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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럽미 Mar 29. 2024

남자 4번

만남





 여자 4번이었던 나는 남자 4번이었던 너와 짝이 되었다. 여드름이 새하얀 피부에 도드라져 보이던 큰 눈을 가진 너는 나이에 맞지 않는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얼마 되지 않아 그 향수가 담배 냄새를 가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첫 수업 내내 말이 없던 우리 둘의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참을성이 없는 내가 먼저 너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제야 멋쩍게 답하며 나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으로 우리의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일명 뺑뺑이었던 시절,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마저 떨어져 오히려 인문계 고등학교에 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 집이 학교와 멀어 매번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 함에도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학교에는 꼭 지각하지 않고 온다는 이야기는 나에게만 털어놓은 이야기라 했다.



우리는 그 후에도 꽤 잘 통하는 짝꿍으로 많은 활동을 함께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바로 엎드리는 너의 넓은 어깨를 보고 있자면 살짝 기대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렁이곤 했다. 살짝 열어둔 창문을 통해 부는 바람이 너의 머리카락을 스칠 때면 니코틴을 머금은 너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 향이 왜 좋았을까.


너는 어깨가 참 넓었다. 하얀 와이셔츠에는 늘 구김이 없던 점이 특이했다. 일명 일진룩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너를 보며 난, 귀여니 소설에나 나올법한 '지은성'을 상상했다.


늘 그렇듯 일진들은 체육시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날은 너의 넓은 등판을 마음껏 만질 수 있는 합법적인 날이었다.

보디가드피구. 남자와 여자가 한 짝이 되어 서로의 이성을 막아주고 동성끼리만 공격이 가능한 피구 게임이다. 그날의 너와 나는 환상의 콤비였다. 무자비하게 나를 보호해 주던 너의 거침없는 손길에 정신 못 차렸다. 활약에 보답하기 위해 나 역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최후까지 살아남게 되었지.



그래 해냈다.

우리 둘이 정말 환상의 짝꿍이 맞았던 거야. 멋쩍게 웃으며 아까부터 너의 옷깃을 꼭 쥐던 내손을 부드럽게 잡았던 순간.

땀으로 절여진 진득하고 뜨거운 우리의 손이 번쩍하고 들여졌다. 단순히 승리를 표시하기 위한 제스처라는 것을 잊은 채 머릿속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짐을 느꼈다. 미친듯한 심장박동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나를 너의 가슴 가득 안는 행동에는 결국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힘들다는 핑계로 너의 손을 뿌리치고 친구들에게 다가갔을 때, 이미 나는 그녀들에게 붉어질 때로 붉어진 얼굴을 들켰고 가슴 깊은 곳에서 빼꼼히 내밀던 작은 씨앗에서 굵은 덩굴이 순간에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운동장 한가운데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 한가운데서 알게 된

사랑.

심장이 멈추다 못해 터져 버릴 듯하던 나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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