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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Sep 13. 2023

숲길에서

11. 탕수육

  탕수육은 돼지고기나 닭고기에 녹말을 묻혀서 기름에 튀긴 후 새콤달콤한 소스를 부어 먹는 요리다. 지금은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이다. 하지만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1980년대 초, 대학 졸업과 발령을 앞에 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를 외숙부가 불렀다. 

  “너도 이제 직장을 갖게 되었으니 떠돌이 생활을 끝내야 되지 않겠냐? 내가 잘 아는 사모님의 딸이 초등학교 여선생님이란다. 내가 그분에게 네 이야기를 했더니 너를 직접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신다.”

  외숙부는 내게 그 집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일이 끝나고 저녁때가 되어 숙부님이 준 번호로 전화를 했다. 중년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왔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일 낮에 저희 집으로 오세요.”

  집은 산수동 법원 뒤에 있었다. 마당이 넓은 이층 양옥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을 통해 내 목소리를 확인한 후 대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마당을 지나는 사이에 현관문이 열렸다. 사모님이 밝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세요. 잘 왔어요.”

  널찍하고 깨끗한 거실 가운데는 미리 준비한 음식상이 놓여 있었다. 상에는 간단하게 차와 과일 그리고 음식이 담긴 접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 놓인 큰 접시에는 튀김과 희끄무레한 풀반죽이 뒤섞인 음식이 들어있었다. 시큼하고 달큼한 냄새가 났다. 내가 처음으로 보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내게 그걸 먹으라고 권하였다. 

  새콤달콤한 소스가 혀를 즐겁게 하였고, 기름 향을 은은하게 내뿜는 바삭한 식감의 튀김과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가 입안에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 맛에 빨려 들어 꾸역꾸역 먹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내게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물었던 것 같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면서 그저 먹기에 바빴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물은 것도 다름 아닌 음식 이름이었다. 정신이 온통 음식에 팔려 있었던 것이다.

  “사모님, 이 음식 이름이 무엇이죠?"

  “하하하. 처음 먹어보시나요?”

  “네. 처음 먹어봅니다. 정말 맛있는데요.”

  “탕수육이랍니다.”

  “탕수육이요? 어디 식당에서 주문하신 건가요?”

  “아니요. 우리 딸 보배가 만들었어요.”

  보배가 실제 이름인지 아니면 애칭(愛稱)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딸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아이라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뒤늦게야 진짜 만나보아야 할 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따님은 어디 가셨나요?”

  “아, 오늘은 그냥 저만 만나고 가시면 돼요. 다음에 오시면 아마 딸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래도 그저 좋았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탕수육이라는 기막힌 음식을 맛보지 않았는가? 

  ‘탕수육이라. 음. 맛있었지. 게다가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이 따님이라니.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군.’

  나는 그 가정과 가족에 대해서 부쩍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외숙부가 내게 연락을 했다. 

  “사모님이 너를 좋게 보시는 것 같더라. 오늘 저녁에 전화해 봐라.”

  약속이 잡혔고, 나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였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거실에는 방석이 놓여있었는데, 두 개만 있었다. 이번에도 따님은 동석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나와 사모님이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리 오래지 않아 붉은 꽃무늬가 가득한 앞치마를 입은 따님이 밥상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얼굴은 홍조를 띠었는데,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와 사모님 사이에 상을 갖다 놓자마자 곧바로 거실을 떠나버렸다. 미처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싫은 걸까? 관심이 없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상은 정갈하였다. 하얀 밥그릇은 뚜껑으로 덮여 있었고, 된장국은 대접에 3분의 2쯤 채워져 있었다. 가지런하게 자른 김이 흐트러지지 않게 한가운데에 이쑤시개를 쑤셔 둔 것이 눈에 띄었다. 김치도 반듯하게 잘랐을 뿐만 아니라, 한 겹씩 집어먹기 좋게 배열해 놓았다. 다른 반찬들 역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밥상은 저 선생님이 또 이 가정이 흐트러지지 않고 온전함을 보여주고 있구나.’

  나는 밥상에서 거실에서 여선생님과 사모님의 표정에서 그 가정에 깃든 품격을 느꼈다. 조금 위축되었다. 내가 살아온 구부러지고 뒤틀린 삶이 대비되어 짧은 순간 열등감이 느껴지고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만나야 할 당사자와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사모님의 전송을 뒤로하고 되돌아왔다. 뭔가 아쉬웠다.

  며칠 뒤 서로 연락이 닿아 나는 그 집을 세 번째 방문하게 되었다. 사모님은 딸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볼 기회를 가지라고 하였다. 그날 내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는 따님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집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사모님은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안내로 계단을 타고 거실에서 이층에 있는 그녀의 서재로 올라갔다. 피아노가 있었다. 그녀는 내게 책상 의자를 권하였다. 그녀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침묵이 조금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긴장하였다. 뜸을 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가 그쪽에 조금 이상해 보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이 만남을 원치 않았어요.”

