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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픽션 Feb 02. 20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영화가 빚어낸 여인의 얼굴

페미니즘으로 영화읽기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


하얀 캔버스에 목탄으로 선이 그어지고, 다시 다른 하얀 캔버스에 선이 그어진다. 그리고 대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의 얼굴이 몽타주로 이어진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엔 녹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은 말한다. '잘 관찰해야 한다'고. 그러다 선생님의 시선은 자신을 그리는 학생들을 넘어 뒤쪽에 있는 어느 한 그림을 향해 닿고, 학생들에게 저 그림을 꺼낸 게 누구냐고 묻는다.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 그림을 향한다. 그 그림의 이름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보는 자와 보는 자의 평등한 관계에 대하여


이 영화는 마리안느라는 화가가 어떻게 엘로이즈와 함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초반은 미스테리의 형식을 띠고 있다. 외딴 섬에 있는 저택에 초대받은 화가는 이 집안의 첫째 딸이 결혼을 앞두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인이 자살로 강하게 추정되는 상황에서 이 혼담은 수도원에 있던 둘째 딸 엘로이즈에게 넘어가고, 화가 마리안느는 결혼에 앞서 약혼자 집안에 보낼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왔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그 집의 하녀인 소피에게 지난 번에 왔던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데 실패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원인은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굴 없음의 이미지. 엘로이즈가 등장하기 전에 우리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얼굴의 부재'를 본다. 첫 번째로 제시되는 '없음'의 이미지는 마리안느가 창고에 들어가 발견한 먼저 왔던 화가의 실패한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엔 녹색 드레스를 입는 여인의 몸 윗부분이 진흙색 페인트로 뭉개져 있다. 그 다음으로 관객들은 주인 없이 공중에 떠 이동하는 녹색 드레스 자락을 보게 된다. 모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태에서 소피는 아가씨의 녹색 드레스를 안고 들어와 마리안느에게 보여준다. 드레스는 마치 유령이 입고 있는 듯 틀이 잡힌 채 허공에 떠 있다.


엘로이즈가 등장한 후에도 영화는 쉽게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리안느와 관객들이 처음 마주하는 것은 상체를 두건으로 온통 감싸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다. 그녀는 마리안느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먼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고 마리안느는 무작정 그녀의 뒤를 좇는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며 두건이 벗겨져 그녀의 눈부신 금발이 드러나고, 그녀는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이상한 기시감. 절벽을 향해 달리는 얼굴 없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관객들은 자살한 언니의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 마리안느 또한 불길한 예감을 갖고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린다. 예감과 달리 엘로이즈는 절벽 끝에서 멈춰서고, 뒤를 돌아본다. 관객과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그녀의 얼굴은 눈빛이 우울해 보일지언정, 볼이 붉게 달아올라 생명력이 어려있다. 그녀는 말한다. 그 동안 '애타게 원했다'고. 마리안느가 묻는 '죽음을?'이라는 질문에 엘로이즈는 대답한다. '달리는 것을'.


 그녀는 절벽에 떨어져 죽은 언니의 소문과 달리 자신만의 얼굴을 갖고 있고, 답답한 집을 벗어나 '달리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엘로이즈 몰래 초상화를 그리라는 의뢰를 받고 산책 친구로 소개된 마리안느는 기억으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관찰한다. 그녀는 유심히 엘로이즈의 얼굴 윤곽과 귀의 곡선과 눈의 색을 바라보고, 엘로이즈는 그런 마리안느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부딪히는 시선과 엇갈리는 시선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이 그 시선을 돌려줬을 때, 둘 사이엔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예술은 관찰과 기억으로 빚어지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훌륭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는 실패하고 마는데, 그건 그때까지 마리안느가 그림의 대상인 엘로이즈와 제대로 관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은 화가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화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응답했을 때, 그 또한 화가에게 자신의 시선을 돌려줬을 때 비로소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리안느의 작업은 자신이 모델인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만큼 엘로이즈 또한 그녀를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진전된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부터 관계가 시작되고, 그 시선이 평등하게 맞부딪힐 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치 있는 예술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와 보는 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이 예술관은 관계와 사랑에서 '권위 없는 평등함' 을 추구하는 영화의 테마와 이어진다.



