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서 Nov 16. 2024

클레어 키건 ' 푸른 들판을 걷다'

독서리뷰


오랜만에 책을 빌렸다. 아직은 책에 오래 집중하는 것은 무리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좋다. 도서관에 신청했던 책이 도착했다고 해서 가지고 왔다. 신청은 더운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겨울에 도착했다. 오래전에 신청을 해둬서 이미 읽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들었다가 끝을 보지 못해서 마무리가 안된 책들을 먼저 빌려왔다.




가벼운 키건의 단편 소설부터 먼저 들었다. 그녀의 장편을 통해 아일랜드라는 머나먼 나라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혹독했음을 알았다. 잔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묘사로 '이래야 한다'는 강요 없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녀의 방식을 좋아한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그녀가 좋아졌다. 폭력이 익숙한 무심한 사람들과 타인에게 가해진 폭력을 어쩔 줄 몰라하는 따듯한 사람들이 대비를 이루며 독자의 인류애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차마 저런 인간은 아니라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와 관련 없는 타인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하여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직접 가한 폭력이 아니라고 해서 나는 폭력적이지 않은 걸까. 폭력을 목격하고 방조하는 것도 폭력이지 않을까.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동조 또한 폭력의 일종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기회였다.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수업을 하며 '방관도 폭력이다'라고 가르쳐놓고 정작 세상의 폭력에  무심했던 내가 떠올라 마음이 힘들었다. 무거운 주제의 포착이 매끄러웠던 키건의 소설은 짧지만 인상 깊었고 강렬하기도 했다.



이번 단편소설은 내가 읽은 전작보다 더 흐릿하다. 정확하게 콕 집어서 알려주기보다는 알아서 떠먹도록 하는 키건의 방식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단편 모음은 짧은 서서안에 담긴 의미가 모호하다. 딱 와닿지 않아서 한참을 생각해 봐야 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어려운 숙제 앞에서 선생님의 의중부터 파악해 보려는 학생의 심정이 되어 버렸다.




작별선물,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총 6편의 단편을 읽으며 모든 작품이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알면서도 눈감은 엄마의 인정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딸이 독립을 앞두고 과거를 소회 하는 '작별선물'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딸로부터는 성을 착취하고 아들로부터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가족 내 폭력을 엄마는 알면서도 외면한다. 원초적 빌런인 아버지보다 나약한 엄마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다. 수동적인 여성이 저항조차 못하고 길들여져서 자녀에게까지 학대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를 생각했다. 길들여진다는 것의 폭력성을 곱씹었다. '그러려니' 라며  쉽게 넘어가는 일이 익숙한 현실 세계에서 나는 어떤 죄를 짓고 있을까, 문득 오싹해졌다. 감당하기 어려운 가족의 비밀이 거대해서 글자만으로도 흡수가 어려운데, 뺄 건 다 빼고 쥐어짠 빨래처럼 구깃구깃. 무심하게 건네는 키건의 문체가 건조해서 더 아프다.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 사제의 이야기는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 만났다. 문장이 가장 마음이 든 작품이라, 키건의 문장을 남겨 본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데, 그러한 인간의 사랑은 어긋나기 쉬워서 완성하기 어렵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까.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 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 때 바라는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그는 그녀를 만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난롯불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어두운 빨강 머리의 가르마를 보았다. 그는 그저 난로의 열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뜨거운가 싶어서 손을 뻗었다. 그의 의도는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녀가 그의 손짓을 오해하고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자기 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삼림 관리인의 딸'을 읽다 보면 '각자가 가진 비밀'에 대한 서사 모음일까? 짐작해 보며 작가의 의중을 한 번 더 헤아리게 된다. 마사가 사랑하지 않은 남편과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자면 자녀였다. 사랑스러운 딸이 아빠로부터 상처를 받자 비밀을 폭로해 버린 아내 마사의 행동을 관찰하며 키건을 키건이도록 만들어주는 테마, 폭력에 대해 다시 상기해 보았다. 우리의 가부장적인 전통이 만들어낸 일상적이며 만성적인 폭력은 아일랜드 농촌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소설의 종말에서 어렴풋하게 전해지는 작가의 의도는 자폐증상처럼 보이는 아들이 일으킨 불장난의 결론과 닮아 보였다. 예리하지 못한 독자는 작가의 명확한 의중을 알아챈 것 같진 않다.



'물가 가까이'도 '굴복'도 일상에 스며든 애매한 폭력이 거슬린다. 아들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례한 부호와 재혼한 엄마와 조심성 없는 새아버지가  하버드생 아들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가 불편해서 읽는 독자도 조마조마하다. 할아버지로부터 배려라고는 받지 못한 할머니와 손주의 삶이 교차되며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하버드생 아들은 앞으로 잘 살 수 있을까.' 깊은 걱정이 찾아든다.  '굴복'도 마찬가지다. 약혼에 책임감이 없는 중사가 무심코 뱉어내는 말과 행동에서 알아챌 수 있는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는 폭력이 있다. 아이의 저녁 빵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고 비싼 오렌지를 혼자 먹어치우는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호감 가는 외모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의 속내가 가증스럽다. 그의 폭력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지 열린 결말 앞에서 이번에도 조마조마하다.



키건이 2007년에 출간한 단편집을 읽으며 명확하게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독자는 키건의 특징을 복습 삼아 캐치하며 읽는 것 외, 새로운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우리의 특별한 근현대사를 해외의 독자들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극대화시키면서 또렷하게 전하는 작가들처럼, 키건도 아일랜드만의 고유성을 포착해서 작가의 가치관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인상을 받은 정도.



소설에 깃든 문학적 감성이나 의미는 미처 알지 못하고 독서를 마쳤다. 그녀의 심도 있는 의중은 파악하기 어려워서 작품의 겉핥기만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독해력이 아쉬웠다. 키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데, 이번 단편은 실패했다. 독자의 미천한 이해력과 감수성이 안타까운 독서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