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아이
김제 죽산아이에는 ‘3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억되고 각인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의 겹겹이큰 마디마디로 구분하면서 살아가지만 ‘구체적인 실감’으로 새기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하나도 쉽지 않은데 3개의 시간 흐름을 곁에 두고 맛보고 있으니 말이다. 집은 공간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세월(입체적시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마음이 있고,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906년 4월 4일 (오전)
2004년 4월
2024년 8월
첫 번째 시간_ 병오년(1906)) 4월 4일 오전(午前)시(時)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김제 죽산산 자락 한 모퉁이에 최고의 목재를 인천 자신의 목재회사에서 싣고와 4칸짜리 골조를 세우고 지붕 중앙에 상량을 올리고 새 어머니에게 집을 지어 선물한 죽산이 고향인 사장이 있었다. 열 살 무렵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새로 오신 새엄마와 정을 붙이지 못했다. 서럽고 서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투닥투닥 싸우다가 아버지마저 새엄마 편을 들자 무작정 가출했다. 흘러 흘러 인천으로 갔다.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모 목재상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아이는 영민했고 품성도 좋아 청년으로 성장하며 회사의 대들보로 회사와 함께 폭풍 성장했다. 마침내 사장은 그 청년을 눈에 들어 양아들로 삼는다. 훗날 그 아이는 사장에 오른다. 고향을 떠나온지 삼십여 년. 고향 죽산이 그리웠다. 1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먼발치로 들었지만 가 뵙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새어머니가 자신에게 모질게 굴었던 정황도 이해가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오셔서 식구들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어쩔 수 없을 것 같았을 새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사장은 어느날 고향 김제 죽산을 방문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새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신 때문에 집을 나간 아들이 마음에 밟혀 평생을 조바심내며 살았다. 다른 자식들이 장성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큰 아들이 그리웠다.
두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 못되게 굴었고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아들아! 이게 얼마만이냐. 내가 더 어른답게 너를 품었어야 했는데 그리 못해서 미안하구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새어머니 곁에서 하룻밤을 자고 인천을 돌아오는 날
“어머니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인천 회사로 돌아온 사장은 직원들에게 “4칸짜리 집 지을 목재를 최고로 한 차 준비해라” 도락구에 싣고 내려와 김제 죽산산자락 양지바른 모퉁이에 터를 닦고 주춧돌을 넣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와 도리를 짜고 상량을 올렸다.
병오년 4월 4일 진시.
집을 다 짓고 안방에 새어머니를 모셨다. 큰 절을 올리고 집을 선물로 드렸다. “엄니, 부디 행복하소서!”
1906년도의 시간이고 장면이다.
두 번째 시간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아내와 함께 지평선 동네 귀촌 시골집을 구하러 다니고 다니다가 죽산 김제서고 앞 부동산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오래전에 문 닫은 중개업소였다. 옆건물 슈퍼로 들어가 부동산을 물어보니 슈퍼주인이 이유를 물었고, 자기네가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는데 한번 볼거냐 제안해서 같이 따라가 만난 ‘운명’이다.
죽산산 언덕아래 가운데 마당이 있고 길가와 골목쪽으로 본채와 ‘ㄴ’자로 창고. 우리는 단번에 매료되어 다음날 바로 계약했다. 헌 집을 싹 철거하고 새로 지을 요량이었다. 계약을 해놓고 이 구상 저 구상중 안방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2004년 3월에 멈춘 시간. 전 주인은 같은 동네 슈퍼건물로 이사했고. 그 댁 어른들이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17년, 빈집이었던 그 집은 우리를 만난 것이다. 전 주인은 근처에서 밭농사를 곳곳에 짓는 사람이라 이 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농기구나 비품등을 놓아두고 쉼터로 사용하던터라 완전 방치된 집은 아니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짙었다.
그러던 어느날
천정을 뜯어보았다. 파란색 양철지붕이고 양철밑으로는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아마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에 초가를 걷어내고 올린 듯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지붕 개량할 때 그 위에 양철지붕을 덮은 것이다. 천정 저 깊은 곳에 상량문이 눈에 들어온다. 대들보와 서까래의 윤곽도 보이고... 흙집이지만 서까래와 들보가 짱짱해보였다. 어라! 자세히 봐야겠다 싶어 마루위 거실 천정을 전면 다 해체 뜯었다.
병오년 4월4일 진시(1906년 4월 4일 오전)
김제시청가서 집의 내력을 살폈다. 1920년부터 이 집의 흔적이 보였다. 다 헐고 새로 짓자 했지만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여보! 이집 고쳐서 살자” “오케이 콜!‘
그렇게 2021년 5월 19일 리모델링 첫삽을 떴다. 이것 저것 그해 년말까지 창고증축까지 마쳤다.
택호를 죽산에 살던 그 아이(효자)를 생각하며 ’죽산아이‘라 이름 붙였다. 또 다른 100년을 시작한 것이다. 2023년 말, 일꾼들 쓰지 않고 우리 내외는 주인장 시선으로 내·외부 손질을 엄밀하고 아이디얼하게 진행했다. 초보가 아니라 제법 손에 눈에 익숙·꼼꼼하게 완성도를 높였다.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깔끔·정밀해졌다.
집을 3년 동안 고치고 언덕과 마당을 재구성 하면서 마음먹은 게 있다.
리모델링이란 120년이라고 하는 시·공간에서 이 집을 살다간 사람들의 삶결과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과 세월의 흐름을 광나고 빛나게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내 삶도 윤택하게 닦는 일이다.
세 번째 시간 _지금
이야기농업연구소 작업실과 아내의 그림 작업실로 쓰는데 주변에서 농가민박 요청이 들어왔다.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2024년 8월 김제시청에 농가민박 허가를 받고 에어비엔비에 등록했다. 간판은 택호 ‘죽산아이’를 그대로 준용했다. 그러자 게스트들이 들기 시작했다. 죽산아이는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자기들끼리 우애를 다지는 모습을 보고 활짝 웃는 그 부모들, 호스트인 우리의 시선도 그들과 동시점 속성값을 갖는다.
이제 다시 100년이다. 단순히 시간의 연장뿐만이 아니라 이 집을 다녀가게 될 많은 손님들 마음속에 죽산아이의 의미와 마음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매번 손님들로 인해서 벌어지는 ‘새로운 경우의 수’와 ‘인간관계’가 아내와 나를 흐뭇·흐뭇하고 용기 있게 이끈다. 새로운 만남이 잉태하는 기대치가 또 다른 새로움이 되는 요즘이다.1906년과 2004년과 지금, 이 3개의 시간에 맞물려 돌아가면서 죽산아이는 나날이 깊어가고 깊어가는 중이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 ’아리랑‘의 주무대 죽산의 한 가운데 죽산면사무소 뒷길 돌아 죽산산 모퉁이에 위치한 죽산아이는 나름대로 평민한옥의 고유한 멋이 있고 스토리가 있어서 게스트들이 좋아한다.
요즘 죽산은 ’이장우막걸리‘와 청년까페 ’트윈스테이블‘ 한식명인 ’연미향‘등 지적인 공간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핫하게 뜨고 있다. 게스트들의 흔적과 여운들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여유 있는 시골살이를 즐기는 중이다.게스트하우스 ’죽산아이‘에서는 3개의 시간이 서로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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