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급하게 서울행 티켓을 끊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던 친구네 가족들은 금요일 2시 장례미사 진행을 알려왔다.
시애틀에 있는 친구와
싱가폴에 있는 친구는 미처 참석할 수 없음에 애닳아했다.
도쿄는 서울과 가까워서 다행이다.
해외에 살며 모든 일정을 멈추고 바로 내일 귀국을 하는 이슈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부모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일들이 생기나보다.
가끔 있는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는 위로할 내 친구가 있다.
그치만, 이번에는 친구가 없는 친구의 장례식.
40대에는 드물것 같은 낯선 경험이다.
그곳에 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일을 뒤로 하고, 하네다 공항으로 달렸다.
그리고, 비행 시간 고작 한시간 전에 내 여권에 한 톨의 시간도 남아 있지 않음을 그제서야 인지했다.
보통 6개월이 남아 있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한 국가들이 많은데, 내 여권은 만료일이 며칠 지난 상태였다.
코로나 시국에 매번 출국와 입국 서류를 챙기느라, 제일 중요한 여권 만료일은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나보다.
재입국에 대한 리스크를 반복해서 말하는 공항에서, 그저 보내만 달라고 애원했다.
돌아오는 것,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당장 사치스러워 보였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애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기적같은 상황은 때때로 오기 마련인가보다. 서류의 유무, 날짜, 시간 등을 칼 같이 지켜내는 유연함의 틈이 전혀 안보이는 일본에서, 어떻게 그 비행기를 타게되었는지 난 그저 몽롱하기만 했다.
울기않기로하자.
내가 있는 상황을 마주볼 자신이 당장은 없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항상 그렇듯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친구는 매일 보는 존재는 아니어서, 더 그런가.
장례식 마저 참석못하면, 관계의 끝이 모호한 비현실 속에서 혼자 살아갈 것 같았다.
마지막 통증의 시간들을 본 가까운 가족들은 차라리 이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을까.
깊은 슬픔속에서도 오히려 덤덤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친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만 보여줬었다.
그 기억이 더 나를 안타깝게 했다.
모든 삶의 고통을 그냥 묵묵히 참아내는 것에 익숙해보였다.
그렇게 항암의 통증도, 머리카락을 잃어가는 과정도 밝게 웃으며 견뎠다.
장례 미사의 사진 속에도 또 웃고 있다.
미사는 30분간의 신부님 말씀과 한 시간 가량의 연도 기도로 진행되었다.
무척 야윈 친구 어머니의 모습이 사람들의 틈새로 문득 보였다.
친구는 극단적인 K 장녀, 엄마의 안정을 위해 웬만한 나쁜 이야기를 하나도 전하지 않았었다.
암 선고 또한 한참이 지나서야 고민끝에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그 어설픈 감춤이 부모를 가장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친구 어머니는 친구의 급작스러운 떠남보다, 당신에게 숨기기 급했던 딸의 행동에 대한 섭섭함이 무한해보였다. 그런 짧은 생각들이 부모를 무너뜨리나보다.
어머니를 나의 힘이 남지않도록 온 힘껏 안아드렸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누나의 곁을 지켜낸 남동생의 손도 힘주어 잡았다.
참 따듯했다.
동생들의 따듯함이 있어, 친구의 가는길은 춥지 않았을 것 같다.
"얘들아, 나 먼저 갈께."
항암 중 어느날 내게온 톡이다.
천년도 하루같다고 했으니, 30년, 혹은 40년 후라할지라도 그 끝에서 돌아보면 길지 않은 시간일 거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다시 다 만나게될 수 있음으로 위로해본다.
헤어짐은 슬프지.
그래도, 천국을 믿었으니, 가는 곳에 대한 의심은 없다.
너 없이 나는 또 일상을 살아가겠지.
근데 마음 한 켠이 훅 도려서 나가버린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날때에는 어떻게 견디지.
그게 채워질까
시간을 통해 그게 무뎌질까
30여년은 너로 인해 웃었던 기억으로
일단
감사해보마.
통증이 없다면,
평안하다 했으니,
너의 평안함에도 일단 감사해보마.
세상과의 정떼기를 진하게 하느라, 너도 동생들도 고생많았다.
Goodbye fo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