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입이 작고 숟가락질이 서툰 어린 시절, 나는 늘 밥알을 몇 개씩 흘리면서 먹었다. 밥을 안 흘리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엄마는 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닦아주며 아가씨가 되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빨리 아가씨가 되고 싶었다.
밥 한 톨 흘리지 않는 어른이 되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며, 입 주변에 밥풀이 군데군데 붙어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꿈, 가지치기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5살의 어린이가 그토록 바랐던 ‘아가씨’가 되었을까?
책 속 어린이들은 모두 시인이었다. 별말 아닌 것 같은데, 쉬운 단어들로 몇 마디 툭 던졌을 뿐인데, 나는 꼬마 시인의 말에 책 읽기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독서교실 선생님인 작가는 장애아가 나오는 책을 읽고 예지에게 책의 주제를 물었다. ‘서로 몸이 달라도 ( )자.’는 빈칸에 예지는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는 답을 했다. 예지의 답에 반해버린 선생님이 원래 생각했던 답은 ‘존중하자’였다.
나 역시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예지에게 반해버렸다. ‘존중’은 같이 노는 것, 반겨주는 것이었는데 우리 어른들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높임말을 쓰며, 격식체를 사용하며, 한자어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나열하며 그렇게 진정한 존중의 의미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타인을 존중한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상대를 반기며 같이 노는 것인데 말이다.
하준이는 정글짐 술래잡기를 걱정하는 선생님에게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라고 안심시켰다.
어렸을 때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정글짐에서 술래잡기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손발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웠었는데, 어느새 몸 사리는 어른이 되었다. 작가는 하준이의 말에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지만, 나는 나의 주저함들에 대해 생각했다. 도전해 보기도 전에 걱정하는 어른이 된 건 세상 무서운 걸 알게 되어서도 있지만, 모래가 있는 걸 알면서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과 떨어지는 걸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또 한 번 큰 울림을 주었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 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 한다.
냉소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흔히, 곳곳에서 봐왔던 것인가. 그리고 그 냉소 때문에 얼마나 겹겹이 진심을 둘러쌌던가.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영혼 없는 삶을 사회생활이라 명명하며 우리는 자신과 모두를 속이고 있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진솔하다. 가식이 없다. 말과 행동에 진심이 담겨 힘이 있고 빛난다.
어른들도 할 수 있다. 진심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마음속 말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잘 없다. 한 꺼풀, 두 꺼풀, 세 꺼풀. 그렇게 우리는 꽁꽁 둘러싸서 그 안에 진심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뭉치 여러 개를 주고받는다. 그중 몇 개는 아마 텅 비어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었는데도 외롭다고 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이 세상에 없다고도 하고, 술도 몇 잔 마시다가, 책도 봤다가 영화도 봤다가, 예능 프로를 보며 낄낄 웃어보기도 하다가. 그러다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진심을 찾아내 또 몇 겹 둘러싸버리는 것이다.
진심, 용기, 자신감. 어린이들이 제일 잘 다루는 삼총사는 하나라도 부족하면 힘을 내기가 어렵다. 이 중 제일 힘이 센 건 진심이다. 진심이 대장답게 잘 버티고 있는 한, 용기와 자신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못한다. 이 삼총사 덕에 우리는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걸 익혔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왜 그동안 소홀했을까. 왜 모른 척 돌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용기와 자신감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진심과 용기와 자신감은 어린이들에 비해 초라해 보였다. 사회생활용 옷을 덕지덕지 입은 삼총사가 힘겨워보였다.
어린이들처럼 홀가분해지는 건 어렵지 않다. 사람들을 반겨 주고 같이 놀기, 어렸을 때처럼 모래를 믿고 다칠 걱정 없이 정글짐을 오르기, 그리고 그림을 잘못 그렸을 땐 얼른 빈 종이에 다시 그리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아는 것들이니까. 어렸을 때 해봤던 것들이니까.
‘어린이라는 세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세계다. 책을 덮고 잠시 잊고 지냈던 나의 어린이 세계를 떠올렸다. 몸집은 작지만 순수한 힘으로 가득 찼던 그 어린이를 기억하며, 나를 보호한답시고 둘러싼 껍데기를 한 꺼풀씩 벗겨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로 덧칠하지 않은 꿈과 꺾이지 않은 생각을 찾아내볼 생각이다. 그런 다음 한층 홀가분해진 몸으로 내 안의 삼총사와 함께 더 높이 비상할 것이다. 어린이들처럼!
짧은 에필로그
작가님의 어린이의 세계 2를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