상적인 목표부터가 손쉬워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고려한다. 상황의 목표, 제도의 목표, 타인들 각각의 목표, 자신의 장기적 목표, 중기적 목표, 단기적 목표, 당장 이입해야 하는 목표, 또한 이 무수한 파악 대상으로서의 목표 범위를 특정해서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재차 목표를 고려한다.

어쩌면 목표는 욕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리라. 결국 이는 타인이나 사회, 제도의 욕망‘들’과 자신의 욕망‘들’의 타협점을 찾아내고자 시도하는 지점에까지 도달할 터다. 예의 단위는 마침내 얼마간은 ‘욕망’에의 단위로 소급되지 않겠나.

예컨대 죄책감이 없는 자와 맞설 때는 의도적으로 죄책감이 없는 인물에 이입하여 거기 맞설 수도 있으리라. 혹, 누가 뭐라건 간에 모종의 이유로 잠시 집요하고 졸렬해져야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보면 우리 ‘행위성’의 라이브러리는 달리 말해 ‘욕망’의 라이브러리를 상속받고 있지 않나. 우리는 타인이나 제도, 또 자기 자신의 욕망을 해석하고 이에 기반하여 행위성을 도모하는 셈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이입은 그저 자기 자신이나 타인, 제도의 욕망만이 아닌 ‘매 단위 상황 자체의 욕망’에 이입하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을 모양이다.

그와 같이 현실에서도 매 상황마다 이입하고, 또 그로부터 벗어나 다음 상황에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이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의 모든 상황을 어쩌면 현실 자체의 역량을 다시 도모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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