  처음부터, 아니 나를 보기 전부터 이 만남을 희망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 맥이 풀렸다. 나는 그동안 공연히 헛걸음만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저 궁금하기만 하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그쪽을 만난 뒤부터 무척 좋아하셨어요. 한 번 왔다 가신 뒤부터 저를 설득하려 드셨어요.”

  사모님의 우호적인 마음이 고마웠다. 

  “사실 오늘도 저는 이런 만남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강권을 뿌리칠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잘 알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자리를 뜨려 하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어머니는 그쪽을 무척 좋게 보셔요. 하지만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저예요. 제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아마 다음에 또 연락이 갈지도 몰라요. 저는 어머니를 말릴 자신이 없어요. 그쪽에서 알아서 대응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게도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질문이 가슴에만 가득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리되지도 쏟아내지도 못한 말은 응어리가 되어 무겁기만 하였다. 나는 쫓기듯 그 집을 떠났다. 허망하고 답답하였다.

  발령 발표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그 집에서 다시 내게 연락이 왔다. 

  “대화가 없으면 이해할 수도 없는 거예요. 자신들의 마음을 편하게 풀어놓을 기회를 가져보세요. 사람의 인연은 그리 간단치 않은 거예요.”

  이미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다시 흔들렸다. 그래도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모님의 뜻을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 집을 네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모님의 권유가 있어서 나와 여선생님은 시내 찻집으로 데이트를 나갈 예정이었다. 나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현관 밖에서 따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거실 쪽에서 새어 나오는 어머니와 딸의 짤막한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여기 데이트 비용이다. 갖고 가거라.”

  “제게도 있어요.”

  “고생하고 산 사람이 아내를 아끼며 산단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 봐.”

  “엄마.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성품이 어떻게 원만하겠어? 얘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모녀의 대화를 듣자마자 여러 가지 의문점이 단번에 풀렸다. 사모님과 딸의 태도가 그토록 다른 이유를 비로소 온전히 알게 된 것이다.

  ‘아, 그랬구나.’

  그날 눈이 내리는 거리를 그녀와 함께 걷고 차를 마셨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나는 횡설수설하였고, 그녀는 나를 적당히 달래서 그녀의 세상에서 밀어내려 하였다. 외숙부는 아마 사모님에게 나의 굴곡진 삶과 극복 과정을 과장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사모님에게는 빛나는 훈장처럼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영리한 여선생님에게는 결손환경 자체로 보인 것이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사는 정상가정을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내가 어떻게 정상가정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고단한 길을 걸어온 것도 억울한데. 억울하기만 한데. 그늘진 과거가 힘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내 발목을 잡는구나. 그건 내 탓도 아닌데.’

  삶에 대한 회의와 불안과 어두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3월에 발령을 받았다. 그해 가을 어느 토요일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저는 보밴데요.”

  “보배라고요? 누구신지.........”

  나는 지난 겨울의 일을 벌써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혹시 법원 뒤쪽 이층 양옥집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 법원 뒤쪽. 기억납니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제가 이쪽에 일이 있어서 왔어요.”

  “아, 네. 점심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내가 점심을 사주어야 할 것 같았다.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나는 한 그릇을 다 비웠지만 그녀는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나는 사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먹은 탕수육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정말 맛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제가 여기 근무하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걸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냥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조금 의아하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걸 캐물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미 없는 말들을 싱겁게 주고받다가 그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늦가을에 그녀로부터 편지가 한 장 왔다. 나와 더 만나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녀를 더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단호한 거절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온실에서 곱게 자란 꽃이라면, 저는 들에서 거칠게 살아온 야생마입니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므로 세상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12월 어느 날 또다시 그녀로부터 편지 한 장이 왔다. 

  “저는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서 있어요. 제 선택에 당신과의 만남이 중요해요.”

  나는 어떤 형식이 되었건 간에 그녀와의 만남을 완전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주말에 그녀가 지정한 장소로 갔다. 

  “저는 지금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해요.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과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달라요. 가족들 사이에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제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는 당신을 선택하고 싶어요. 가족들은 지금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지금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면 제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녀가 그때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를 반려자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런 선택 상황이 나를 압박하였다. 확고한 거절 의사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삶이 짐스러워졌다.  

  ‘내게 온 행복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만약 함께 살다가 갈등이 생긴다면, 내가 받았던 상처가 다시 도진다면, 지금 확실하게 만남을 정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녀는 암암리에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차를 마신 뒤 함께 거리로 나왔다. 어느새 거리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충장로에는 네온사인과 상가의 불빛이 가득했다. 금남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내가 동승하기를 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택시 뒷문을 열고 그녀 홀로 타게 한 뒤 문을 닫았다. 

  택시는 그녀만을 태운 채 떠났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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