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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17. 2024

드라마 ‘수사반장 1958’ 리뷰

고발하는 이미지

소위 이야기하는 필연성은, 그 관계 양상의 사슬이 ‘주관’을 타는지 ‘객관’을 타는지 여부와는 딱히 상관이 없어 보인다. 가령 주관으로 치자면 혹자가 스스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필연적으로’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 상상이 제아무리 자유롭다 자신하더라도, 삼각형인 동시에 원이며 사각형인 도형을 떠올릴 수야 없듯 3차원인 동시에 1차원인 공간을 떠올릴 수도 결코 없다. 같은 사물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단순 행위와 완전히 새로운 사물(기호) 자체를 주관적으로 상상해 내는 (관념적) ‘행위’는 (특히 ‘필연’의 층위에서) 아예 다르니까.

창작을 할 적에도 예의 필연성은 여지 없이 발현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혹자의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도 있지만, 얼마만큼은 저자의 의도 하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조향사가 만든 향수를 스테이크에 소스처럼 뿌려 자유롭고 ‘고상하게’ 섭취하는 행위가 향수에의 감상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니. 영화를 영영 안 보면서 그저 포스터만 ‘힘껏 고상하게’ 감상하는 건 ‘영화 감상’이 아니니까.

이를테면 미니멀리즘이 그 함의와 상관없이 하나의 이미지(브랜드)로 전락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기능’ 외의 나머지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라이프스타일로써의 ‘미니멀리즘’은, 언젠가부터 그 무게중심을 예의 실천에서 다만 이미지로 옮겨가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날 어떤 미니멀리즘의 소비자들은 무엇이 불필요한지를 구분하여 여과하는 게 아니라, 저기 저 ‘멋지고 유명한’ 미니멀리즘의 ‘이미지(브랜드)’를 잘 구성하고 동일시하는 잉여 기능의 사치품을 소비할 뿐 아니던가. 기실 언젠가부터 ‘라이프 스타일로써의 미니멀리즘’과 ‘브랜드 이미지로써의 “선망” 어린 미니멀리즘’을 ‘굳이’ 구분하는 순간 여느 관객에겐 필연적으로 여느 ‘모욕감’이 어떻게 뒤따를지 알 수 없는 노릇이 되었다.

애초의 미니멀리스트와 자칭 미니멀리스트를 그토록 ‘관심’을 두고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으나, 어쨌거나 혹자는 그토록 미니멀리스트라는 유형으로 자신을 연출하고자 하는 양이니. 어쨌거나 관념적으로 유형화된 ‘이미지’에 동일시하고자 하는 이런 현상이 ‘관념’의 개념적 내용을 폐기하고 이를 한낱 ‘이미지’로 재구성해 소비하는 양태가 얼마나 많이 발견되는지. 한편, 이처럼 그 개념을 폐기하며 유형화된 ‘이미지’에의 동일시는 무수한 심리테스트를 떠올리게 하지 않나.

혈액형이나 상상의 패턴 등으로 인과관계 없이 타인의 의도를 어림짐작한 후 이를 전제로 논지를 전개하며 떼쓰는 응석받이들과도 같이.

이런 무수한 심리테스트들은 혹자에게 비방아닌 비방을 듣기도 한다. 여타 관념이나 상상의 유형이라는 어림짐작을 자유로운 ‘관념’ 혹은 ‘상상’을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감히? 붙이다니, 인간(사용자/소비자)의 관념적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하며 거품을 물곤 하는. 마찬가지로 MBTI 검사에서 T로 지명되었기에 그가 논리적이라는 게 무슨 놈의 설명이냐고 외치는 어느 유명인사는, 우파라서 보수고 진보라서 좌파라는 동어반복적인 진영논리의 심리테스트로 그 존경받는 삶을 연명하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심리테스트들이 심리 유형을 재단한다. 무수한 문장과 행위, 실천들은 ‘뛰어난 사업가’를 재단한다. ‘창의성 넘치는 크리에이터’를 재단한다. ‘심오한 사상가’를 재단한다. 저 브랜드들은 어떤 개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주의 먼저 끌기 위한 그저 이미지로 파견된 모양이다. 처음 의도나 개념이 어쨌건 상관 없이, 거기엔 ‘자랑스러움’ 등의 형용사만 남아 있다. 그처럼 이른바 대중에게 파견된 ‘개념’이 그저 ‘이미지’로 전락하는 과정은 얼마간 흥미로울 수 있으리라.

소위 지식소매상이, 어려운 ‘개념’을 대중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주장’한다지만, 사실 처음 ‘개념’의 내용 자체가 어려운 데 이를 그대로 보존한 채 쉽게만 풀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보통은, 그러한 풀이가 가져오는 게 ‘이해’가 아니라 ‘이해한 것만 같은 느낌’에 불과하지 않나. 이를테면 강사의 풀이 과정을 어깨 너머로 보고 이해했다고 스스로 퉁 치는 ‘이미지’와 같이. 저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이한다 주장하는 행위가, 그 개념의 구체적 용도와 엄밀한 논증 과정을 그저 느낌으로, 그러니까 그저 이미지로 ‘자유롭게’ 퉁 치는 과정에 불과한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도하는가?


