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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n 07. 2024

35 프로세스

시즌 4 HOW

그럼에도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소위 노력(가공)의 대상은 쉬이 말해 결함이지, 실상 이는 결함이라기보다 ‘결핍’에 가깝지 아니하던가. 그러나, 소위 결핍은 어쨌거나 당사자가 살아내는 삶의 경로인 맥락을 포함하고 있지 않나. 당 결핍이 결핍으로 작동하기 위한 환경이 당사자가 겪은 과거 자체건, 조건이건, 혹은 그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그 자신의 관점이건 상관없이, 그러니까 어떤 사소한 근거를 통해서건 거창한 명분을 통해서건 상관없이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으리라 스스로 믿는 바로 그 원인 환경이 결핍을 만들어내고 있을 양이다. 여기서의 (인식 결과로써의) 결핍은 이미 앞선 (원인 환경으로써의) 결핍을 한 번 이상 건너온 결과물이리라.


말하자면, 도피하면서 도피하고 있지 않다 믿기 위해 만들어낸 무수한 [재차] 도피(근거)들이 다층적인 도피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퇴로들이, 애초의 함정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의 창조 원인을 그리 부정하며 당사자는 굴레에 갇히곤 하는 것이다. 함정(계시)이 없는데 퇴로(사명)는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퇴로(사명)인가? 함정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졌을지언정, 거기 창조된 퇴로(사명)는 예의 ‘함정(계시)’을 그 원인 삼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동일 원인이 언젠가는 이점이고 언젠가는 결함이라 불릴지언정, 그러므로 자의든 타의든 평가의 대상이 되는 기준을 품은 저기 저 “개성이라는 덫”이 자체 긍정(도피 행위)을 전제로 그 긍정(도피 행위에의 인식)을 다시 부정(도피)하는 굴레의 영원한 동력이 되고 있으리라. 그와 같이, 우리는 애초의 원인(함정)을 애써 부정한 이후에 우리 스스로 종종 섞여 드는 자기모순(도피)의 [재차] 원인을 비로소 무엇으로 재정의(도피)하(고 싶어 하)는가? 여기 자기모순(도피)의 원인은 이제 자기모순 자체(도피로써의 개성)가 되고 있지 아니하던가. 그야말로 신화적 동어반복(도피에의 도피(에의 도피(에의…….)))의 탄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그처럼, 거기서의 원인과 결과, 전개는 모두 ‘도피’로 수렴된다. 동어반복으로 해결되는 듯한 외양을 계속해서 덧붙여 곪아가는 문제의 사슬은, 그와 같이 연이어 증식된다. 중앙의 폐허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무수히 덧붙은 장식들이, 흔히 발견되는 신화적 브랜드(선망의 대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의를 돌리고자 하는 건, 그리하여 신화 자체의 성질이 ‘고착된’ ‘동어반복’의 (도피한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도피하고, 이에 대한 ‘인식(직면)’으로부터 다시 도피를 거듭하는) 고상한 ‘이미지’인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지 않겠나.


하나(도피)가 다른 하나(도피)를 근거 삼는 작동의 사슬이 여기서 ‘마치’ 끊어지는 양 (그렇게 임의의 참칭된 전체(자족)를) 연출하는 방식(도피)으로, 허나 실상으론 (부품으로서) 연쇄되어 등장하는 모양이다.


