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멋진 그림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시대가 도래했다. AI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 연구원으로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술이 빨리 발달할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AI가 그린 그림은 예술 작품이 맞는가,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오고 가지만, 여러 이야기들을 들어봐도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저작권과 관련된 여러 아티스트들의 분노에 공감이 가면서도, 대규모의 학습을 통해 기술의 실현이 빨라졌을 뿐, 소규모의 합법적인 데이터셋 만을 사용했었더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강력한 AI를 개발해 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굉장한 파급 효과를 가진 기술이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나 개인을 놓고 보았을 때도 그림을 그리는 AI는 큰 질문을 하나 안겨주었다. '그림 그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인의 본업은 물리학 및 컴퓨터과학 연구이지만, 취미로 10년 가까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 뚜렷한 목표 없이 선뜻 시작해 본 취미가 어느새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해외 생활을 했던 3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매일 주말마다 2시간씩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AI의 등장으로 많은 디지털 아티스트와 지망생들이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AI 기술의 파급력이 실감 나게 와닿지는 않았다. 어차피 AI가 아니더라도, 내가 범접할 수 없어 보이는 굉장한 수준과 독창성을 가진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있고, 따라서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입장에서는 AI가 그림을 잘 그리든, 프로 아티스트가 그림을 잘 그리든, 내가 넘보기 힘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022년에 그린 오일 파스텔화. <레만호 풍경, 에비앙에서>
즉 나로서는 AI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난 뒤에도,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의미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특별히 들지 않았다. 물론 그림을 그저 취미로서 즐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입장이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중요한 건, 그런 스스로의 반응이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한 이유를 무척 선명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취미를 발전시켜 이름 있는 그림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면, 아마 AI의 등장으로 많은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의 정반대의 감정을 느낀 것과, 10년 가까이 그림을 배워왔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명확했다 - 나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는 것. 물론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전체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림 그리기를 조금씩 떼어놓고 본다면 그 속에는 고뇌, 고통, 인내, 두려움, 불안 등등 온갖 어려운 감정들이 다 섞여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향상된 그림들을 그려내고, 그 과정을 통해 한 사람으로서 성장한다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림을 꾸준히 그린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나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게 파고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림을 배우고 있는 스튜디오에서는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코스의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있고, 다음 코스에 진입하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방향을 스스로 정해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그림을 배우면서도, 좋아하는 대상을 따로 선정해 혼자서 그림을 그렸던 적은 별로 없었기에 이런 자율성을 막막하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독일에서 2년 정도 머물었던 시간 동안 그곳에서 마주쳤던 풍경들을 그리는 작업들을 해 본 적은 있지만, 독일을 떠난 이후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좋았지만 언제나 캔버스 앞에서 고민하게 되는 문제로 인해 애초에 선뜻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문제란 바로 '무엇을 그려야 하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독일에 있는 동안에는 무엇이라도 기록에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인해 그곳의 풍경들을 그림으로 담으려는 동기가 있었지만, 떠난 뒤에는 지나간 풍경들에 대한 마음들이 서서히 옅어져 갔고, 자연스레 그림을 시작을 하는 것 자체가 더 어려워졌다.
독일에서 아이패드로 그렸던 그림들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흘러 지금에 와서도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명확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 코스의 첫 번째 그림으로는 그리고 싶은 대상이 있어 미리 생각해 두었지만, 길게 두고 보았을 때 어떤 방향을 탐색하면 좋을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대상을 그릴지' 보다는 '어떻게, 혹은 어떤 재료로 그림을 그릴지'에 주목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고,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현실 세계 위에 곧바로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아이패드 인기 드로잉 앱인 Procreate를 켜면 하얀 캔버스가 나타나지만, 그 하얀 캔버스 대신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보이는 상상을 했다. Augmented Reality 예술과 같이, 실제 세계에 미리 만들어진 컴퓨터 그래픽스 이미지들을 덧입히는 작업들을 종종 보게 되지만, 현실 세계라는 캔버스를 기초로 처음부터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작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막연히 떠올랐던 이 생각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의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오랜 음악 팬으로서 기회만 되면 라이브 공연들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미리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충실히 따라가기보다는 내가 직접 느끼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AR/VR과 관련된 연구도 했었지만,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할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을 펼치기 위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어서였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체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음악이든 여행이든 일이든, 내게 있어선 어떤 장소에서 내 정신을 온전히 집중하고 느끼며 존재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만약 현실 세계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있다면, 그 대상에 깊이 몰입하면서 생생한 느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2달 정도의 실험과 작업을 거친 뒤에 구상했던 앱의 초기 버전을 만들게 되었다.
원래는 풍경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고, 가장 처음의 시도로는 불 켜진 향초를 그려보았다. 오직 1개의 브러시와 2개의 레이어만 있는 기본적인 앱이기에 아직 그림을 그리기엔 불편함이 많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의 가능성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는 조금씩 기능들을 추가하면서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보고, 그 기능들과 그림들 이면에 어떤 고민들이 녹아있는지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그림 그리는 AI 기술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하다 떠오르게 된 프로젝트이다 보니, 아마 언젠가는 AI를 활용한 기술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하나하나의 붓질들이 모여 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집중하고자 한다. 한 번의 붓질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기술들이 필요한 지, 그리고 이를 통해 현실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지 탐구하는 데만 해도 한참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 여정의 기록들을 통해 그림 그리기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