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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색시계 Apr 18. 2023

너와 나, 따뜻함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많은 이들이 '고작 돌덩이' 때문에 울었다고 했다. '고작 돌덩이'가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관객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을까? 2022년 화제작이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필자가 영화를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에 이미 주변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후기와 관심으로 시끌벅적했었다.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필자에게 와닿았던 영화 속 특징적인 몇몇 상징들, 기타 감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1. 인형 눈알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끄는 소재 중 하나는 바로 인형의 눈알이다. 주인공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는 안 그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꾸 온갖 물건에 인형 눈알을 붙이고 다닌다. 나중에는 에블린이 자신의 이마에 직접 인형 눈알을 붙이고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눈알에 무슨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face pareidolia(변상증)'이라는 개념이 있다. 분명 사람의 눈 코 입이 아닌데, 사람들은 흔히 어떤 패턴이나 사물에서 사람의 얼굴 모양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그 얼굴 형태에 감정을 이입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 놀랜드는 배구공에 얼굴 모양을 그려놓고는, '윌슨'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며 얼마나 정을 붙였던가. 이처럼 무생물에 가짜 눈알이라도 붙이면, 그것을 얼굴로 생각하기 쉽다. 얼굴로 여기게 되면, 살아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고, 감정 이입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be kind'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조적으로 에블린의 딸이자 악당 조부 투바키에게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으므로, 모든 생명체가 그저 죽어도 살아도 아무 의미 없는 돌덩이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것들에 눈알을 붙이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조부 투바키(조이)의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에 눈알을 붙여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고 하는 돌멩이 두 개가 낭떠러지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왜 그 장면을 보고, 한낱 돌멩이에 감정 이입을 하여 울었던 것일까? 필자는 돌멩이에 붙어 있던 두 개의 플라스틱 눈이 큰 의미를 지녔다고 본다. 어쩌면 그 장면의 돌멩이 엄마와 돌멩이 딸은, 돌멩이 같은 딸의 마음에 엄마의 사랑이라는 눈알이 덧붙여져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눈 중, 살아있지도 않은, 양산형의 '플라스틱' 눈알일까? 영화에는 모든 세상의 직업과 삶을 자유자재로 가져올 수 있다는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사실 이런 생각도 든다. 주인공과 세금 조사관이 서로의 관계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려면, 사회에서 부여한 역할과 지위를 모두 벗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일상에서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모두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을 가진 양산형 플라스틱 눈알이 그 희망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세상을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2. 엉뚱한 행동들



 싸우다 말고 립밤을 먹으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 어떤 상황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엉뚱한 행동들을 하는 순간, 어떤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다는 영화적인 설정이 있다. 왜 이렇게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행동들을 중요한 설정으로 넣었을까?


 영화의 기본 전제는 '멀티버스'이다. 어떤 상황에서 에블린이 다른 선택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 선택의 결과가 엄청나게 다른 미래를 만들어낸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하느냐 헤어지느냐의 선택부터 시작해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선택 하나하나 까지도, 영수증 더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세탁소의 에블린과, 무술 배우로 무척이나 성공한 에블린 등등 그녀의 전혀 다른 미래의 행보를 정한다. 한 세상에서 에블린이 무언가 행동을 할 때, 다른 세상에서 그 행동이 영향을 미쳐서 사소한 실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팝콘을 쏟는다던지 하는, 집에 돌아가면 기억도 나지 않을 실수들 말이다.


 영화가 이처럼 사소한 행위, 사소한 실수, 사소한 선택 등의 '사소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점잖은 척하는 사람들도 때때로는 살아가다 사소한 실수를 한다. 작은 실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하게 될 때 부끄러운 마음에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러한 '사소한' 순간들까지도 보듬어주려 한 것 같다. '사소함'을 주목하는 여러 장면들을 통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든 행동들, 창피하게만 느껴졌던 작은 순간들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조금 더 멋지다고 생각해 보면 어떠냐고 묻는 것 같다. 립밤 좀 먹어보면 뭐 어때, 어쩌면 멋진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옆자리에 팝콘을 쏟은 일, 사실 다른 세상의 네가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내느라 그랬을 수도 있어. 등등. 영화 속 엉뚱한 행동들이 자꾸 등장하는 이유는, 어쩌면, 창피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사소한 실수들이나, 두고두고 후회하는 선택들에 대해, 그러한 '사소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며 유쾌한 상상으로 바꾸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3. 베이글



 무시무시한 조부 투바키의 핵심과도 같은 블랙홀, 그러나 그 블랙홀은 다름 아닌 '베이글'이었다. 굉장히 대단하고 엄청나야 할 것만 같은 악의 중심점, 왜 하필 베이글일까? 베이글은 무섭기보다는 동글동글하고 무해한 이미지에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을 해 보았다.



 1)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춘기 딸과 엄마가 맞서는 구도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엄마는 딸에게 뚱뚱하다는 소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준다. 그리고 베이글은, 다이어트와는 거리가 먼 빵이다. 따라서 어쩌면 베이글은 뚱뚱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맞서고자 하는 딸의 반항심을 상징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베이글을 찾으면 찾을수록, 엄마의 잔소리에 맞서는 셈이 될 테니 말이다.