계급을 넘어선 평등한 응시


 영화는 내내 여성들간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다. 이건 영화의 주연인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뿐만 아니라 하녀인 소피와의 관계 속에서도 드러난다. 초반에 제시되는 소피는 여느 영화에 등장하는 하녀와 같이 무감각한 얼굴을 하고 있고 서사와 화면의 중심에서 빗겨나가 있다. 하지만 저택의 주인인 부인이 여행을 간 이후부터 소피는 더 이상 '집안 일을 하는 하녀'가 아니라 인격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카메라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세 여인의 모습을 한 미장센 안에 균등한 비율로 담아내고, 어느 순간부터 소피를 다른 두 여인 만큼이나 깊게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런 공평함의 감각은 엘로이즈가 오르페우스 신화를 낭독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카메라는 식탁에 둘러 앉은 이 세 명에게 모두 공평한 숏을 배분하는데, 이때 낭독을 듣는 소피의 눈은 평소와 달리 깊은 감정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다른 이들 만큼이나 예술을 감각할 수 있는 한 인격체의 얼굴로 영화 안에 자리잡는다.


소피의 뜻하지 않은 임신과 낙태 또한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에피소드이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피의 낙태 시술에 동행하는데, 이때 엘로이즈는 고개를 돌리는 마리안느에게 그 장면을 똑바로 볼 것을 권유한다. 셋이 함께 경험한 이 장면은 저녁에 엘로이즈에 의해 다시 재현된다. 시술이 끝난 밤에 엘로이즈는 누워있는 소피와 함께 이 장면을 재연하며 마리안느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다. 남성이 결코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장면을 친밀하고 평등한 세 명의 여성들이 함께 경험하고 또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게 제한되어 있다고 했던 마리안느의 이야기와 맞물리며 독특한 감각을 자아낸다.



불과 물로 그린 그림


영화에는 내내 불과 물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바다를 건너 섬으로 향하던 중 마리안느는 바다에 떨어진 캔버스를 되찾기 위해 물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후에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화가라는 정체를 알고 나서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즉 그들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그리고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로 인해 각각 한 번씩 바다에 온 몸을 적시게 된다. 한편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리안느는 전에 왔던 화가가 그리기에 실패한 초상화에 촛불을 비춰보다가 그만 불을 붙이게 된다. 마리안느는 한 동안 심장이 불타오르는 초상화를 응시하고, 다음 장면에서 초상화는 벽난로 안에 들어가 활활 타오른다. 이 모티브는 여인들의 밤 축제 장면에서 피워올린 모닥불이 붙어 드레스 끝자락이 타오르는 채로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으로 반복된다. 마리안느는 그런 엘로이즈의 손을 다급히 잡아 끌어당기는데,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드레스에 불이 꺼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낮에 손을 잡는 장면으로 과감하게 점프한다. 이 점프컷은 다시 밤에 손을 잡는 장면 - 그리고 낮의 키스신으로 마법같이 이어지게 된다. 드레스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떨어뜨린 불씨로 인해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이다.



오르페우스를 부르는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던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다시 살리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고, 그의 연주는 죽음의 신 하데스조차 감탄시키게 된다.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걸며 에우리디케를 살려 지상으로 보내 줄 것을 약속하는데, 그건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오르페우스가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결국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고, 그 둘은 영영 이별하고 만다.


함께 둘러 앉아 이 유명한 신화를 낭독하는 장면에서 소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오르페우스가 참아야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기 보다 시인이기를 선택한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에우리디케를 '기억'하기 위해 돌아봤다는 것이다. 이에 엘로이즈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불렀기' 때문에 그가 돌아봤을 거라는 것이다. 엘로이즈의 이 참신한 해석은 마리안느가 자신을 그릴 때 그녀에게 나 또한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던 태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실제로 엘로이즈는 둘의 마지막 순간 마리안느에게 '나를 돌아봐'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때 마리안느가 뒤돌아 본 엘로이즈는 이전에 그녀가 몇 번이나 저택에서 마주친 흰 드레스를 입은 혼령과 정확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리안느는 이 한 번의 돌아봄 후에 문을 닫고 떠나고, 엘로이즈의 이미지는 문이 닫히는 순간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만다. 마치 저승의 부름을 받고 지하 세계로 끌려가는 것처럼.


