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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세동 Jul 22. 2023

이런데도 선생님 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가 안쓰럽다.

차세동의 상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교직에 계신 많은 분들의 심란한 마음에 감히 위로를 전합니다.

더불어 교직에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음 아픈 글들이 저에게 쏟아집니다.

저의 주변에는 20대 예비교사, 초임교사들이 참 많습니다.

20대 중반. 사범대학이라는 출신까지.


저의 SNS피드에는 예비교사들의 노력과, 초임교사들의 열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글과 그들의 사진에 검정 리본이 달리고,

그들은 마음 아픈 글들을 써 내려갑니다.


'이런데도 선생님 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가 안쓰럽다.'

마음이 무너지는 한 줄이었습니다.




스무 살,

그토록 원했던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세상에 유기되었던 분노를 풀기 위해 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눈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선생님이 되어 이 세상에 한판뒤집기를 선사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스무 살, 사범대학에 입학했고

그 해, 교직을 포기했습니다.


교직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 한판뒤집기를 전달하기에 '학교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 '왜 학교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적합하지 않았는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청소년기관에서도, 또 제가 만나는 모든 현장에서

저는 늘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발을 담지 않습니다.


권리가 없는 공간에서 의무만이 난무하는 터전.

저는 '학교'라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교권도, 학생인권도 무참히 좌절하는 공간.


교권과 학생인권은 반대말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육기술자, 교육꾼이 아닌 '선생님'을 추구하시는 분들이라면,

그 어떤 선생님도 학생인권을 깎아내려가며 교권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보고 있는 저의 바로 옆 예비 교사들과 초임 교사들은,

'체벌 부활', '교권의 신격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을 지키고 싶을 겁니다.




교직을 포기할 때, 주변 모두가 말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러움을 사고 칭찬을 받는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저 또한 단 한 번도, 교직을 포기한 것에 아쉬움도 후회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즈니스로,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그 소중한 마음을 지킬 수 있어

저는 저의 자리를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연코 그것은 제 꿈이 아닙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그 소중한 마음은,

저 같은 사업가가 아니라, 그들의 터전인 '학교'가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교생선생님들께 수업을 시연하고 교육을 가르칠 때보다

저희 회사에서 아이들을 만날 선생님들을 교육할 때 100만 배는 마음이 편합니다.


교육에 진심을 다하는 선생님들께서 '학교'로 갔을 때,

그 숭고한 마음이 크게 다치고 그 소중한 마음이 크게 상처받는 것을 바라봅니다.

많은 선배 선생님들께서도 그 현장을 쓰라려합니다.


물론 복잡하고 잔인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공공의 영역이라는 교육과

성공할 수 있는, 혹은 성공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 여겨지는 교육을 만나면

난장판이 되고는 합니다.


학교와 B2G 사업을 하면서 보는 저도 이리 답답한데,

그 속에서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들은 오죽할까요.


단순히 '권리'의 문제보다 고질적인 '현장'의 문제.

이 기회에 공공이라는 영역을 이유로 외면했던 '실제적인 문제'와

성공할 수 있는, 혹은 성공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실제적인 현장'을

다시 살펴봐주기를 바랍니다.


선생님뿐 아니라, 학교를 바라보고 학교를 사랑하는 많은 관계자, 많은 분들께서

여러 목소리를 내주셔서 좋은 선생님들께서 그 마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현장 속에서 아이들은 더 멋진 어른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분노하는 건,

한 젊은 교사가 학교에서 생을 포기할 만큼,

그 현장이 난장판이었다는 현실이고.

그 현실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이 자란다는 사실이니.


교권 vs 학생인권. 교사 vs 학부모. 관리자 vs 현장의 선생님.

이런 대결을 논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체감합니다.


교권도 학생인권도.

부모교육도 부모의 참여도.

관리자의 노력도 현장의 선생님의 헌신도.

모두 중요하고 지켜져야 합니다.


저번에는 학교미투였고,

이번에는 교권에서 터졌지만,

다음에는 또 다른 곳에서 터질지 모르죠.


저들이 위태롭게 서있는 '학교'라는 절벽.

구멍이 뻥뻥 뚫린 배수관에서 물이 세는 곳만 막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곳을 막으면 다른 곳에서 또 물이 셀 테죠.

애초에 구멍이 뻥뻥 뚫린 배수관을 치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 떠나서,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이 젊은 마음들을.

이 소중한 의지들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죽음이.

교권에 대한 분노보다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마음의 좌절로 보여서.

더 마음이 쓰라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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