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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색시계 Jul 17. 2023

인디아나 존스, 인간을 말하다

<인디아나 존스:운명의 다이얼>, 2023.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여정인 <인디아나 존스:운명의 다이얼>이 2023년 6월 28일에 개봉하여 현재 상영 중이다. 그의 첫 번째 모험이 1982년에 시작되었으니, 약 50년 만에 그 매듭을 짓게 된 셈이다. 젊은 날 가슴을 뛰게 했던 설렘을 느끼며 향수에 젖어드는 관객도, 이름만 들었던 바로 그 고고학자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만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오랜 추억만으로도 별점 만점을 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전작 시리즈나 다른 액션에 비해 아쉽다는 평도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부자연스럽고 빈약한 줄거리, 줄어든 채찍질과 액션 등을 지적하고 있다. 50년 전의 인디아나 존스와 현재 여든이 넘은 인디아나 존스가 당연히 같은 몸놀림을 보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번 인디아나 존스의 귀환은, 50년이 지난 인디아나 존스답게 여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점은 여러 관객들이 많이 지적하고 있으므로, 필자는 본 글에서, 이전 시리즈와 다르게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미’와 질문들, 상징에 대한 해석을 다뤄보고자 한다.






1. 나이 든 영웅, ‘인간’ 인디아나 존스



 인디아나 존스, 그의 기나긴 고생과 모험이 무엇을 의미할까. 왜 사람들은 이를 보며 열광할까. 필자가 느끼기에 인디아나 존스의 여정은 ‘삶’이다. 수많은 고난과 풍파를 겪고 매번 다시 한번 일어나 그 모험을 이어간다. 삶에서는 때로 무엇을 쫓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인디아나 존스에게는 언제나 명확한 목표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것을 쟁취해낸다. 한 발짝 내딛기도 어려운 컴컴한 동굴 속을 성큼성큼 내딛으며, 끝내 보물을 지켜내고 악당까지 멋지게 처치하는 인디아나 존스는 그야말로 꽉 막힌 고속도로 같은 삶을 시원하게 뚫어버리는 ‘영웅’이다.