‘전체’를 보았을 적엔 그게 제아무리 순환 굴레라고 하더라도, 개별 톱니바퀴는 순환의 일부일지언정 순환 자체가 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부품이 스스로 순환하기 시작한다 주장한다고 해서 전체와 같아(동일시)질 순 없을 텐데. 그처럼 톱니가 내부 순환의 완결성을 참칭하기 위해 다른 톱니와 거리를 두고 홀로 (공)회전 한다 주장한다고 해서 부품이 아니게 될 순 없으리라. 실상 여기 톱니가 보복하고자 하는 건 그 자신이 ‘전체’가 아닌 ‘부품’이라는 현실 자체겠다. 그러한 보복의 와중에도, 톱니는 바로 그러한 현실 어딘가 부품으로서 자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가상의) ‘전체’를 보았을 적엔 그게 제아무리 (공)회전이라고 하더라도, 개별 부품은 예의 (공)회전의 일부일지언정 (공)회전 자체가 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자족하고자 시도한다고 해서 전체와 동일해질 순 없을 텐데. 그처럼 개인이 (공)회전의 완결성을 참칭하기 위해 타인과 거리를 두고 홀로 자족한다고 해서, 그 오래된 원망과 보복의 시도가 성공할 수는 영영 없으리라. 다시 말해, 실상 그가 보복하고자 하는 건 그 자신이 ‘전체’가 아니라는 현실 자체이므로. 그러한 보복의 와중에도, 이미 그는 바로 그러한 현실 어딘가에 자신이 보복하려는 과녁 중 하나로 아울러 자리매김하고 있겠으므로.


‘완성’된 자기 원인론으로서 간주되고 설정되는 ‘신성’이 어떤 인격을 ‘굳이’ 그리도 자주 덧입는 건, 저와 같이 ‘전체’를 참칭하고자 애를 쓰는 주체는 언제나 다름 아닌 ‘미완’의 인격체일 수밖에 없던 까닭 아니던가.


기실 결핍조차 어떤 기준 환경 없이 그 자체로는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족적인 욕망도 자족적으로 성립할 수야 결코 없을 텐데. 이는 욕망이 모방하고자 하는 것이 애초부터 바로 이 기준 환경인 까닭이며, 무엇을 ‘욕망’이라 부르고 또 무엇을 ‘결핍’이라 부를지까지도 이 기준 환경에 달려 있는 덕택이다. 그리하여 기준 환경이라는 개인의 믿음 체계가 개인 스스로 오롯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결과라면, 언젠가 개인이 이를 스스로 바꿀 수 있기는 한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말하자면, 어느 누가 거기에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어째서 보복하고자 하는가? 어째서 원망을 멈출 수 없는가? 소위 결핍은 그 용어의 사용 과정에서부터 결여된 무언가를 벌써 가정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욕망은 미래에 대해 보복하고자 하는 데 반해 결핍은 과거에 대해 보복하고 원망하고자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결핍은 어째서 그토록 의기양양하고 짐짓 ‘어른스럽게’, 세상이 얼마나 틀렸고 잘못 보고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세상의 제도적 권위’를 한껏 빌려, 그렇게 곧잘 그리 ‘피상적으로’ 주장하곤 하는가.


과연 저기 저 파도치는 욕망들 중 무엇이 ‘자아(나)’인가? 하며 의문을 품을 적에, 그러니까 과연 저기 저 극단적인 결핍들을 통제해야 한다면 통제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하며 상념에 잠길 적에, 따라서 검열로 결핍들을 통제한다고 했을 때 당 검열 또한 이 통제를 통해 어떤 목적지(욕망)를 겨누고 있지 않던가? 의문에 잠길 적에, 욕망은 당연히 아니고 결핍도 아니고 검열 자체도 아닌 어떤 ‘중심’을 스스로 가정하고 있지 않나? 하며 재차 가설을 세우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몰래, 욕망도 결핍도 아닌 “그것”이, ‘결핍’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은 채 ‘검열’을 도구 삼아 홀로 떠 있지 아니하던가 말이다.


따라서 소위 ‘개성’은 그 개념적 뿌리부터 이미 그것이 우리가 ‘전체’가 아닌 부품이라는 방증인 까닭에, 처음부터 우리가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객관도 주관도 개성도 욕망도 결핍도 아닌, 이를 검열하고 행동하게 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우리가 과연 “그것”을 바꿀 수 있는지의 문제가 ‘늘’ 남는다. 바꿀 수 있다면 또다시 과연 이를 바꾸는 주체는 누구인지 등, 매번, ‘늘’ 그렇게 거슬러 오르면 아무래도 마침내는 때마다의 ‘프로세스(구조의 작동)’ 자체와 마주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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