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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 May 31. 2023

10년 만에 꺼낸 다리미

요 며칠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사이 미뤄둔 빨래를 시작했다. 먼저 비어 가는 화장실 장을 채울 수건을 잔뜩 빨아두고, 흰색 빨래는 좋아하는 섬유유연제와 화이트닝 겔과 함께 넣어 세탁기를 돌렸다. 깨끗하게 빨린 젖은 세탁물은 건조기에 들어갔다. 


건조기에 한 번 들어간 이상 4시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줘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보통 늦은 밤에 돌려놓고 아침에 꺼내주는데 빨래를 건조기에 그대로 두었다는 게 저녁께 생각났다. 못 살아, 허둥지둥 꺼내고 보니 이미 주름이 질대로 져버린 게 퍽 속상했다. 제때 꺼내지 않아 눅눅해진 건 덤이다.


속옷이나 양말, 내의로 입는 흰 티가 대부분이라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개어 옷장으로 직행했겠지만 애써 빨아놓고도 꼬질해 보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랜만에 다리미를 꺼내 들었다. 잔뜩 구겨진 빨랫감들이 어수선한 내 머릿속 같다는 생각을 하며 쫙쫙 펴내겠다는 각오(?)로 다림질을 시작했다.


손끝으로 옷을 매만져가며 주름지지 않게 다림질을 하는 감을 잡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오랜만인데도 꽤 능숙하게 해냈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소매, 앞판, 뒤판, 윗단, 밑단 파트를 잘 나눠서 다림질을 해주면 수월하다. 막 다림질을 끝내 열감이 있는 옷은 건조대나 옷걸이에 걸어 한 김 식혀줬다.


어릴 적 할머니는 손짓 몇 번으로 셔츠 하나를 뚝딱 다리셨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고 나서 세탁소에 맡긴 옷 말고 스스로 반듯하게 다림질한 옷을 입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어줄 만하게 다려진 옷들을 보니 이것 또한 사랑이었음을 느낀다.


할머니 생각을 하며 티셔츠 열댓 장, 셔츠 서너 장, 바지 두세 개를 다리고 나니 오금이 저리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스팀다리미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집안일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다림질의 순기능은 생각 비우기와 자기만족 아닐까? 시간도 잘 가고, 뿌듯한 결과물도 생기고, 다림질을 하는 동안은 잡생각이 안 드는 게 아주 만족스럽다. 내일은 검은 빨래를 해서 주름진 옷을 또 다려내야겠다.


혹시 집에 미뤄둔 빨랫감이 있다면 우리 집으로 가져오셔. 싹 다 다려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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