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첫 공황장애로 고생한 여름휴가가 끝난 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간헐적 공황장애와 일사병으로 개고생 하다 여름휴가가 다 끝나버렸다.
쉬고 놀겠다고 휴가를 썼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럴 땐 어떡하냐고 직장에 물어보니 휴가를 안 쓴 걸로 처리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일단 당장 바로 출근할 수 없어 병가를 며칠 썼다.
병가를 하루이틀 아닌 며칠 이상 쓰면 바로 제3의 기관과 연결된다. 고용주와 파트너십을 맺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역량 강화에 도움을 주는 기관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과 연계된 곳은 Human Capital Care라는 곳이었다. 그들의 업무 중 하나는 병가에 대한 팔로우업을 하는 것이다. ‘아파서 회사를 한동안 못 나올 정도면 얘가 괜찮은가?’ 확인해 보고 어떻게 도와줄지 같이 대책을 세워보는 거다.
병가를 다 쓰고 얼마 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일차적으로 컴퍼니 닥터(company doctor)라 불리는 직장 내에 상주하는 의사의 대리인(delegate)과 연결된다. 의사를 만나기 전 대리인과 비밀이 보장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다음에 진짜 의사를 만나 더 얘기하고 싶으면 별도로 약속을 잡아준다. 특이한 점은 모든 약속 확정이 우편으로 집에 온다는 점이다. 우편에 ‘confidential’이라고 찍혀서 약속 날짜와 장소가 전달된다. 역시 아날로그다. 네덜란드는 직불카드 사용도 우편으로 비밀번호, 실물 카드를 다 받아야 가능하다.
진행 순서는 이러하다.
인사팀에서 연락 옴
직장 내 의사의 대리인과 1차 상담
필요한 경우, 의사와 상담
후속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 정신과 의사(psychiatrist) 또는 사회복지사(social worker)와 연결
의사 대리인과는 45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약간 친구랑 수다 떨듯이 대화를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상세하게 다 털어놓았다. 빼먹는 내용이 있을까봐 타임라인을 미리 정리해 갔다. 상사의 문제 행위부터 시작해서 쉬지 않고 얘기했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You must have been exhausted.”라고 했다.
아, 누가 들어도 납득이 쉬운 상황들은 아니구나 싶으면서 내가 이상한 건 아니었구나 싶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전문가에게 털어놓고 앞으로 상사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공황 증상이 또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상담도 받고 싶다고 하니 psychiatrist와 연결해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또 근무시간을 조정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사와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약속을 잡아주겠다고 했다.
의사와는 약 10일 뒤에 전화로 20여분 얘기를 나눴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직 재택근무가 흔했던 터라 전화로 대화했다. 먼저 현재 상태가 어떤지 얘기를 나눴다. 이전보다는 낫다고 얘기했다. 의사는 대리인의 기록을 바탕으로 대부분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공황증세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내가 panic disorder인 것 같다고 하니 의사가 해준 말,
공황장애는 보통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control)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물론 영어로 얘기했다. 난 아직까지도 이 말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증상이 전무한 요즘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 떠올리는 말이다.
상사의 오해와 착각에 대해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던 순간들, 그에게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하자고 부탁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아, 내가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안해 봤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다 컨트롤해보려고 했구나.. 깨달았다.
그러면서 의사는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이기주의(egoistic)까진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게 더 신경 쓰고 자신을 더 돌보세요.
되게 뻔한 말이긴 하다. 적정선은 지키되 나한테 더 집중해야겠다 싶었다. 내가 내내 저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만 신경 썼구나. 내 감정과 건강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구나. 어쩌면 되게 당연한 말들인데 의사를 통해 명확하게 들으니 확 와닿았다.
그럼 업무를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이제는 그래도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내가 맡은 일을 잘 마무리 짓는 거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그런 좋은 전략을 세우기를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계약만료 후에 새 프로젝트로 더 체류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해 주었다.
휴가기간 시작부터 아팠던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휴가 때 아팠다는 게 증빙되면, 일반 휴가를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의사가 증빙해서 문서화한 후 직장에 전달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응급실을 방문했던 자료만 있다고 하고, 이후에는 일사병으로 밥과 물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총 2주 동안 아팠다고 했다. 응급실 자료 외에 증명할 자료가 없는데도 추가 증빙자료 없이 그 전체 기간 동안 아팠다는 것으로 서류를 작성해 줬다. 모든 증상에 대한 증빙자료가 없어도 기본적으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의사는 작성한 자료를 인사팀에 전달하였고, 난 시간이 좀 지난 후에 휴가를 돌려받았다. 결국 난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휴가를 다 쓰지도 못했다. 1달에 가까운 휴가 일수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다 돈으로 돌려받았다.
직장 내 갈등 또는 괴롭힘은 한국이나 네덜란드나 어느 나라에나 있고, 일하다가 아픈 상황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요즘에야 한국에서도 연차 사유를 안 써도 되는 추세라 하지만, 여전히 사유 작성을 요구하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은 존재한다. 내가 겪은 네덜란드 직장은 우선 병가를 별다른 설명 없이 쓸 수 있다. 연차나 여름휴가를 쓰는 데에도 아무런 간섭이 없다. 그저 정해진 일수만 잘 지키면 된다.
직원이 아픈 것, 그리고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 모두 중요한 건강 문제로 간주한다는 게 인상 깊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체계가 직장 내에 체계적으로 잡혀있다.
난 그 덕을 제대로 봤다.
지금 네덜란드에 살지 않고 있어도, 공황장애 증상이 전혀 없어도 그때 의사와 사회복지사와 나눴던 얘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