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
프랑스 여행을 떠올리면 누군가는 에펠탑 조명의 반짝거림을, 누군가는 바토무슈 유람선에서 보았던 파리 전경을, 또 누군가는 몽마르뜨 언덕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게 지난 파리의 여행, 그 여행의 길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갑자기 내리는 비에 또 갑자기 찾아온 그 '신호'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들렀던 한산하고 조금은 어둑했던 한 카페다.
함께 여행한 동생과 들어간 그 곳엔 종업원 두어명과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커피를 마시던 프랑스 여인 몇 명이 전부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무 의자는 딱딱했고 동생과 번갈아가며 갔던 화장실의 계단은 발자국 한걸음 한걸음 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다. 그 날의 그 카페가 내 파리 여행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될 줄은 몰랐다. 화려한 에펠탑도 좋았고 유람선을 타고 보았던 파리의 전경도,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보았던 풍경도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여행책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 파리 시내 구석의 오래된 카페가 나에게는 '파리' 그 자체로, 기억속에 아로 새겨졌다.
여행의 길목에서 계획된 그 어떤 일정보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몸을 피해 들어갔던 그 어둑했던 카페에 앉아 바닥을 청소하는 종업원을 바라보다 창 밖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마주 앉아있는 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그 시간이 내겐 이리도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가 이토록 오래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듯 기대했던 그 어떤 무엇보다 스치며 마주한 장면들이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경우가 참 많다. 그래서 어느 한 대목도 버릴 것이 없고 사소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 곳의 기억만큼이나 함께한 사람 역시 오랜 시간 가슴에 남는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가장 오랜 여운이 남는 한 장면을 만들었듯 그 동생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오래 가게 될 줄 몰랐다. 승무원 준비를 하며 면접 스터디를 꾸리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 스터디 모집 글을 올렸었다. 내 글을 보고 쪽지를 보내온 그녀의 첫인상은 참 선하고 깨끗하고 고왔다. 선한 인상에 고운 마음씨는 겉모습에 고스란히 묻어나 스터디를 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지원한 항공사에 턱하니 합격했다. 회사는 달랐지만 같은 직업을 갖고 살아가다보니 공유할 것도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먼 곳에서 일하는 나를 틈틈이 챙겨준 그녀는 내가 한국에 있는 항공사로 이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응원으로 자신감이 부족했던 내가 이직할 결심을 할 수 있었고 용기내어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면접의 과정 중에도 그녀는 내 곁에서 따뜻한 말로 힘을 주었고 그런 그녀 덕분에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와 같은 항공사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면접 스터디로 만난 동생과 5년 뒤 같은 항공사 선후배가 되다니. 이것 역시 생각지도 못한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 후로도 그녀는 시기적절하게 내 곁에 있어주었다. 회사생활에 슬럼프가 왔을 때도, 사귀던 연인과 이별을 했을 때에도, 이유없이 울적하고 서글픈 날에도 그녀의 선한 마음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내 인생의 길목에서 예상치 못한 그 동생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도 또 하루의 길목을 지났고 다행히도, 감사히도, 무사히 그 길목을 통과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모퉁이를 지나며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남기며 살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나 하나의 발자국이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의미있는 것임을 안다. 길모퉁이에서 만난 인연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결국 그 인연이 살아갈 힘을 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느 한 걸음도 쉬이 생각할 수가 없다. 인생이라는 여행의 길목, 그 곳에서 만날 멋진 날, 좋은 인연을 기대하며 오늘도 뚜벅뚜벅 이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