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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 Apr 09. 2023

어쩌다 보니 이 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도처에 깔린 벚꽃길은 여의도에 있는 전 회사의 유일한 복지였다. 예쁜 풍경을 뒤로하고 출근할 때는 심통이 나기도 했지만, 퇴근길 보는 밤 벚꽃도 참 예뻤더란다. 그래서 이 계절엔 되도록 많은 날 시간을 내어 한강으로 향했었다. 어느 날은 팀원들과 배달 음식을 시켜서 점심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친구들과 치킨과 맥주를 먹고, 어느 날은 혼자서 따릉이를 타고 내달렸다.


올해도 벚꽃의 계절은 돌아왔다. 내가 집콕하는 사이 날씨가 무섭게 따듯해졌고, 목련이 지기도 전에 벚꽃이 피었다. 갑자기 찾아온 봄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참 부지런히 벚꽃을 찾아다니더라. 하긴. 봄은 짧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지난 일요일 강아지와 동네 산책을 하는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우리 동네 벚꽃 명당을 찾았다. 보통은 나무를 올려다보아야 하지만, 그곳은 산책로가 위아래로 있어 나무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노릇한 오후 햇살까지 참 예뻤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올해 벚꽃은 동네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날씨 앱을 열어보니 화요일 저녁부터 목요일까지 비 소식이 있었다. 이렇게 연장 비가 오고 나면 벚꽃은 다 떨어질 텐데... 월요일에는 여의도에 가야겠다. 


월요일 아침, 강아지와 한강 피크닉을 즐길 채비를 했다. 꽃놀이 TPO에 맞춰 분홍색 리드줄을 새로 꺼냈고, 점심시간에 시간이 되는 친구를 미리 섭외해두었다. 그렇게 익숙한 윤중로에 도착했다. 백수의 신분으로 강아지와 함께 오피스촌을 가로지르자니 어색했던 것 같다. 서울의 벚꽃은 벌써 초록 잎사귀를 내고 있어 아쉬웠지만, 꽃비가 흐드러지게 내리는 것이 낭만이 있었다.


화요일 저녁 비가 내리기 전 마지막 벚꽃을 즐기러 나갔다. 바람이 세게 불어 비가 오기 전인데도 꽤 많은 꽃이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한켠에 모아둔 꽃잎들이 꼭 겨울의 눈송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 주먹 쥐고 바람에 날려도 보고, 같이 나온 강아지에게 이게 벚꽃이라며 보여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굵어지는 빗방울에 서둘러 집에 들어왔다.


이렇게 느지막이, 하지만 늦지 않게 봄을 즐겼다. 올해 벚꽃놀이는 없노라 선언했던 나는 3일 동안 알차게 쏘다녔고, 이 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꽤 모순적인 태도지만, 점점 더 단조로워지는 내 일상에 좋은 이벤트였으니 그걸로 됐다.


+) 친구는 만개한 벚꽃보다 한번 꽃이 떨어지고 초록 잎이 공존하는 이때가 더 좋다고 한다. 난 풍성한 팝콘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요즘 산책을 하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친구는 화려함보다는 싱그러움이 좋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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