그런 관점으로 소위 내러티브의 특징을 탐독할 수도 있을 테다. 이를테면, 어느 서사의 창작자가 간첩이나 형사를 그 주요 인물로 지명하는 까닭은, 더 다채로운 서사를 담기 위한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형사나 간첩, 요원이나 깡패 등은 사회의 여타 다른 직업에 대한 월권이나 침략을 그 사회적 행위의 기본 규범으로 삼고 있는 덕택이리라. 그런 덕분에 이 등장 인물들은 온갖 새로운 직업, 낯선 행위자들과 접촉하며 서사를 꾸려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모양이고.

허나 이와 같은 등장인물의 전략적 ‘위상’에 관한 패턴이 창작자들 간의 ‘역사’로 굳어지면서, 저와 같이 사회를 횡단하는 등장인물들의 행위자적 특징은 하나의 ‘스타일’로 누적되기도 한다. 요컨대 사회를 횡단한다는 행위자의 ‘위상’과는 별개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라는 역할의 ‘이미지’가 누적되어 별도의 ‘위상’이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놀랍게도, 여타 행위자들과 접촉이 자유롭다는 이점이 그 전략의 출발점이었던 여느 간첩, 요원, 깡패, 형사의 배역들은 이제 다른 행위자들과 접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들만의 사회를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 이르기도 한다.

도시를 점거하는 깡패들, 사회를 횡단하며 아우르는 권력자들, 은밀히 등장인물들을 주시하는 요원들, 저들 간의 알력다툼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들 등이 다채로운 행위자가 아닌, 그저 힘에 치이고 힘을 운반하고 힘으로 나아가는 단일하고도 누적된 이미지들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다채로운 행위자들과 접촉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자에의 설정(위상)이 이제 다른 행위자가 필요 없을 만큼 폐쇄된 이미지에 고착된 셈이다. 마치 처음의 미니멀리즘은 사라지고 (가령 집안 전체를 백색 가구와 전자제품으로만 도배하는) ‘자칭’ 미니멀리스트들만 ‘화려하게’ 남아 있는 양으로.

그러나 더 나아간다. 예의 미니멀리스트들 내부에 관한 이야기는 여느 고발을 담보하기에 이르는데. 가령, 형사, 깡패, 요원 등으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는 관객의 이입을 유발하기 위해 더욱 실감나는 사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실감나는 사건이란, 일반 시민이 평생 몇 번 겪기는 힘들지만 뉴스에서는 수도 없이 들을만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느 시민들이 뉴스를 매개로 아주 멀리 연역하여 우리 사회의 무수한 부정부패의 가해자로서, 혹은 피해자로서 동일시하며 심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것이 무려 이를 위해서였던가 보다.

현실 당사자가 아닌 뉴스 너머로 살핀 깡패, 요원(국정원), 형사, 권력자들의 비리와 아귀다툼을 목도하며, 관객들은 거기 누적된 이미지를 ‘필연적으로’ ‘상상’한다. 마치 여느 심리 유형으로서 ‘뛰어난 사업가’나 ‘창의성 넘치는 크리에이터’나 ‘심오한 사상가’를 목도하듯, 깡패의 유형, 요원의 유형, 형사의 유형, 권력자의 유형을 목도한다. 그리 고착되면 될수록, 임의의 필연성은 그 내부에서도 그토록 원활하게 작동하는 셈이다.

다채로운 행위자로부터 격리된 이들의 ‘고착된’ 상상 속에서, ‘뛰어난 사업가’는 ‘관객이 사는 사회(현실)와는 분리된’ 시장의 부조리와 꿈꾸기 힘든 환경을 ‘극적으로’ 고발한다. 깡패들은 ‘관객이 사는 사회와는 분리된’ 범죄를 고발한다. 형사나 권력자는 ‘관객이 사는 사회와는 분리된’ 관료제를 고발한다. 그와 유사하게, ‘자칭 미니멀리스트’는 돈과 가치가 전복된 사회를, 예컨대 부르주아의 금전으로 받은 교육 위에서 가르침 받은 바로 그대로 사회를 비판하며, 또 그 금전 위의 ‘가르침’을 이어 계승하여 타인을 ‘교육’하는 보상으로써의 금전으로 생을 제 성질껏 누리며 예의 ‘연출된 고발’을 자랑스럽게 재차 계승해 나름대로는 ‘극적으로’ 이어가기도 한다.

이 ‘자칭’ 지성인, 혹은 ‘자칭’ 지식소매상, 또는 ‘자칭’ 학자, 더러는 ‘자칭’ 혁명가에게 겸손이나 진중한 태도, 고뇌에 빠진 자기 모습이 오직 하나의 자랑스러운 선민의식으로써 나르시즘의 동력으로‘만’ 작동하는바와 같이, 거기서는 예의 고발까지도 소위 사회를 걱정하고 쇄신과 혁명을 촉구하는 어른스럽고 인간적으로 연출된 이미지로써의 나르시즘에 관객이 동참하길 독려하고 있지 않나. 여기선 실천이나 노력, 분석, 죄책감, 고민 등은 체계적으로 여과되고 그저 허약하고 인위적인 이미지(자아상)에의 만끽만 나부끼고 있을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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