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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랑 Jul 16. 2024

살아있다는 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Bangkok Thailand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이다.
-장 폴 사르트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남아시아 여행지 하면 태국의 방콕이 떠오른다. 나 역시 방콕으로 비행 가는 날엔 기분이 좋았다. 맛있는 태국 음식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현지 마사지, 그곳의 독특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밤거리와 야시장은 전 세계 사람들이 매료되기에 손색이 없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날의 방콕 비행은 유난히 러시아 승객이 많았다. 방콕에서 카타르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가는 긴 여정. 여행의 피로 때문에 이륙하자마자 잠든 승객으로 가득한 객실에 잠들지 않은 한 승객이 눈에 띄었다. 그의 커다란 눈은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객실에 그의 모니터만 환하게 켜져 있어 그가 보고 있는 화면이 승무원들에게도 잘 보였다. 그는 연신 비행기의 로드맵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두 번째 식사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승객이 갤리로 왔다. 그리고는 우리 승무원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This aircraft will crash!"

("이 비행기 추락할거야!")

새빨갛게 상기된 그의 얼굴. 불안한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 뭔가 심상치 않았다. 갤리에서 일하던 승무원 세 명은 그 러시아 남자 승객 앞에 서서 순간 얼음이 됐다. 가장 노련한 루마니안 승무원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자 그 러시안 승객은 이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고, 자신이 뭔가 느끼고 있다고 했다. 거듭 "I'm not crazy(나 미친 사람 아니야)"라며 이 위험 상황을 기장에게도 알리라고 했다. 승무원들은 손님을 진정시키며 우선 객실 사무장에게 보고 한다고 했고 이 사실을 전달받은 사무장은 특이 사항으로 기장에게 보고했다. 승무원 모두 그 승객이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진짜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했다.


승객이 자리로 돌아가고 갤리에 남은 승무원들은 불안한 마음은 내려두고 웃으며 남은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착륙 준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상태로 점프싯에 앉았다.


평소보다 더 긴장한 채로 비행기의 고도는 점점 낮아졌다. 다행히 우리는 무사히 착륙했고 승무원들은 그제야 속 시원하게 웃었다. 재미난 해프닝으로 남기고 집에 돌아가 꿀같이 달디 단 잠을 잤다. 일어나서 폰을 켜니 두바이에서 러시아로 향하던 항공기가 추락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하던 정신이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카타르가 아닌 두바이에서 출발한 항공기라 내가 모시고 온 승객이 탄 비행기는 아니겠지만 러시아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정말로 떨어졌다. 그 승객이 뭔가를 예측한 건 틀림없었고 정말 그가 느낀 대로 안타까운 사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에는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의 리스트가 올라왔고 모두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그 비행기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누구도 그 비행기를 타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 선택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인간이 아무리 정신을 곤두세우고 예측한다 해도 그 선택지로 살아보기 전까진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면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고 평소엔 없을 것만 같던 그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직 후 오랜만에 방콕으로 비행을 가게 되었다. 이직한 회사에서는 방콕 비행이 자주 나오지 않는데 그날은 한 승무원이 병가를 내서 스탠바이 근무였던 내가 급히 불려 가게 되었다. 처음 만난 승무원 모두 친절했고 특히 사무장님이 정말 부드럽고 밝으셨다. 갑작스레 그 비행에 합류한 내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비행 내내 배려해 주셨다. 언제나 미소를 유지하며 밤샘 비행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에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 생각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회사의 경조사 게시판에 그녀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내 눈을 의심했지만 사실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밝은 웃음이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시 또 비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마주치면 그렇게도 반갑게 인사해 주셨는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니. 다음에 또 뵙겠다는 말이 슬픈 말이 돼버렸다.


멀리 소풍을 떠나신 사무장님의 카톡 프로필을 보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오랜 시간 비행을 하면서 건강이 안 좋아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행기에서 일하는 것을 택한 사무장님.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고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담긴 선택이 비록 이른 이별을 가져왔을지라도 하루하루 희망을 품었던 그분의 결정은 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방콕 비행은 어쩌다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아픈 비행으로 남게 되었다. 그 아픈 기억은

리에게 다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내가 애써 고민하고 거듭 고민해서 선택한 것일지라도 꼭 그것이 최고의 결과를 주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연속인 인생길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선택해야 함을

배웠다.


결국 '운명'이라는 말로 밖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인간의 나약함에 힘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무기력하게 남은 생을 보내기에는 오늘 하루가 너무 귀한 것이라는 것 또한 아픈 일을 겪으며 배웠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라고 내게 알려주신 선배님의 메시지를 잊지 않겠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선택지들 앞에서 신중하게 행복을 위한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전화하고 지금 만나러 갈 것이다. 그 순간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일들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을것이다.  다음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만났다면 그 기적에 감사하며 오직 기쁨으로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가득가득 채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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