그런데 왜 이 이미지가 실제 일이 발생하기도 전에 유령처럼 나타나 떠돌았던 걸까? 그건 예술가에게 있어서 '영원한 이미지'의 무시간성 때문이 아닐까? 백 번 천 번도 넘게 평생 동안 반추할,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이미지. 그건 마리안느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서 이미 시간을 초월해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일 수 있다. 결국 이 이미지는 무시간성을 띄고 극 중간에 문득 문득 마리안느 앞에 출몰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그린 여인의 얼굴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에 비유되는 이별 이후에 영화는 다시 시작 부분으로 돌아온다. 미술 교실의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저마다 마리안느를 그린 그림을 제출하고 떠난다. 이 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을 꺼냈던 학생의 그림을 보고 마리안느는 '나를 슬프게 그렸구나' 라고 말한다. 학생은 선생님이 슬퍼보였다고 이야기하지만, 마리안느는 웃으며 말한다. '난 더 이상 슬프지 않아.' 이 장면의 시간은 실제로 영화 시작 부분에서 바로 이어지지만, 이 장면에서 마리안느의 얼굴은 영화 시작 부분에서의 슬픔에 잠긴 모습과는 질적으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영화의 시간을 통과했다.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에게 있었던 사랑의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그녀는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사적으로 완결을 이룬 이 장면에 더해 영화는 두 가지 사족을 덧붙인다. 하나는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개의 그림이 전시된 미술 전시회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교향곡 연주회에서의 마주침이다. 엘로이즈가 교향곡을 처음으로 듣는 모습을 마리안느가 바라보는 이 마지막 장면은 스토리로서가 아니라 '영화'로서 완결을 맺는 장면이다. '불'과 '물'이라는 두 가지 은유와 바라보는-보여지는 '시선', '얼굴, 그리고 '예술'이라는 모티브에 더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사유가 모두 종합되어 제시되는 놀라운 씬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 제시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마리안느가 완성한 작품이라면, 마지막에 비춰지는 엘로이즈의 얼굴은 이 영화가 완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거리상 결코 마리안느가 볼 수 없는 화각으로 엘로이즈의 얼굴을 가깝게 줌인해서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 내내 '없음'으로 존재했던 그녀의 얼굴은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클로즈업된 채 아주 오랫동안 롱테이크로 비춰진다. 난생 처음 감각하는 교향곡의 강렬한 선율에 동요하고 서서히 타오르다 마침내 전율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끈기있게 천천히 비추는 지속은, 셀린 시아마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빚어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음악과 함께 한 얼굴에서 불과 물이 동시에 강렬하게 피어나는 장면을 언제 또 영화에서 마주칠 수 있을까.


*

작년 여성영화제에서 마주친 바바라 해머의 영화 이후 처음으로 극장에서 몇 번이나 전율하며 감상했다. 워낙 여러 겹으로 층층이 정교하게 조합되어 간결하게 압축된 영화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 너무 많아 조각 조각 대충 글을 이어붙였지만 그럼에도 미처 쓰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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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가 그린 초상화는 엘로이즈가 그토록 싫어했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지만,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준 사랑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림을 완성하는 동시에 이별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담담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히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한다. 아무리 억압적인 사회에서라도, 모든 것이 규범에 맞춰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지더라도 사실 그 안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연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깊고 또렷하게 사랑을 했다.


*


나한테 필요한 걸 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와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서 여성들 간의 사랑을 너무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사실 레즈 사랑이라고 해도 역학이 다 다르고 위계에 의해 끌리는 사랑도 있는데(캐롤처럼) 내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랑은 한없이 평등하고 비슷해서 내가 느끼는 걸 비슷하게 느끼는 사랑이기 때문에..


음...내가 감동한 예술의 강렬함에 전율하는 여자의 얼굴만큼 아름다운 게 또 없다고 생각...그런 만큼 엘로이즈의 얼굴은..더 리더에서 소년 합창단 노래 들었을 때 케이트 윈슬렛이 지었던 그 미치도록 천재적인 그 표정만큼이나 좋았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선뜻 강한 호감을 갖게 되는 장면은 그녀가 자신에게 오르페우스 신화 책을 빌려줄 때와 비발디의 사계 교향곡을 피아노로 연주해줄 때 인데 이 장면들 너무 잘 묘사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의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진짜...


*

사운드가 매우 섬세하게 디자인 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귀가 황홀했다. 거친 질감으로 짜여진 캔버스를 목탄이 서걱서걱 스치는 소리, 절벽 아래서 몰아치는 파도소리,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긴장감 속에 서로 내쉬는 호흡 소리 등. 반면 음악의 사용은 매우 절제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마리안느가 피아노로 교향곡을 표현하는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마지막 장면이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강렬한 감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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