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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병권 Aug 09. 2024

내 마음속의 김준기

김상진50주기 기념사업


[추도사]일농 김준기 1주년


내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일농김준기선배 1주기 추도식이 있고 나는 김상진기념사업회를 대신해 추도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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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김준기


안녕하십니까? 김준기 선배님의 서울농대 후배 안병권입니다. 선배님이 58학번 저는 79학번입니다. 2019년부터 3년 반동안 장편 다큐멘터리 <1975.김상진> 감독으로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2025년이면 김상진 열사가 1975년 4월, 서울농대 교정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며  할복자결하신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년 사업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지난동안 제 카메라 앵글에 잡힌 선배님의 모습들을 찬찬히 돌아보았습니다. 김상진열사의거 현장 제막식, 여러행사, 그리고 송년회때 장면들을 보면서 선배님을 마음에 아로 새겼습니다.  추도식때 여러분들이 함께한 '선창으로 부르시는 농민가 영상'은 2018년 김상진기념사업회 송년회때 찍은 영상인데  이렇게 쓰일줄 알았으면 조명도 셋팅하고 장비를 갖춰서 형님의 농민가 열창을 제대로 기록해 놓을걸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제 인생에서 준기 형님의 의미이자 뜻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록새록 생각이 드는데요.하나는 호가 '일농'인데 농민가로 시작 해서 그간 살아내신 인생역정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점차적으로 소외되어져 가고 고립되는 농업 분야를 위해서 애를 쓰신 것도 기억나지만 저는 대학에 입학하며 선배랑 인연을 맺은 이후에 김상진 열사항거 이전과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준기형님이 보내주신 시선, 느낌, 격려, 어떤 실행 그런 부분들로 기억이 채워져있습니다. 제가 다큐를 찍으면서 많은 분들하고 인터뷰  했습니다마는 김상진 열사를 '상진'이라고 거침없이 부르는 분들이 두세 분밖에 안 계시는데 한 분은 열사의 큰형님이신 상운 형님이시고 그리고 준기 선배가 또 한분이십니다.설명을 하실 때 '우리 상진이' '상진이는 이랬어 저랬어' 하시며 표현을 하곤하셨는데 그 느낌이 좀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선배님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김상진, 오른쪽에 제가 세세이서 나란히 직접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은 느낌이 들곤했으니까요.


그러면서 민주, 통일, 농업 그다음에 주목받지 못하는 곳, 그곳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깨동무하고 힘차게 소리치셨지요. 이런 측면들로 준기 선배님이 살아오신 삶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저는' 일농' 보다는 '일관'이 더 정맞아 떨어진다 생각합니다.  선배님은 위치, 역할,  하고 싶은 희망, 가야할 목표 같은 것들을  다채롭게 전개하셨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일관된 지향'을 실감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형님의 호는 '일관'이 더 맞는거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농이든 일관이든 다 내 마음속의 김준기입니다.


일관된 통찰 그 다음에 한결같은 대쪽 성질머리, 이런 면면들이 선배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영원히 입고 계신 유니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인연으로는 1987년도에 제가 결혼을 할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형님! 저 장가갑니다"


빈민 지역 금천구 시흥2동에서 빈민 지역 운동을 하고 있을때입니다. 1983년 자췻방에서 강제 징집당해 철원백골 3사단에서 군대생활했습니다. 1985년 8월 제대하자마자 보름 만에 시흥2동 달동네에 자취방을 얻고 지역 활동을 시작 했습니다.달동네에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청년이라 하더라도 청년•학생으로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가정을 이루어야 '마을 사람'으로 인정 해주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마침 여자친구가 간호대학을 나와서 해태제과 양호 실장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 결혼 일찍 하자 뭐 집도 없고 절도 없지만 그 동네에서  빈민 지역 활동을 하자라고 결정을 내리고 87년도에 결혼식을 올리고 마을에 방 한 칸 얻어서 새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례를 형님한테 부탁하러 갔고 크리스마스날인데 기꺼이  서 주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마는 애를 최소한 넷 이상은 낳아야 된다라고 아주 강력하게 주장을 하셨습니다. 둘만낳아 잘살자 시대였는데 반복강조하시면서 '넷'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앞에 서서 형님  주례사를 들으면서도 '아이고 참내' '하여튼 우리 선배님 못말려'...이런 생각을 하면서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형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저는 형님 말씀대로 넷은 낳지 않았고요.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아들,딸 둘을 새롭게 세상에 내보냈습니다.형님을 기억하고 형님에 대한 내 마음의 존경을 고백합니다. 든든한 '우리들의 곁' '맡형'으로 계셔주신것  고맙습니다. 남은 제 인생도 형님이 하셨던 것처럼 일관된 지향을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내년도 2025년도... 그토록 선배가 아끼고 사랑했던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가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은 격려와 지원, 응원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추도사로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뒷것보다 더 뒷것 같고 동시에 앞것보다 더 앞것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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