 그런 영웅이 나이들 수 있다니! 누가 대체 그것을 믿겠는가.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떠난 다음 어떤 삶이 멋있게 사는 삶인지 가르쳐준 영웅이 있던가? 이번 시리즈에서 80이 넘은 인디아나 존스가 스크린에 등장할 때, 그는 자신의 나이 든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누가 봐도 노인이라고 할 그의 헐벗은 등이 적나라하게 화면을 메운다. 기차에서 나치와 총싸움을 벌이며 날아다니던 인디아나 존스를 향한 박수는 잊힌 지 오래다. 무슨 일에든 덤벼들 수 있었던 젊은 날과 달리, 그는 아들도 사랑도 지키지 못한 상태이며, 세상에 자신의 자리가 존재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같은 건물에 살며 시끄럽게 구는 애송이들에게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한다. 곁에 두고 싶었으나 결국 떠나간 마리온의 사진을 보자 괜히 심술이 나 자석으로 덮어버린다. 젊은 영웅일 때에는 혼자이든 함께이든 즐겁고 멋있게, 모두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칭송받는 영웅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가 이전까지 ’ 영웅‘의 위치에서 활약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 인간‘의 위치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은퇴 후 찾아온 나이 든 ’ 인간‘으로서의 고뇌,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전의 인디아나 존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고의 확장이자 새로운 질문을 이 영화는 던지고 있다. 결국 인생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무언가 하나 부족한 점을 갖고 있을 때, 흔히 인간미가 있다고 말한다. 인디아나 존스는 젊고 빛나기만 하던 영웅에서, 나이가 들며 조금 더 사람다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으로서의 그는 ‘혼자’였기 때문에 삶이 즐겁지 않았다. 따라서 이전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이전에는 단 한 명의 영웅에 초점을 맞춘 삶의 과정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었다면, 이번 마지막 편은, 그 영웅이 나이 들었을 때에도 그의 삶이 여전히 빛나는 이유를 그려낸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랑이다. 이번 영화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영웅’이었던 이유는, 그가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은 헬레나 쇼, 즉 웜벳과 인디아나 존스간의 협력이다. 혼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기 힘들었을 인디아나 존스는 헬레나 쇼 덕분에 또 한 번 모험을 하게 된다. 헬레나 쇼는 사랑을 아예 모르는 인물이 아니다. 인디아나 존스가 그녀를 향해 ‘단순히 돈을 벌 목적으로는 아버지의 노트 전체를 외울 수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살던, 장물 경매의 세상에서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을 것이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랑보다는 돈이 삶에 도움이 된다고 익히며 살아왔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에게는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친구들이 있던 반면, 헬레나 쇼의 주변에는 친구도 사랑도 없이 적만 남아 있었다. 인디아나 존스는 평생 돈과 욕심을 좇는 이들과 싸워왔고, 그는 헬레나 쇼가 어떤 모습이든지 오로지 대부로서의 사랑으로 헬레나 쇼를 대한다. 헬레나 쇼에게 인디아나 존스는 사랑을 가르쳐주고 자신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마지막 밧줄 같은 존재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잠들어있던 사랑을 깨우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가치를 전하는, 인간 세상에서의 ‘영웅’ 역할을 한다. 헬레나 쇼는 왜 마지막에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 인디아나 존스와 마리온의 재회를 이끌어냈을까. 이는 선한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에, 돌려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헬레나 쇼가 얄밉게 굴며 인디아나 존스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다고도 볼 수 있지만, 어쩌면 그녀의 등장은 인디아나 존스가 이전과는 달리 ‘인간적인 영웅’으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승승장구하는 영웅의 서사에서 삐딱하게 틀어버리는 또 하나의 설정은, 인디아나 존스가 ‘아들을 잃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외부 사정으로 인해 아들 머트가 등장하지 못한 변명으로 그 캐릭터를 죽여버렸을 수도 있지만, 멋진 캐릭터 인디아나 존스가 지울 수 없는 ‘실패’를 했다는 이 설정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이 설정을 통해 이번 여정을 ‘상처 극복하기’로 볼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 그는 아들이 입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아들을 잃고 마리온까지 잃게 되었다며 슬퍼한다. 이번 모험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 문제는 계속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비어있는 자리에 공교롭게도 갑자기 ‘딸’이 들이닥친다. 헬레나 쇼는 협력자이기도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가족, 그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또 한 명의 자녀이기도 하다. 인디아나 존스는 헬레나 쇼와 함께 투닥거리는 여정을 하며 자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는, 세대 간의 소통 단절 극복으로 볼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는 대학 수업에서도 학생들의 외면을 받고, 아래층 젊은이들과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수업 시간, 유일하게 흥미를 갖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사람은 헬레나 쇼이다. 그리고 인디아나 존스는 그녀와 더불어 더욱 어린 소년 테디와도 자연스럽게 동행할 수 있게 된다. 젊은 세대와 어울릴 수 있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쩌면 인디아나 존스는 그가 고민하고 있었던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해답을 일부 느끼지는 않았을까. 결말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마리온과 재회했을 때, 그녀가 인디아나 존스에게 말한다. “돌아왔구나”. 그녀는 아마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은 인디아나 존스의 ’ 귀환‘을 한눈에 알아본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인디아나 존스가 로마에 남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남고 싶었던 이유에는 물론 호기심, 평생을 바쳐온 탐구에 대한 해답을 갈망하는 학구열도 있었겠지만, 호기심으로 포장된 회피와 도망, 외면도 존재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헬레나 쇼의 ‘펀치’로 다시 일상에서의 삶을 되찾았다. 헬레나 쇼와 함께한 여정을 통해 그는 또 한 번 ‘승리’했다. 어쩌면 악당을 대상으로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서도 말이다.


  결국 또, 사람이고 사랑이다. 영웅은 젊고 혼자여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났다. 이번에는 혼자 빛나는 나르시시즘적인 영웅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백 가지의 업적보다 중요하다고, 이전에는 강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여정이 영웅적이지 않다고 실망했을까. 그러나 인간적이다.




2. 진화한 악당, 경고를 남기다



 이번 편에 등장하는 악당의 욕심은 생각보다 ‘물욕’, ‘지배욕’ 등으로 단순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그의 행보는 오늘날 인간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는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chatGPT가 세상을 뒤흔들고 웹툰 작가들이 AI에 대한 보이콧을 하는 시대, 인간의 힘은 어디까지이며 오늘날 인간은 어디에 서 있는가. 악당 위르겐 폴러는 인간사회의 지배뿐만 아니라, 기계를 통한 시공간의 지배를 꿈꾼다. 그의 모습은 ‘인간- 기계 - 자연’, 세 꼭짓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미 '공간'을 지배해 버린 인간은 ‘시간'까지 지배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과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인가? 무엇을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하려 하는가?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계는, 인간의 힘의 확장이 되어주는가, 아니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위협하는가? 기계가 인간을 내쫓고 파멸시키지는 않을까? 영화 속에서 이러한 ’ 과학 기술‘에 대한 주목은, '달 착륙‘, ’수학‘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으로 나타난다. 악당 무리가 기존 시리즈에서와 달리 ‘총’을 마구 쏘아대는 것도 어쩌면 ‘과학에 대한 믿음’을 상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의 대척점에는 '믿음' 혹은 '마법'이 위치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은 인간이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분야이며, 믿음과 마법은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인디아나 존스는 어느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평생 쫓아다닌 것이 그 둘 중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맞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고고학자‘였지.) 인디아나 존스는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고 했으나, 필자는 영화에서, 과학과 마법 둘 다 인간의 삶의 영역이 아니겠냐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한다고 느꼈다. ‘수학'으로 만들어낸 다이얼은 인디아나 존스를 로마시대로 데려다 놓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았는가. 인디아나 존스의 다음과 같은 말도 모호하다.

