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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꾸'라는 위로

꼭 한 번은 듣고 싶었던 말

by 사랑의 천문학

워낙에 화제가 되어, 살뜰히 챙겨본 적 없음에도 대략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최근의 작품이 하나 있다. 살가운 위로로 삶이 포근히 다독여진 시청자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드라마 속 문장들을 여기저기서 자주 접했다. 언뜻 들리는 대사들을 때론 무심히 지나치기도 때론 한 번 더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꽤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 건 '빠꾸'라는 단어였다. 어디선가 섣불리 버려져도 어디에도 끝내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인공은 아버지를 통해 꽤 오래 품어올 수 있었던 듯하다. 든든했을 테다. 그래서 그 대사가 대사만으로도 조금 아팠다.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부러움은 결핍의 반영이다. 나도 나를 이제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 말에 대한 참 깊은 갈급이 내게도 있었다. 채워지지 않을 거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무지도 있다. 몰라야 한다며 애써 삶을 걸쳐 간신히 얻어낸 대단한 무지에 가까웠다. 아주 빠른 롤러코스터도 그리 무섭지 않고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호랑이가 두렵지도 않지만, 어딘가에 버려지는 건 여전히 겁이 난다. 우리의 날들은 보통 아주 넉넉한 인심의 삶은 아니다. 때로는 참 야박한 세상이다. 소중한 것들은 우리를 떠나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삶의 가장 누추한 자리에 버려진다. 버려짐은 버려짐이다. 에둘러 치장하여도 소용의 수명이 다했다는 진실까지 가려질 수는 없다. 스스로의 효용이 여기까지라는 걸 알게 될 때만큼 서글프고 비참할 때가 없었지만, 그 무너짐의 순간에 다시 돌아갈 곳이 보인 적 드물어서 더욱 생의 후미진 곳을 찾아대고는 했다.


낮은 자존감의 원천에 대해 깊게 고민한 적 있었다. 물리적이나 서류적으로 유기된 적 없으나 기어코 사실상 버려졌다는 좌절을 느낀 적이 살면서 몇 번 있었다. 버려짐 혹은 버려짐에 준하는 처사를 겪은 구체적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결국 내가 그들의 기준치를 충족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증명에 대한 강박이 있다. 형편없지 않음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세상에 내가 설 곳이 있을 거라고 믿는 편이다. 적지 않은 날들을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비가 오면 우산을 제대로 못 쓰고 커피를 마시다가는 조금씩 흘리기도 한다. 그런 내가, 어찌 대부분의 일들을 서툴지 않게 잘 해낼 수 있을까. 무엇이든지에 곧바로 능숙한 사람은 드물다. 그래야 말이 되는 세상이고 노력이라는 단어도 기를 펼 수 있다. 세상에 '적응'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닌데, 나한테는 유독 시간을 못 주겠다. 쓰임의 여지가 충분함을 어떻게든 보여주기 위해 절박하다. 누구라도 나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이든 사랑에서든, 어디에서든 말이다. 나만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곧 버려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아직도 받는다. 그러니 못된 강박이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볼품없다고 취급하지 않고 함부로 내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존감을 확립해야 하던 시기의 불안정했던 몇몇 일들 때문인지, 나는 버려짐이 겁이 난다. 드라마 속 '빠꾸'라는 단어에 부러움이 사무쳤던 것도, 어린 시절 그와 비슷한 한 마디를 들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편하게 살았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상상 때문이었다. 버려짐이라는 채근 대신 따뜻한 포옹이 있었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이렇게 얘기는 했지만, 결국 핑계다. 내 의지로 노력으로 열정으로 이를 타개할 순간이 이후에 많았을지도 모른다. 무기력에 젖은 몸을 말릴 생각도 안 한 것 역시 나의 귀책이다. 그러나 유독 너무 아픈 버려짐은 꼭 소중한 이들로부터 집행된다. 세상이 몇 번 무너지는데 거기서 낙관만을 품기는 어려웠다. 자존감을 바로 세우자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막연한 이상이라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버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건 내겐 생존이었다. 삶이 걸려 있으니 나의 무가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는데 아등바등이어야 했다. 죽을 만큼 뭔가를 노력하거나 원한 적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최소한 나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이었다고 답 할 수 있다. 기대만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을 내게 건넬 사람이 왜 없었을까. 아니다. 굳이 세자면 몇 명 정도 '존재'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절실히 의미 있는 누군가의 말은 아니었다. 어쩔 때는 들을 수 없었고 다른 때는 너무 늦게 들렸던 '괜찮다'는 이야기였고, 원망스러운 시차에 가슴이 많이 미어지고는 했다. 차라리 뻔뻔했더라면 조금 나았을까. 그런 기대치 하나에 나를 맞추는 것만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설익은 항변이라도 한 번 내질렀다면, 조금은 사는 게 편해졌을까. 얼마 전 만난 이들이 내게 삶을 즐길 줄 아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한 적 있었다. 웃고 넘기며, 사실 그게 억지로 일으킨 삶의 반작용이었다는 대답은 끝내 삼켰다. 인생이 꽤나 너무한 것 같아 일부러라도 덜 최선을 다하고 더 무력하게 삶을 인내해보기도 했던 날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삶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때 듣지 못한 '빠꾸'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듣고 싶은 말들만 듣고 살 수 있겠나. 어떻게 보면 최소한 이 영역에서만큼은 운이 지독하게 없었던 게 아닐까. 결핍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나의 결핍은 '빠꾸' 하나인 것이고. 나를 품어준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다. 세상이 너무나 별 볼 일 없어 보일 때, 그래도 머물러달라고 내 손을 붙잡은 이들도 고맙게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수많은 말들 속에서 굳이 나를 아프게 했던 순간만 애써가며 찾아대는 불행만 힘껏 껴안는 습관이나 버릇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위로하다가도, 다시 돌이켰을 때 안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 귀퉁이에 버려졌던 기억이 섬찟하게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열심히 했다. 그들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다르지 못한 건 소중한 이들의 기대치였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잘못은 결국 내가 한 셈이었다. 이래저래 미안한 삶이 됐다. 죄의식은 나를 위축시켰다. 조급함이 번졌다. 그리 많지 않은 기회에 늘 생을 건 느낌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서투름에 한없이 자책했다. 나를 준엄히 꾸짖어야 했다. 나도 싫어하는 내가 되었다. 삶의 단계마다 악순환은 반복됐다. 사랑이든 삶이든 일이든, 어딘가에서 한 번씩은 꼭 무참한 버려짐을 경험하게 되는 듯했다. 그래서 지금도 강박이 크고 안달이 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누구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떨고는 한다. 세상에 고통은 비정하게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여태껏 겪은 통증 중에서는 '버려짐'이 가장 아팠다. 그중 어떤 순간에 '빠꾸'를 들었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소용없는 초라한 가정이다.


그럼에도 괜찮다는 말, 그러니 버려지지 않겠다는 믿음. '빠꾸'가 한 사람에게 든든한 지지대이고도 남을 의미였겠다 싶다. 삶은 그리 대단치 않은 말 한마디로 견뎌지고 버텨질 수 있다. 그게 꽤 가난한 믿음일지라도 말이다. '빠꾸'에서만큼은, 나는 나면서부터 슬프게도 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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