 2) 베이글은 굉장히 흔하고 간편한 음식이다. 바쁜 아침에도, 언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음식인 것이다. 그런데 에블린의 삶도 이러한 베이글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영수증 더미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에블린이 등장한다. 에블린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탁소를 운영하며 남편과는 이혼 위기에 처해있다. 그녀는 일상에 매몰되어 버려 그 가치를 점차 잊어버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어디서든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베이글과, 일상에 매몰되어 버린 에블린의 삶.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러한 평범하고 흔한 베이글이 무척이나 강력하고 중요한 대상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에블린은 갑자기 범우주적인 전투를 벌이는 전사가 된다. 이처럼 베이글은 에블린의 삶, 일상에 매몰되어 그 가치를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삶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 가치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재조명해보려 하는 것이다.


 3) 베이글은 크림치즈와도 엮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남편 웨이먼드가 아주 찰나의 순간, 크림치즈가 발린 베이글을 소중하게 먹는 장면이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는 크림치즈를 포함한 유제품이 없다고 한다. 조부 투바키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검고 흉측한 베이글은 존재하지만, 크림치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베이글과 크림치즈는 거의 완전 보완재(일정한 비율의 다른 재화와 함께 소비해야 만족도가 증가하는 재화)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크림치즈가 없는 세상이라니! 어쩌면 영화에서 '크림치즈', 혹은 유제품은 '사랑'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검은 블랙홀의 베이글은 비뚤어져가는 에블린의 딸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끔찍한 베이글에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발라준다면, 그 베이글은 다시 윤기 있고 고소한 베이글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4. 무의미와 의미의 대결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의 대결은 엄마와 딸의 대결이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대결이기도 하다. 연출 중에서는 특히 돌멩이들의 대화와 인형들의 싸움이 의미와 무의미의 대조를 강렬하고 상징적이면서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돌멩이들이 대화를 할 때 영화에서 모든 소리는 사라진다.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 방식, 모든 목소리들은 무력해진다. 인물들조차 무생물인 돌로 변해버린다. 모녀가 싸움을 벌이다 갑자기 그 싸움이 바람에 나부끼는 인형들 간의 몸짓으로 바뀌는 장면도 비슷하다. 범우주적인 거대한 싸움은 갑자기 아주 아무것도 아닌, 가볍디 가벼운 무의미한 몸짓으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아주 사소한 몸짓이라도 다른 어떤 우주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대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의미가 없는가? 영화는 굉장히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연출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인상적으로 묻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을 하고 후회를 하고 미련을 남기기도 한다. 누군가의 선택들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그것들은 정말로 가치가 있을까? 어쩌면 그냥 수많은 가능성 중 어느 하나의 무의미한 랜덤 배정은 아닌가? 이에 에블린은 답한다. 나의 선택은 나의 의지였고, 그래서 어쨌거나 소중하다고. 성공한 세상에서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다시 선택할 수 있어도 당신과 세탁소에서 함께 구질구질하게 살겠다고 했을 때, 그 말 한마디로 인해 지긋지긋한 세탁소는 갑자기 엄청나게 소중한 공간으로 거듭난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원히 거대한 바위를 굴리고 또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을 때, 그 형벌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가 핵심인 것이다. 부조리한 삶에 자신의 열정과 의지를 불어넣는 그 순간 거대한 무의미에 맞설 수 있게 된다. 끈질기게 에블린을 괴롭히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외치는 딸의 이름이 Joy라는 점도 정말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의미와 무의미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영화는 이러한 삶의 핵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끌고 가고 있다.







 영화상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엄마와 어둠의 세계로 빠질 뻔한 딸과 귀여운(!) 아버지와 무서운 세금 공무원과 등등의 인물들이 좌충우돌 우주대충돌을 벌이는 스토리가 거대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면, 혹은 (영화에서 나왔듯이) 모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생의 실존적인 갈등과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영화는 그 갈등을 이토록 과장되게 펼쳐놓으며, 우리의 모든 삶의 투쟁이, 사소한 한 먼지에 불과한 싸움이 아니라, 아주아주 중요하고 거대한 투쟁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악당으로부터 세상 구하기(혹은 악의 구렁텅이로부터 악당 구하기?)라는 거창한 대결이 마지막에 엄마와 아이의 일상적인 싸움으로 바뀌기까지, 사소한 말 한마디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누군가를 심연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지 그 무게감을 느껴볼 수 있었다.


 가족의 소중함, 일상의 소중함, 사랑의 소중함. 이것들은 왜 소중한 것일까. 필자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따뜻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고 따스하게 감싸줄 때, 영화가 우리의 삶의 진가를 이야기하며 다가오려 할 때, 공감으로 너와 나 사이에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 때, 서로에게 굳건하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때. 이 글을 읽고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줄 평 :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느 곳에 있든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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