"I don't believe in magic. But a few times in my life, I've seen things. Things I can't explain. And I've come to believe it's not so much about what you believe, it's how hard you believe it."
나는 마법을 믿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몇 번인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본 적 있어. 중요한 것은 믿는다는 게 아니라 믿음의 크기이지.

 

 이번 편에서의 악당과의 대결은, 인간이 더 많은 것을 통제하기 위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게 되지는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잊혀가는 인디아나 존스의 수많은 여정들, 그가 소중하게 다루며 지켜왔던 수많은 신화와 유산들이 과학적인지 비과학적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있다. 불안한 나이 든 영웅의 입지, 그리고 잊혀가는 문명과 신화에 대한 의문을, 인디아나 존스는 스스로 멋지게 풀어간 셈이다.



  악당이 인디아나 존스를 진작에 죽이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다니는 것도 흥미롭다. 그는 이미 기차 위에서 인디아나 존스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 굳이 왜 그런 원수와 자신의 영광스러운 시간여행을 같이 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곧바로 인디아나 존스를 죽이는 것이 그간의 원한을 풀기에는 그에게 충분치 않았을 수도 있다. 생각보다 악당이 유치한 면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완벽히 승리하는 모습을 인디아나 존스 앞에서 똑똑히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승리, 과학의 완벽한 승리,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승리 말이다. 악당의 내면에는 열등감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기도 한 복합적인 심리가 깔려있던 것일까. 이를 인정 욕구로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는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채울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인디아나 존스를 데리고 다니려 했을까 싶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어쨌든 그가 끈질기게 인디아나 존스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힌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 인디아나 존스가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조금 더 보태자면, ‘너무 싫어'라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의미하듯 말이다. 단순히 좋은 것은 혼자 몰래 누리려는 심보였다면, 인디아나 존스를 결코 비행기에 태우지는 않았을 듯하다.




3. 왜 하필 ‘다이얼’인가



 이번편의 제목인 ’ 운명의 다이얼‘. 이 작품 전반에서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다이얼은 앞서 말한 모든 주제들을 담고 있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는 ‘다이얼’에 대한 다음의 3가지 정의가 나와있다.

1.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회전식 손잡이.
2. 상대편 번호를 돌리기 위한 전화기의 숫자 회전 장치.
3. 여러 가지 기계류의 눈금판.

 영화에서 다이얼은 ‘시간’을 돌리는 ‘기계’이다. 다이얼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과학과 기술을 상징할 수 있고, 삶에서 구별하기 힘든 과학과 마법을 모두 아우른다는 상징을 가질 수도 있다. 시간을 돌리는 것은 인디아나 존스가 원하는 바였을 수도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리즈 시절‘을 그리워하며 노인이 된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이얼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전화를 걸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에서 전화의 다이얼이 클로즈업되어 나오기도 한다. 라디오 혹은 전화, 이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 해준다. 다이얼은, 사람 사이의 소통과 온기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영화를 바라보았을 때, <인디아나 존스:운명의 다이얼>을 한 영웅의 힘 빠진 마지막 모험이자 은퇴 무대라고 평하면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여정에서는, 젊은 영웅담에서 벗어나, 나이 든 영웅의 고뇌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고뇌를 인간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며, 인디아나 존스와 그를 존재하게 하는 사람들을 되새기고 인간적인 영웅담을 만들어내었다. 동시에 인디아나 존스에게 제기될 수 있는 ‘비과학적인 모험’이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과학과 마법이 삶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들고, 인간과 과학의 미래에 대한 경고 섞인 질문을 던진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며, 이 모든 이야기는 ‘다이얼’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인디아나 존스 대장정의 마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사람’에 대한 보다 깊고 확장된 의문을 풀어가는 '거장 ' 인디아나 존스가 되었는가.


 영웅은 젊고 혼자 빛난다는 틀에서 벗어났다. 전설은 과학만도 맹목적인 마법만도 아니며, 그 자체로써 소중하다. 오늘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해 가는 시대에 고고학이란 신화와 문화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도 나이가 든다는 현실적인 인간미를 보여주고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원숙한 답을 찾아가는, 그래서 기존 액션과 영웅의 틀을 또 한 번 벗어나는, 거장 인디아나 존스.



한 줄 평 : 원숙해진 인간 영웅 인디아나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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